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5년 나해 2월12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수도회] 울타리 없는 믿음의 나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창세 2,18-25
† 복음 마르 7,24-30
★ 하느님께서는 사람(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서 여자
(하와)를 창조하셨다. 혼인은 인류 번성의 기초이고 독자가 아닌 공동체
삶의 기본 요소이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은 서로 기능적 협력자이고
파트너임을 알게 한다(제1독서).
★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한 이교도 여인이 구마의 자비를 청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민족 차별적인 태도를 보이셨다. 그러나 그 여인의 믿음이
민족을 뛰어넘는 것임을 보시고 딸을 마귀에게서 구해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아!’ 마귀 들린 딸을
구해 주십사는 여인의 호소에 만민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개로
비유하시다니! 복음 나누기에서 “이건 예수님답지 않네요.” 하던 누군가의
말에 충분히 공감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초점은 예수님이 아니라
‘여인의 믿음’이다. ‘제발 딸만 구해 주세요. 개가 아니라 쥐라고 부른들
상관없어요!’ 모성애는 위대하다.
어머니의 눈물겨운 사랑이 있는 가정은 삼위일체의 하느님과 나자렛의
성가정만큼이나 완전한 공동체이다. 가정이 공동체 세계의 기초다. 그래서
교회는 가정을 완전에 가까운 공동체 모델로 삼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또
교우들을 형제자매라 부른다.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시기에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하느님과 한 몸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 사상이자
공동체의 영성이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정은 대가족과 친지로 마을을
이루고, 인정과 도덕과 자치와 원로의 권위가 있는 소사회를 이룬다.
건강한 ‘본디의 삶’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의 자녀 사랑이 가정과 혈연을 넘어 이웃과
인류에게 미친다면 전쟁도 빈부의 양극화도 없는, 지상의 하느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농경 사회와 마을은 사라지고 대가족은
해체되었으며 가족마저 함께 밥도 먹지 못하는, 가정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난해 4월에 성인의 반열에 오른 요한 23세 교황은 “사람은 함께 사는 데
의미가 있다.”고 가르치셨다. 병든 시대를 치유하여 사랑의 사회로 가는
길은 서로 함께 사는 데 있다. 대가족이 함께 사는 마을이 복구되어야 한다.
작은 삶과 마을의 회복 없이 가족애를 뛰어넘을 방법이 없다. 미래가 없어
보인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믿음의 승리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2월12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성모영보수녀원 피정8일째),
창세2,18-25 마르7,24-30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18-25
복음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4-30
믿음의 승리
믿음의 승리, 사랑의 승리, 인간의 승리입니다. 간절한 믿음의 승리,
자기와의 싸움에서의 승리, 결국은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위대한 삶, 위대한 만남, 위대한 작품이 나옵니다.
그러니 저절로 눈길은 삶이나 만남, 작품의 배경으로 향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꽃들 이면의 사계절의 변화, 뿌리와 잎들을 보게 되는 이치와
흡사합니다.
내외적 시련(試鍊)과 고난(苦難), 아픔을 겪어내며 성숙의 결과가
위대한 삶, 만남, 작품임을 깨닫습니다.
언젠가 읽다가 메모해둔 구절이 생각납니다.
- <내 청춘의 감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이 구속 당시 구치소에서 읽고 웃은 책이라고,
감옥 이야기가 이렇게 유쾌할 수 있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고 하던데요.
그 다음 문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그 유쾌한 글자들을 둘러싼 모든
여백은 아픔과 고통이라고 봐야 한다". 주제문이 아닐까요?
대부분 성공에는 보이지 않는 실패가 많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바로 다음 대목을 주목해야 합니다.
'유쾌한 글자들을 둘러싼 모든 여백은 아픔과 고통이라고 봐야한다.'
꽃만 보지 말고 뿌리의 배경도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어둠이 깊으면 별은 더욱 영롱하게 빛나듯 숱한 아픔과 고통을 이겨냈기에
삶이나 만남, 작품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베토벤의 불후의 명작이
귀머리가 된 후에 나왔다는 사실도 이를 입증합니다.
