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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서예자료[533]회재선생시 독락〔獨樂〕
獨樂 - 《考異》:一作“幽居”。
독락-〈고이〉에 “다른 본에는 ‘유거(幽居)’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晦齋 李彦迪
離群誰與共吟壇 리군수여공음단
巖鳥溪魚慣我顔。암조계어관아안
欲識箇中奇絶處,욕식개중기절처
子規聲裏月窺山。 자규성리월규산
독락〔獨樂〕
무리 떠나 홀로 사니 누가 함께 시를 읊나
산새와 물고기가 나의 낯을 잘 안다오
개중에서 특별히 더 아름다운 정경은
두견새 울음 속에 달이 산을 엿볼 때지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2013
離群리군=무리 떠나. 誰與수여=누구와 더불어
共吟공음=함께 읊다. 壇=뜰 단.
巖鳥암조=산새. 溪魚계어=물고기. 慣=버릇 익숙할 관.
我顔아안=나의 얼굴.. 欲識욕식=알고자 하면.
箇中개중=그 가운데.. 奇絶기절=극히 기이하다.
子規자규=두견잇과에 속한 새. 몸길이는 25센티미터 정도로,
겉모습은 뻐꾸기와 비슷하나 훨씬 작다. 등은 어두운 회청색이고
배는 하얀색에 검은 가로줄 무늬가 있으며, 암컷은 멱과 가슴에 붉은 갈색을 띤다.
주로 산중턱이나 우거진 숲속에 살며 주로 곤충류를 먹고 때로는 다족류를 먹기도 한다.
우리나라, 중국 동북 지방, 일본, 우수리 강 등지에서 번식하고 동남아시아에서 겨울을 난다
聲裏성리=울음 속. 窺山규산=산을 엿보다.
원문=晦齋集 卷二 / 律詩、絶句
晦齋 李彦迪
경상북도 경주 출신. 본관은 여강(驪江: 여주(驪州)). 초명은 이적(李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회재라는 호는 회암(晦菴: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준 것이다. 할아버지는 참군 이수회(李壽會)이고, 아버지는 생원 이번(李蕃)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
열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을 받았고, 그에게서 글을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해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고, 성균관 전적, 인동 현감, 사헌부 지평,
이조 정랑 등을 역임했다. 1530년(중종 25) 사간원에 있을 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반대파에 몰려
관직에서 쫓겨났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 일파가 몰락한 후 다시 관직에 나와 교리와 응교 등을 거쳐,
1539년(중종 34)에 전주 부윤이 되었다. 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와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1547년(명종 2) 윤원형과 이기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 벽서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이언적은 유배지에서 도학 연구에 매진해 방대한 저술을 남겨 성리학 발전의 기틀을 세웠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유학을 국시로 내세운 조선이 ‘성리학’이라는 학문을 활짝 꽃피운 것은 건국 후 200년이 흐른 뒤였다.
영남 지방에서는 이황의 이기이원론적(理氣二元論的) 주리론(主理論)이, 기호 지방에서는
이이의 이기이원론적(理氣二元論的) 주기론(主氣論)이 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전에 이언적(李彦迪)이 있었다. 그는 조광조의 뒤를 이어 도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황의 주리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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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오현필》에 실린 이언적의 서찰
1544년(중종 39) 4월 25일에 이언적이 아무개에게 상대방 안후와 자신의 근황, 상대방을 떠나보내는
아쉬움 등에 관한 것을 내용으로 쓴 편지이다.
청빈하고 학구적인 공직자
유학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를 열 살 때 여의고 어머니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이언적은 진중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총명하고 성실해 학문을 즐겼는데, 여러 사람과 같이 공부할 때에 옆에서 장난을 치거나 시끄럽게 해도
못 들은 체하고 공부에 열중했다. 그 덕에 이언적은 일찍이 경전이나 역사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과거에
필요한 문장도 힘들이지 않고 익혔다. 외숙인 손중돈에게 배웠으나 대개 독학으로 학문을 익혔다.
