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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30도를 웃도는 날씨를 지냈습니다. 이 주말은 시원한 빗줄기가 내릴듯합니다. 잠시 쉬어 가는 거죠. 하기야 지구촌 여기저기 40도를 넘어 50도까지 되는 곳도 있답니다. 세상에! 어떻게 살죠? 그래도 살아갑니다. 우리는 적응하게 됩니다. 고생이야 없는 사람들이 합니다. 밖이야 덥든 춥든 안에서 맘대로 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걱정하겠습니까?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지니고 있기에 기후문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가 봅니다. 내 배 부른데 남 걱정하겠습니까? 사실 짧은 생각이지요. 한 배 타고 일등석에 앉아 있다고 가라앉는 배에서 예외일 수 있습니까? 하기야 그들만의 구명보트가 마련되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지구 밖으로 나간다 한들 몇 년을 더 살겠습니까?
아무튼 기후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눈 좀 떠야 하는데 말입니다. 당장 포탄이 오가는 것만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우리 세대만 편안하면 그만이다 하는 생각도 너무 이기적이지요. 시야를 좀 더 넓혀야 하는데 말입니다. 참 전혀 뜻밖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 전남에도 지진이 일어날 수 있구나, 그러면 이 조그만 땅덩이 어디인들 안전하겠습니까? 얼마나 놀랐을까요? 우리는 아직 지진 경험이 그다지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연습도 하고 마음 준비도 해놓아야 할 듯싶습니다. 우리가 선 땅이 갑자기 흔들린다고 상상하니 뭣부터 해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기본지식이라도 알아두어야 하겠습니다. 거 참!
세상이 흔들려도 마음만은 확실하게 붙잡고 있어야 하겠다 싶습니다. 6월도 중순, 날은 뜨거워지는데 마음도 뜨겁게 여름을 이겨나가면 좋겠습니다. 건강하게 신나게 주말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
2024년 6월 15일 김종우 목사 드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 : 9)
<설계자>
사고가 사건이 되려면 그만한 증거가 필요하다, 그렇습니다. 사실 내가 범인이라고 말해서 범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는 별난 일들도 있어서 좋은 일이 아니라 나쁜 일로도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만큼 유명한 사람을 걸고 넘어져야 합니다. 유명인사가 갑자기 죽음을 당했다고 가정해봅니다. 사회적 관심이 집중됩니다. 그런데 그 유명인을 살해한 범인이 나타납니다. 덩달아 관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노리는 것이지요. 하기야 밥 벌어먹기 힘든 세상이니 어찌 보면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이 굶지 않고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별난 일이 있지만 별난 사람도 있고 또 별난 직업도 있는 줄 압니다. 추천할 만한 직업은 아니지만 ‘청부살인’이라는 직업도 있습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겠지요. 대부분 이해관계로 인한 득실 문제에 기인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원한관계로 인하여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본인이 수행하기 어려우니 의뢰를 합니다. 그만한 재력이 있어야 가능하겠지요. 사람을 해치는 일인데 법적인 제제가 따를 것입니다. 죄의 대가까지 치러야 합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으로부터 의뢰를 받은 일이지만 분명한 살인이니까요. 그런데 자기 인생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런 직업을 가져야 하는가, 질문을 해봅니다.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는데 어쩌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살인청부로 인하여 사람을 해하였는데 그것을, 그 사건을 사고로 위장할 수 있다면 말 그대로 완전범죄가 될 수 있겠지요. 살인과 사고사는 분명 다릅니다. 재판이 필요 없는 일입니다. 범죄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의뢰자도 살인자도 모두 이득(?)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건을 사고로 위장해줄 수 있는 직업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참, 세상 요지경이지요. 그런데 누가 그것을 부탁할까요? 청부살인을 의뢰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차피 살인사건을 발생하면 직접 살인한 범죄자도 잡으려 수사하겠지만 그를 체포하고 나서는 동기를 추적하게 됩니다. 그 때 의뢰자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도 당연히 처벌 받습니다.
살인자와 그 살인을 청부한 사람 모두가 처벌을 받습니다. 그 모두를 피하고 싶다면 이 살인사건을 사건이 아니라 사고로 바꾸면 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고도의 설계도가 작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청부살인자가 어디서 어떻게 일을 벌일지 미리 알아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야 그에 따른 설계가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상호 교통이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점에서 아무리 궁리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소위 ‘청소부’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그 실제 인물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건이 생각과 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니 그냥 짐작해보는 것입니다. 본인도 의아해 합니다.
자신이 설계하여 진행된 사고(?)입니다. 그런데 함께 일하던 동료가 살해(?)당합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구나 싶습니다. 그가 남긴 말이 실마리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의심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더구나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잃습니다. 나아가 자신도 위기에 봉착합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자신의 설계대로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감합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따져봅니다. 문제는 자신의 동료들이 차례로 희생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가까운 사람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주고받은 말을 되짚어봅니다. 자칫 모두가 들통 나고 엉망진창 되기 십상입니다. 아니 그보다 희생이 커질 수 있습니다.
경찰까지 조사를 하게 됩니다. 보안요원. 하기는 요즘 보안업체도 하나의 기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직원으로 일하는 것이 의심 살 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하는 눈빛은 좀 남다릅니다. 무엇인가 자꾸 조여 오는 기분입니다. 동료들까지 희생당하고 있는 마당에 더 미루기도 어려워집니다. 과연 청소부가 따로 있는가? 확신을 할 수 없다 해도 발생한 일을 추론하건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지경입니다. 나 말고 또 다른 누군가 자기 일에 껴들어 이중으로 방어 장치를 하고 있는 것일까? 노련한 자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철저히 가려야 하니까요. 그래서 결심합니다. 자수하자.