-신부님의 강론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전혀 눈치챌 수 없는,
기쁘게 사는 모습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아픔이 있어요.-
"그럴겁니다. 때로 이런저런 내외적 시련과 아픔을 견뎌내며
하루하루 무너지지 않고 살아내기위한 나와의 싸움인 삶이었고
그런 면이 강론에 은연중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지인과의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참 역설적인 것이 삶이 간절할수록, 삶이 어렵고 아픔이 클수록,
강론은 아름답고 영롱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또한 감사해야할 주님의 은총입니다.
어제 소개한 민경숙 루치아 교장님의 그림에서도 바로 직감한 이런
면입니다. 그대로 믿음의 승리, 사랑의 승리, 자기와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그림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을 출산(出産)한 이면의
그 엄청난 내적 시련과 아픔을 감지합니다. 하여 그림이 아름답고 많은
이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위로와 힘을 줍니다, 개인전 도록을 청하여
카톡으로 받아 본 후 보낸 나의 소감을 두서 없이 소개합니다.
"아, 좋습니다. 그림이 밝고 힘이 있습니다.
생명과 희망이 샘솟고 약동하는 분위기입니다.
또 맑고 깊습니다. 언뜻 스친 소감입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림을 통한 복음 선포입니다.
자매님의 고통과 아픔, 열망을 그림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림을 통한 구원입니다. 그대로 하느님 찬미기도 같은 그림입니다.
시편을 노래한 그림입니다. 그림이 그대로 기도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어 감동을 줍니다.
하느님 향한 열렬한 사랑의 고백같은 그림입니다.
모든 그림이 그렇습니다.
'절망은 없다' 메시지가 전달되며 강인한 생명력을 느낍니다.
모든 그림이 그렇고 신선한 충격입니다. 지나쳐 버리기 쉬운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 이들이 중심소재가 되어 빛을 발합니다. 그림을 통한 영적독서,
감사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위로와 평화를 빕니다."
이렇게 그림에 감동하여 아낌없이 찬사를 드리긴 처음입니다.
주님은 그림을 통해 자매님을, 주님은 강론 말씀을 통해 저를
구원하였습니다. 비교하면 자매님은 '색으로 그린 강론 같은 그림'이라면,
내 경우는 '글자로 그린 그림 같은 강론'입니다.
공통점은 '아름다운 하느님의 열렬한 추구'라는 점입니다.
간절한 믿음, 간절한 사랑 있을 때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입니다.
주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도 받습니다.
산티아고 순례후 저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산티아고 간다하면 말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권할 마음은 없다.
권해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체력이 좋고 정신력이 좋아도
간절한 원의가 없으면 힘들다. 간절함이 우선적 조건이다“
말하며 간절함을 강조합니다. 산티아고 순례뿐 아니라 평생인생순례여정이
그렇습니다. '하루하루'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야 주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의 구원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파트너간의 만남이 감동적입니다.
창세기 독서에서 사람과 그 아내의 만남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낸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얼마나 심오하고 아름답고 간절한 부부일치의 예화인지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시리아 페니키아 이교도 출신 부인과의 만남도
극적입니다. 이교도 부인은 간절하고 겸손한 믿음이 있어 주님을 만났고
마침내 주님의 항복(降服)을 받아 내니 말그대로 믿음의 승리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부인의 간절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즉각적인 치유의 응답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갈망함은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반쪽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하나될 때 온전한 인간, 거룩한 인간으로서의 참 나의 실현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아담이 하와가 만나, 이교도 부인이 주님과
만나 하나되듯이, 우리 역시 주님과 만나 하나되는 구원의 시간입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7).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시편128,1ㄱ)!"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울타리 없는 믿음의 나라
2015년 나해 2월12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마르 7,24-30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마르 7,29)
울타리 없는 믿음의 나라
폐쇄적인 본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들어 이교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뿐더러 이교도인 전도를 비판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개방적인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인 전도를 활발히
전개했는데, 그것을 정당화할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드물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교도인을 고쳐 주신 기적들을 들어
이교도인 전도를 옹호했다.
시리아 페니키아는 티로와 시돈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유대인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이교도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이스라엘 땅에서 당신 백성을 상대로 활약하셨다.