“나의 도가 천성에 구비되어 있고, 학설은 모두 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진실로 마음만 먹으면
도를 얻지 못할 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세상 사는 데 필요한 학문 외에 내 몸을
닦는 학문에 뜻을 두고 홀로 연구하고 실천해 치지(致知)와 성의(誠意)를 공부하는 데 힘썼다.
1513년(중종 8) 스물셋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다음 해 문과에 급제한 후 이언적은 경주교관을 시작으로 이후
성균관 전적, 인동 현감, 사헌부 지평, 이조 정랑, 사헌부 장령 등을 역임하며 성실하게 공직 생활을 이어갔다.
중앙 관직 외에 안동 현감, 밀양 부사 등 지방 관직도 거쳤는데, 일을 처리하는
데 사리가 분명하고 법도가 있어 백성들의 칭송을 들었다.
한편 이언적은 관직에 머무르며 정무를 보는 동안에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516년(중종 11) 외숙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있었던 ‘무극태극(無極太極)논쟁’에 끼어들어
주자의 주리론을 지지했다. 서신을 통해 이루어진 이 논쟁은 한국 유학의 형이상학적 학술 논쟁의 시초로 여겨지고 있다.
1530년(중종 25)에는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다. 이때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 인종의 누이)와
혼인하면서 권력을 남용하고 사림들을 핍박한 김안로를 등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수많은 관료들이
세자(훗날 인종)를 보호하기 위해 김안로의 등용에 찬성했지만 이언적만은 극력 반대했다.
그는 “안로가 동경(東京, 경주) 부윤으로 있을 때 그의 마음 씀씀이와 처사를 익히 보니 참으로 소인의 마음이었다.
만일 이 사람이 뜻을 얻으면 반드시 나랏일을 그르칠 것이다. 또 동궁으로 말하면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기대하는 분인데 하필 안로가 꼭 있어야 편안하단 말인가.”라고 소신을 밝혔다.
하지만 결국 김안로는 다시 조정에 나왔고, 이언적은 파직되었다. 그러나 이 일로 김안로는
이언적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경주의 어떤 사람이 김안로에게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구하자
“이 일을 이언적이 알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다짐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권간들이 조정을 장악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이언적의 강직한 공직관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이언적이 활동한 시기는 사림이 세상에 나와 도학정치의 뜻을 펼칠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어 있지 않은 시대였다.
사림이 훈척들에게 화를 입을 가능성은 여전했다. 학식 높은 유학자들이 정치 일선에 나서기를 꺼리는 것도
이런 연유였다. 그러나 이언적은 왕이 도학을 통한다면 성리학적 정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개혁이 가능하리라고
믿고 출사했으며,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때문에 김안로가 재등용되는 것을 반대하다 파직을 당한 것이다.
이언적은 파직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자옥산 밑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궁구에 힘을 쏟아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7년간 갈고닦은 학문은 김안로 일파가 몰락한 후 재등용되었을 때 빛을 발했다.
이언적은 홍문관 교리, 응교, 직제학 등을 거쳐 전주 부윤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목민관으로서
정무를 보는 틈틈이 왕에게 지치(至治)를 구현하는 방도를 제시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려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음은 1539년(중종 34)에 올린 상소문이다.
전주 부윤으로 있을 적에 마침 재변이 있었으므로 나라에서 “바른말을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공은 몇 천 자에 달하는 긴 글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벼리가 되는 것은 임금의 마음이고
그 조목이 열 가지이니 집안을 엄하게 다스리는 것, 세자를 양성하는 것, 조정을 바로잡는 것,
사람의 채용과 파면을 신중히 하는 것, 하늘의 도를 따르는 것,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
말하는 길은 터놓는 것, 사치와 욕심을 경계하는 것, 군사 행정을 닦는 것, 기미를 살피는 것입니다.”
라고 해서 그 충성과 정직함을 다했다.
