https://youtu.be/AZ31RcGJkSA
11월17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루카 19,41-44
무엇이 우리의 눈을 잃게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예언하시면서 우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2)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멸망하게 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을 보호해 줄 가장 강력한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사람을 눈멀게 만드는 것은 ‘욕구’입니다. 망치를 든 이는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 욕구가 눈을 가리고 사건과 사물을 왜곡해서 보게 합니다.
돈만 아는 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재산만 노리는 사람들로 봅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대장내시경을 했습니다.
몇 년 전 대장내시경을 할 때가 기억났습니다.
변을 빼내기 위해 먹는 물과 약을 다 먹고는 9시가 넘어 피자를 먹었습니다.
워낙 입이 느끼한 상태에다가 누군가 선물해 준 피자가 눈앞에 있었습니다.
욕구가 생기니 보이는 게 없어졌습니다.
‘오늘 저녁에 먹으면 두 시간 뒤면 소화가 될 것이고 내일 아침에 세 번 더 빼면 되겠지!’
하지만 다음 날 계속 건더기가 나왔습니다. 그렇게 빨리 소화가 되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오전 내내 병원에서 다시 약을 먹으며 다 빼내고 오후에 대장내시경을 해야 했습니다.
욕구는 당연한 법칙을 지키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눈이 멀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눈을 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선악과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고통입니다.
나의 욕구 때문에 눈이 멀어 참 평화를 알아보지 못한 벌이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벌을 알면 욕구가 작용하지 못하기에 욕구가 지금의 단맛만을 바라보게 만들어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평화인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멸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방법이 없습니다.
욕구란 것 자체가 눈을 멀게 하여 고통을 준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보입니다.
제가 세속-육신-마귀를 쫓다가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에 제 인생을 바꿔준 책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가 눈에 들어왔던 것과 같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21회에는 6명의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나옵니다.
‘중2병’ 걸렸다고 말하는 금쪽이가 나옵니다.
금쪽이는 반항하고 분노 조절하지 못하고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싸움꾼이고 욕쟁이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 부모는 그것이 중2병 걸린 자녀의 탓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저희 욕심이 아이를 망친 거 같아요”라고 고백합니다.
아이 여섯을 키우다 보니 부모는 강력한 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들을 위한 법이 아니라 부모를 위한 법입니다.
중학생 아이가 7시 통금 한 시간 늦었다고 일주일 외출을 금지합니다.
불시에 소변검사를 통해 니코틴 검사를 합니다. 서열정리가 확실해야 해서 위 형제에게 덤비면 무조건 혼이 납니다.
금쪽이는 자기 가족 중 자기 편이 아무도 없다고 느낍니다.
이것에 반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욕구는 뜻입니다. 뜻은 법입니다.
가정에 부모의 법이 너무 지나치다는 말은
자녀들의 욕구를 볼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자녀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러면 자녀들은 그 가정에서 존재 가치를 잃습니다.
다시 말해 자존감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존감 없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여러 솔루션이 도입되었는데 저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권투를 배우는 중2 금쪽이와 아버지가 권투 스파링해 준 것입니다. 처음에 아빠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가진 금쪽이는 아빠를 사정없이 때립니다.
하지만 아빠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맞아주기만 하는 것을 보고 힘을 줄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힘이 빠진 아버지의 헤드셋과 글러브를 손수 벗겨줍니다.
아버지도 놀랍니다.
이것이 아마도 자기 뜻을 강요하지 않을 때 보이는 아이의 따듯한 마음일 것입니다.
내 뜻이 죽어야 상대의 뜻이 보입니다.
나의 눈을 가리는 것은 나의 뜻입니다.
상대의 뜻에 나의 뜻이 죽을 때 상대의 마음이 보입니다.
내 욕구는 다른 욕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사랑과 반대의 욕구를 지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본능과 반대되는 본성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분의 뜻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령은 우리 뜻을 불사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니 예수님이 구원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나의 뜻을 봉헌하는 것이 성령을 부르는 방법입니다.
성령으로 우리 눈의 비늘이 떨어지게 됩니다.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으라고 경비병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경비병들은 감히 예수님을 잡지 못했습니다. 지도자들보다는 자기 뜻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구약성경에도 나옵니다.
바로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있는 다윗을 잡기 위해
세 번이나 전령들을 보냈지만, 성령에 사로잡혀 예언자들이 되어버린 예입니다(1사무 19,18-24).
눈이 열려야 구원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이 세속-육신-마귀보다는 성령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주님과 가까이 머무는 이를 가까이 는 것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책이 될 수 있고 강의가 될 수 있으며 미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분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우리 욕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 사랑의 욕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경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분의 뜻으로 내 뜻을 살라버립시다.
그래야 예루살렘 성전처럼 멸망하지 않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