외국으로 가신 때나 외국인을 상대하신 때가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물었다. 마르코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티로 지방에서 결코
낯선 인물이 아니었다(3,8).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한 부인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7,25-26) 그것을 증명해
준다. 이 대목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예수님과 시리아 페니키아 부인의
대화 내용에 있다(7,27-29).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예수님께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하였다(7,25-2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7,27)하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의 핵심은 여인의 간청을 거절하는데 있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부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7,28). 그 부인은 마치 예수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재치 있게
응답함으로써 그분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부인의 확고한 믿음을 보고서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네 딸에게서 나갔다.”(7,29) 하고 말씀하신다. 결국 그녀가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을 전적으로 믿음으로써 그 부인의 딸이 더러운
영으로부터 해방되었다(7,30). 이처럼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구원은
유대인 또는 이교도인이라는 외적인 관계보다는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임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적인 잣대와
울타리를 허무시고, 오직 믿음만으로 이교도까지도 치유해주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가 만든 기준, 나의 경험과 감정에 따라 형성된 틀을
들이대며 내가 원하는 관계만 맺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겠다. 영적인
성숙도는 나의 물리적, 심리적, 정서적, 영성적 울타리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에 달려 있다. 살아가면서 건전한 ‘경계선 형성’이 분명 필요하지만,
창조의 낙원, 복음의 터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고 울타리 없이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축제의 자리여야 할 것이다.
오늘 나에게 시리아 페니키아 부인이 예수님에 대해 지녔던 한결같은
믿음이 있는가? 또 진실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개방성과 의탁의 자세가 있는가? 그녀처럼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님 말씀만 듣고 딸의 치유를 믿는 흔들림 없는 신앙과
수용의 자세가 있는가? 참된 믿음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모습을 감추신다 해도 결코 흔들림이 없이
내맡기고 의탁하는 것이리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서울] 연중 제5주간 목요일
2015년 나해 2월12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18-25
복음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4-30
인간에게 질병을 주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는 아주 짧은 시간에
세대교체를 이룬다고 합니다. 세대교체를 이루는데 30년가량 걸리는
인간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의 공격을 쉽게 막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전략은 남, 여의 성을 통한 생존이었다고
합니다.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23개씩의 염색체가 있는데 이들 염색체의
조합은 64조 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동안 지구상에 존재했던 인간은
1000억 명 정도 된다고 하니 앞으로도 유전적으로 같은 인간이 등장할
확률은 없다고 합니다. 남녀의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지만 인류의
생존을 위한 완벽한 조화이기도 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서 기르는 것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완벽한 요새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가정이
모여서 마을을 만들고, 마을은 모여서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또 모여서
국가를 이루는 것입니다. 국가는 경제, 교육, 문화, 보건, 국방, 외교라는
강력한 백신을 만들어서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내부의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배우자를 주신
것은 이처럼 커다란 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이 상품처럼 거래된다면
가정에는 치명적인 독소가 될 것입니다. 가족들의 대화가 사라지고 가정이
하숙집처럼 변한다면 인류생존의 토대가 무너질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남자와 여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피부색이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우리들의 시작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고, 서로 이해하여야 하며, 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바로 그런 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방인 여인의 청을 들었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딸에 대한 사랑을 보셨고,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딸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편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 볼
때가 있습니다. ‘피부색, 직업, 학력, 국적’에 따른 편견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편견이 필요할 때가 있었습니다. 아직 우리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라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문화, 생각, 철학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린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병든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2015.02.1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창세 2,18)
여러분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세요? 아님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나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좀 식상한 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분명 혼자 살 수는 없겠지요.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협력자로 짝을 만들어 주셨다네요.
옛날에는 대가족 안에서 함께 더불어 갈아가는 것이 정상이었는데
갈수록 함께 할 짝을 찾기가 힘들고 독신주의자들이 많아지니
참 걱정스럽습니다.
지같은 수도자도 독신이지만 사실 한 사람에게 매여 살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선택이지요.
그런데 갈수록 같이 살아도 홀로이고 독신주의는 함께 삶이 부담스러워
선택하는 부정적인 면이겠지요.
혼자 살든 함께 살든 중요한 것은 나의 짝 나의 협력자 나의 도반이
얼마나 있느냐의 문제이겠지요.
오늘 나의 짝 나의 협력자들에게
"함께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인사해 봅시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믿음만이 살길이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2월12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마르7,24-30)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18-25
복음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4-30
믿음만이 살길이다.