《연려실기술》 권10, 명종 조 고사본말
중종은 상소를 받고 깊이 칭찬해 이르기를 “옛날 진덕수(眞德秀)도 이보다 나을 수는 없으리라.”고 하며
세자에게 보이도록 명했다.
즉위 후 인종은 이언적을 발탁해 우찬성에 제수하려고 했는데 그는 두 번이나 사양했다.
그러자 왕이 전지를 내려 “지난해 선왕께 올렸던 경의 글을 읽어 보고 이미 탄복하고 있던 터이며,
또한 서연(書筵)에서도 경의 강설을 듣고 내가 마음에 두고 있은 지가 오래되었다.”라고 간곡히 일렀다.
이 말을 들은 이언적은 인종의 덕성과 학식이 왕도정치를 실현할 만하다고 믿고 관직에 오르기도 했다.
인종이 갑자기 죽어 명종이 등극한 후에도 이언적의 왕도정치에 대한 기대는 변함이 없었다. 당시 좌찬성이었던
이언적은 영의정 윤인경(尹仁鏡), 좌의정 유관(柳灌), 우찬성 권벌 등과 함께 대왕대비에게 임금의 자질을
기를 것을 요망하는 경계문을 올렸다. 이언적의 상소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성리학자로서
도학적 경세론이 실현되길 바라고 개혁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을사사화
이언적은 문정왕후와 척신들의 전횡 속에서도 왕도정치의 실현을 꿈꿨다. 그러나 학문의 도를 현실 속에서
구하고자 했던 성리학자로서의 열망은 1545년(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를 맞아 무너지고 말았다.
을사사화는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외척 윤임 일파와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의
외척 윤원형 일파 간에 일어난 권력 다툼에 사림들이 무고하게 화를 당한 사건이다.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이 등극했을 때는 윤임 일파, 이른바 대윤이 득세했다. 그러나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죽자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왕이 되었고 윤원형 일파인 소윤이 득세하게 되었다.
인종은 학식과 덕망이 높아 사림들의 왕도정치에 대한 기대를 모았고, 이에 부응해 인종도 재야에 있던
사림들을 대거 등용했다. 이언적은 물론 유관, 이조 판서 유인숙 일파의 사류 등이 이때 정권에 참여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자 세상이 달라졌다.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은 어린 명종의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대비를 등에 업고 대윤을 제거하려고 했다. 소윤에는 중추부지사 정순붕(鄭順朋), 병조 판서 이기,
호조 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 판서 허자(許磁) 등이 있었는데, 그들은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 중종의 8남)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고 획책했다고 무고했다. 또 인종이 죽었을 때
윤임이 경원대군(명종) 대신 계림군(桂林君)을 추대하려 했고 여기에 유관, 유인숙이 동조했다는
소문도 퍼뜨렸다. 이 일로 윤임과 유관, 유인숙 등은 반역 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고,
여러 사림들도 무고하게 연루되어 유배되거나 사형되었다.
이때 좌찬성이던 이언적은 권간들의 독촉으로 취조관이 되었는데, 억울하게 연루된 사림들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윤임의 죄를 다스릴 때는 “남의 신하된 사람은 마땅히 자기가 섬기는
분에 대해 마음을 다하는 것이거늘 당시 마음을 다해 대행왕을 섬기던 사람에게 어찌 무거운
죄를 줄 수 있겠는가. 또한 일을 할 때에는 마땅히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억울하게
걸리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된다.”라고 말했다. 추관을 담당했던 일로 이언적은 굳이 사양했음에도
공신에 봉해졌으나 곧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리고 2년 후 양재역 벽서 사건 때 직언하는
이언적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윤원형과 이기 등에 의해 유배되었다.
그러나 훗날 이언적은 을사사화와 관련해 사림들에게서 서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을사년의 난을 당해서는 바른말로 절의를 세우지 못하고 여러 번 문초관이 되었으며,
가짜 공신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비록 마침내 죄를 받기는 했지만 이마에 땀이 흘렀을 것이다.
이러하니 어찌 도학자로서 그를 받들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만큼 어진 이도
그리 쉽게 얻을 수 없는데, 공이 시대에 용납되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사람을 평할 때에는 먼저 그 사람의 큰 절조를 본 후에
그의 세세한 면을 논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이, 《석담일기》
이이는 이언적이 사림으로서 추관이 되어 바른말을 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반면 유성룡은 이와 다르게 보았다.
세상 사람이 그때에 권충정(權忠定, 권벌의 시호)은 죄 받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논쟁했으나 회재(晦齋)는 말하지 않는 것을 보고 직절(直截)함이 모자란 듯하다 했다.
그러나 당시에 회재가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금에 와서 본다면,
충정이 한 말은 작고 회재가 한 말은 크다.
유성룡, 《서애집》
윤임을 비롯한 대윤 일파가 부당한 죄에 연루되어 유배되거나 사형되기에 이르자 권벌은 상소를 올려
그들의 무고함을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일은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이언적은 권벌의 상소 가운데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삭제하고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만 측량할 수 없는 화만 일으킬 것이다.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그는 임금에게 간언을 하되 만일 말해도 소용이 없고 도리어 사태가 심각해진다면,
비록 말해야 할 일일지라도 때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서 유성룡은 사림의 도를 다하고 절개를 보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당시처럼 어느 때
누구에게 화가 미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림의 구원을 위해 온건한 해결 방안을 모색했던
이언적의 처신이 더 타당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유배지에서 더한 도학의 깊이
1547년(명종 2) 9월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권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가 발견되었다. 윤원형 일파는 이 일을 명종에게 보고하고 윤임 일파에 대한
처벌이 부족해 생긴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섭정을 하던 문정대비는 윤원형의 말을 받아들여
명종에게 처벌을 요구했다. 그래서 잔당으로 지목된 봉성군(鳳城君, 중종의 서자)과
송인수(宋麟壽), 이약빙(李若氷) 등을 죽이고 이언적을 비롯해 권벌, 노수신(盧守愼) 등 20여 명을 유배시켰다.
이언적의 죄는 을사사화 당시 유인숙 등과 결탁해 역적을 구원하려 했다는 것으로,
윤원형과 이기 등이 서슴지 않고 직언하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연루시킨 것이었다.
이언적은 유배의 명을 전해 듣고 온 집안이 울부짖는데도 낯빛이 평온했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이야기하고 웃으며 가솔들에게 “어머니를 잘 모셔라.
하늘이 위에 계시니 내가 오래지 않아 돌아올 것이다.”라고 했다.
이언적이 유배되어 간 곳은 춥고 먼 강계였다. 이언적은 유배 생활 중에도
항시 몸을 단정히 하고 학문에 열중했다. 그러나 유배 생활은 춥고 힘든 법이다.
게다가 이언적은 청렴해 살림이 곤궁했기에 어느 겨울날에는 옷이 얇아서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때 동지(同知) 장세호(張世豪)가 북경에 사절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이언적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하나, 조정에서 얼어 죽으라고야 하겠는가.” 하면서
여우털 갖옷을 벗어 주었다. 당시 죽거나 귀양 간 사람들은 대부분 죄가 왕실과 관계있었기
때문에 비록 친척이나 친구라도 서로 찾아보지 않고 다만 자기에게 화가 미치지 않을까 걱정할 뿐이었다.
그런데 장세호는 무인으로서 이언적과 안면도 없는 터에 호의를 베푼 것이다.
이언적은 굳이 사양하지 않고 그의 따뜻한 마음을 받아들였다.
유배 생활은 힘들기는 했으나 이언적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평생 학문을 하고 생각해 온 바를 정리해 저술하는 데 힘을 쏟아,
그곳에서 지내는 7년 동안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서들을 남겼다
. 《봉선잡의(奉先雜儀)》, 《구인록(求仁錄)》, 《진수팔규(進修八規)》,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혹문(續或問)》 등이 그때 남긴 책들이다.