어떤 생선장수가 마을에 가게를 내고 간판을 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신선한 생선을 팝니다.” 한 사람이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신선한’은
빼시오. 다 신선한 생선 아니오?” “그렇군요.” 그래서 “신선한”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빼도 되지
않을까요? 다 알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팝니다.’라는 말도 빼야지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생선’이라는 글자도 필요 없습니다.
근처에 오기만 해도 생선냄새가 나니까요.” 그래서 간판 없는 생선가게가
되었습니다. 결국 고객들은 그 사람이 생선 장사를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되 흔들리지 않는 주관과 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7,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 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결국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은총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헛배가 불러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음식을
권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이교도에게도 구원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이교도 여인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인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며
기대하는 자세는 예수님께 대한 그녀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은 드러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갈라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하늘을 움직이게 하는 힘
2015년 나해 2월12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18-25
복음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4-30
하늘을 움직이게 하는 힘
무시하는 말로 되게 핀잔을 받으면 무거운 십자가를 지듯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게 시험인줄 몰랐지만 잘 견디어내면 많은 점수 받는 거지요.
자기 딸을 강아지 취급해도 잘 견디는 모습에 예수님은 감탄하였습니다.
그것도 예뻐지게 돈 벌게 같은 물질적 것이 아니라 영적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 여인의 자세가 표준 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앙은 세상 물질계를 뛰어넘어 하늘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말하겠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마르코 7,29~30)”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인생극장
2015년 나해 2월12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18-25
복음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4-30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인생극장
가난한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을 향한 돈보스코 성인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가 남긴 어록 중에 어떤 표현들을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입니다. “한 청소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도 절할
용의가 있습니다.”
실제로 돈보스코 성인은 자신이 시작한 청소년 구원 사업의 존폐 위기에
처하자 그야말로 ‘악마 같은’ 존재에게도 머리를 공손히 조아렸습니다.
때로 아이들을 위한 생계비 잔고가 아슬아슬해지자 자존심이 남달리
강했기에 죽기보다 힘들었던 일, 거드름피우는 부자들을 찾아가 손을
벌렸습니다.
사랑하는 청소년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돈보스코의 극진한 부성애를 잘 엿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딸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이교도 여인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거듭 청이 거절당하고, 심지어
‘강아지’ 소리까지 들었지만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딸만 살린다면 그 어떤 수모도 상관없다는 이교도 어머니의 극진한
모성애가 돈보스코 성인의 뜨거운 부성애와 겹쳐집니다.
만민형제애를 지니셨던 예수님, 열린 사고의 소유자셨던 예수님,
대자대비하신 예수님이셨지만 오늘 발언은 조금 ‘거시기’합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 큰 오해를 살수도 있는 발언이었습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코 복음 7장 27절)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리기 위해서 때로
질책도 하시고 때로 모욕도 겪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시련과 고통을 보내십니다. 이교도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조금은 ‘특별한’ 말씀은 이렇게 큰 틀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이 한 세산 살아가다보면 때로 우리가 조금도 원치 않았던
십자가를 보내십니다. 때로 칠흑처럼 어두운 밤길을 걷게도 하시고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도 건너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힌 일을 겪게 하시는가?’할 정도의 괴로움도 겪습니다.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비참함도 마주하게 하시며 너무 큰 고통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게까지 하십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깨달음의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음을,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더 키워주기 위한 예방주사였음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로 충만하신 분, 우리가 잘되기만을 바라시는 분, 그래서
결국 시련의 과정을 잘 극복한 우리에게 큰 상급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극장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실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갈비뼈로 친구를 사귀어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2월12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셨다 >
독서: 창세 2,18-25
< 갈비뼈로 친구를 사귀어라 >
우리는 ‘군중속의 고독’이란 말을 많이 듣습니다. 우리 또한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친구를 사귀려고 하지만 내가
외로울 때 막상 전화기를 잡으면 편하게 전화 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더 외로워지는 것은 전화번호는 수백 개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 편하게 불러낼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외로운지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서도 핸드폰으로 끊임없이 또 다른 타인과
문자를 주고받습니다. 단 한 사람과도 온전한 소통을 할 줄 모르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친구를 사귀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그의 집은 몹시 가난했습니다. 그의 어릴
적 친구들은 그를 진정으로 도와주고, 먹을 것이 있으면 항상 반을 나눠주곤
했습니다.