《구인록》에서 이언적은 ‘인(仁)’을 국가 경영의 근본임을 밝히며 유학의 근본 정신을 탐구하고 있다.
《봉선잡의》는 주자의 《가례》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재구성한 것으로 조선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었다.
왕도정치의 요령을 담은 《진수팔규》는 이언적 사후 서자 이전인(李全仁)이 명종에게 바치고
밝게 쓸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사림 5현에 들다
이언적은 7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필생의 저작들을 남기고 1553년(명종 8)에 세상을 떴다.
이언적의 학문과 청빈한 공직 생활, 왕도정치를 위한 노력과 충정 등은 당대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언적의 학문적 관점이 이황에 의해 집대성되면서 그는 조선 주리 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았으며,
성리학의 학통을 잇는 정통 계보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사림들이 정치 일선에 나선 선조 대를 거쳐
광해군이 즉위한 후인 1610년(광해군 2)에 마침내 사림 5현으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그렇다면 사림 5현은 누구이며, 문묘 종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조선 시대는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 유교 국가였다. 그래서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를 받드는 사당인 문묘를 두었다.
조선 시대 사림들이 가장 존경했던 주자도 여기에 종사되어 있다. 그런 만큼 공자와 주자와
더불어 같은 사당에서 제향된다는 것은 유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영광이었다.
사림 5현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통칭한다. 이들은 저마다 사림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아 16세기 후반부터 사림파의 학통을 이룬 인물들이다. 수차례의 사화를 거치면서
선조 대에 드디어 정치 전면에 나선 사림들은 자신들이 학통을 잇는 유학자들을 문묘에 종사함으로써
사림정치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싶어 했다. 이황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을 일컬어
사림 4현이라 먼저 불렀고, 이황이 사후에 포함되어 사림 5현이 되었다.
유생들이 사림 5현의 문묘 종사에 대해서 처음 발론한 것은 1510년(중종 5)이었으나
1610년(광해군 2)에야 비로소 실제로 종사되었으니 꼬박 100년이 걸렸다.
이처럼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사림들의 시대를 열어준 선조가 이에 대해 의외로 냉담했고,
조신들도 자신들의 견해에 따라 사림 5현에 대한 찬반이 분분했기 때문이었다.
선조나 이준경의 경우 이언적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황은 자진해서 이언적의 행장을 자세히 써서 그가 도학을 확립한 공을 높이 평가했다.
이황은 특히 이언적이 조한보(曺漢輔)와 왕래한 무극태극에 관한 편지를 중시했다.
주자가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자신의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을 본떠,
이언적의 무극태극론을 그가 주장하는 주리론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언적이 지은 《대학장구보유》, 《속혹문》, 《구인록》,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의
내용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하여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음에도 4현에 올려 종사하고자 한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관학과 홍문관, 각 도의 유생들을 중심으로 사림 5현의 종사를 촉구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고, 마침내 광해군은 5현의 문묘 종사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1610년 음력 9월 5일 김굉필과 조광조, 이황은 동쪽에 정여창,
이언적을 서쪽에 봉안해 사림 5현의 문묘 종사가 성사되었다.
이언적의 졸기에는 그를 이렇게 말한다.
그의 학문이 연원은 없으나 스스로 사도(斯道)에 분발하니 은연중 빛나서
덕이 행실에 부합되고 문장이 붓끝에서 나오면 교훈되는 말이 후세에 전해져
동방에서 자못 비견할 사람이 드물었다.
《명종실록》 권15, 명종 8년 11월 30일, 이언적의 졸기
생전에는 크게 평가받지 못했으나 사후에나마 그의 학문적 성취가 빛을 발한 셈이다.
조선 성리학에서 이황을 빼놓고 말할 수 없고, 이황을 말하자면 이언적을 빼놓을 수 없다.
그만큼 이언적은 조선 성리학의 큰 맥을 이루는 대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