30년이 흘러 그는 성공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떠나온 고향이
그리웠던 그는 고향으로 가서 어린 시절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초대받아
온 친구들은 선물로 기쁜 마음을 표시했습니다.
그런데 한 옛 친구가 손에 술병 하나를 들고는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미안하네. 내가 늦었군.”
모두 그 친구가 어렵게 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몸을
일으켜 친구가 든 술병을 받아 들고는 모두의 잔에 따라 주었습니다.
부자는 “맛이 어떤가?”라고 모두에게 물었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서로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친구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부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습니다.
“근래 내가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각양각색의 술을 먹어보았네만 오늘
술처럼 이렇게 맛있고 나를 감동시키는 건 없었네.”
부자의 눈이 어느새 촉촉이 젖어있었습니다. 그 친구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술병에 담긴 것은 술이 아니라
물이었습니다. 그 물병은 너무도 귀한 우정을 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약삭빠른 청지기’ 비유를 통해 그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것처럼, 우리 또한 “부정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정한 재물’이란 무엇일까요? 생명까지 포함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나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모두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것을 준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것을 주고 있는 것이니 ‘부정한 재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안에 한 가지 중요한 진리가 숨어있습니다. 즉,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내어주지
않고서는 친구를 사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아담을 위해 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냥
만들면 되겠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의 갈비뼈를
이용하셨습니다. 갈비뼈를 빼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 희생의 재료로 하와를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을
해 주어야 하는 마음을 언제나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친구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외롭게 된 이유는 자신 것부터 챙기는 이기주의가 팽배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갈비뼈를 남에게 주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
친구를 사귈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신장 하나라도 아낌없이 떼어 줄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은 외로울 수 없습니다. 세상에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진정으로 나는 나의 갈비뼈를
상대에게 내어주려 했는지부터 돌아보아야 합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모성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5년 나해 2월12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마르코7,27)
----
(오늘의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보다 마태오 복음(마태오15,21-28)이 더욱
상세하게 묘사 되어있습니다.
오늘은 2년 전, 마태오 복음의 같은 내용에 대한 묵상을 옮겨봅니다.)
묵상 하나.
병든 자식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방인 여성.
어떻게 해서라도 그분을 만나 그분께 자신의 소망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으로 그녀를 대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러한 모멸적인 답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예수님을 설득시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는 감동하시며 그녀의 딸을 치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여인에게 그토록 모진 말씀을 하셨을까요?
나름대로 짐작해봅니다. 예수님의 움직임에 군중들은 모여들었고,
제자들은 신경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선생님의 움직임을 방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아무 반응을 보이시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여인을 어떻게 좀 해달라 하자, 그제서야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말을 거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마음을 이미 읽고 계셨고, 그녀가 보여줄 태도도 알고 계셨음입니다.
이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제자들을 비롯한 군중들에게 메시지를
전하시고자 한 것이 분명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너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
묵상 둘.
엄마들의 자식에 대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성(母性, Maternitas)이라는 말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 오해를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을
나누어 봅니다.
모성이라는 말은 완성된 개념의 단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원초적 본능에 가깝습니다. 즉, 모성이 완전에 가까운 사랑이라던가
숭고함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모성이란 하느님께서 여성에게 심어주신 하나의 커다란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자식에게 집중되는 힘입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힘입니다.
하지만 그 힘은 자녀를 향한 올바른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일그러진 형태의 애착이나 집착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의
학교를 들여다보면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아닌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무색합니다. 너무도 이기적인 아이들이
만들어져 세상에 던져지고 있습니다. 더욱 빠른 속도와 더한 무게를 갖고
이기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엄마들의 길을 잘못
찾은 모성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훌륭한 이들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이들 뒤에는 그렇지 못한 어머니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여성이 자녀에 대한 모성은 가지고 있지만,
그 모성이 꽃을 피우느냐 마느냐는 모든 엄마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에 대한 삐뚤어진 감정 세계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너무도 많은 세상입니다. 물론 그 여성들도 그 어머니들에게
잘못 해석된 모성으로 사랑을 받은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졸업장도 든든한 경제적 배경도 아닙니다. 유전적 뛰어난 외모도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가치입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마음입니다.
신앙인이라면 그 가치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