문제는 그것입니다. 내가 자수한다고 곧장 범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사가 말해줍니다. 사고가 사건이 되려면 그에 합당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태 사건 은폐를 위해 설계한 사람이 증거를 남겨두었겠습니까? 참으로 희한한 일이지요. 자수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유명해보고자 하는 건달들이 꽤 있다고 주의까지 줍니다. 형사가 말해줍니다. 그런 일까지 도맡아 할 시간이 없답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데, 사소한 것까지 뒤지고 다닐 여유가 없습니다. 진실과 거짓이 혼합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싶기도 합니다. 영화 ‘설계자’(The Plot)를 보았습니다. 다소 어렵네요.
성경 재밌게 읽는 법
한 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능력을 얻기 원합니까, 지식을 얻기 원합니까? 한번 생각해봅니다. 공자가 능력이 있습니까, 무당이 능력이 있습니까? 능력은 공자보다 무당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자의 제자가 되렵니까, 무당의 제자가 되겠습니까? 공자는 가르치는 재주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대체로 무당의 제자가 되기보다는 공자의 제자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능력은 무당이 공자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무당보다는 공자를 더 존경합니다. 왜 그럴까요? 능력은 없어도 우리의 정신을 명철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은 무당이 아니라 공자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당이 아니라 공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능력을 발휘하기 원하십니까, 지식을 갖기 원하십니까? 물론 둘 다 가지면 좋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능력은 하나의 방법이고 수단일 뿐 그것이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기적을 경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기적을 경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여러 가지 기적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기적을 눈으로 직접 봅니다. 바다가 갈라져서 양쪽에 벽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건너가지요. 출 14 : 21 - 22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다 건너가서는 따라오던 애굽 병사들이 그 바다가 다시 합하여 모두 바다에 빠져 죽는 장면을 봅니다. 얼마나 놀라운 경험입니까? 그런데 얼마 후 광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 것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기적을 아무리 경험한다 해도 당장 눈앞의 어려움은 모든 경험을 잊어버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오셔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습니까? 기적은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가 돌아온다 한들 믿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자살합니까, 안 합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자살합니다. 왜요? 물론 그들도 평소에는 자살하면 안 된다는 정도는 알 것입니다. 그런데 자살합니다. 왜 그럴까요? 마음과 정신에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몸에 병이 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과 정신에 병들면 죽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똑같은 경우 아닙니까? 그런데 육신이 병들어 죽으면 괜찮고 정신이 병들어 죽으면 안 된다는 이론이 성립됩니까? 그렇다고 자살하라는 말입니까? 무슨 말인지 똑바로 이해해야 되겠지요? 전철이 정말 기름(길음)으로 가는지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게 무슨 기름인지 모르면 엉뚱한 소리 합니다. 우리 목사는 자살해도 괜찮다고 하더라, 말이 되는 이야깁니까? 잘 듣고 이해하기 바랍니다. 왜 자살한다고요? 마음과 정신에 병이 들었기 때문에 자살하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자살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우리 다 아는 이야기 하겠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창조하실 때 죽도록 만드셨을까요? 아버지는 영원하시고 그 자식들은 죽으라고 만드실 리가 없습니다. 함께 영원히 살자고 만드셨겠지요. 죽는 건 아버지의 뜻도 원하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죽게 되었지요. 왜 죽게 되었습니까? 잘 압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졌기 때문입니다. 롬 6 :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래서 죽게 된 것이지 아버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죽으라고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죄를 진 후에 ‘네 탓이니 알아서 잘살다가 뒈져라,’ 그러십니까? 아무리 죽을 죄를 졌다 할지라도 내 자식인데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요.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주려는 것이 아비의 마음입니다. 바로 그 살 길을 마련하여 가르쳐준 것이 기록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 뭘까요? 성경입니다. 가장 오래된 책이고 가장 많은 사람이 기록하였고 가장 오랜 역사가 기록되었고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고 가장 많은 사람이 읽었고 가장 많이 팔렸고 또 팔리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이런 책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안에는 놀라운 지혜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귀하고 놀라운 지혜입니다. 딤후 3 :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무슨 지혜가 있게 한답니까? 구원에 이르는 지혜입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가리켜 영혼의 양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육체가 살려면 땅의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살려면 하늘의 양식을 먹어야 하겠지요. 알기는 잘 압니다. 그런데 아는 대로 행합니까? 안 합니다. 왜 안하지요?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쓴 사랑의 편지라고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나요? 말은 잘해. 그런데 하는 꼬라지 보면 정말 사랑하는 거 맞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연애해보셨나요? 통신수단이 오늘과 같이 발달하지 않은 때는 주로 사용한 통신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편지입니다. 물론 오늘날도 사용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종이에 쓰는 것이 아니라 주로 전자메일을 사용합니다. 아무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편지가 옵니다. 그러면 한 번 읽고 버려요? 연애 해본 사람만 압니다. 편지를 받으면 꼬깃꼬깃 숨겨두고 시간 날 때마다 꺼내서 읽어봅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책도 두 번 이상 잘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연애편지는 두 번 읽고 버려요? 읽고 또 읽고 닳아빠지도록 읽습니다. 왜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전해오니까. 읽을 때마다 마음이 설렙니다. 마치 옆에 있는 듯 느껴지지요. 단순한 글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읽고 또 읽고 열 번 스무 번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만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이 무슨 지혜가 담겨있다고요? 구원에 이르는 지혜입니다. 천국 주소가 적혀 있답니다. 그리고 그 가는 길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자연히 천국 백성 되는 방법도 있겠지요. 문제는 그대로 따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 기독교인들 좋아합니까? 죽일 놈 소리 안 들으면 천만다행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눅 2 : 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그런데 우리는? 사랑은 고사하고 더 미워지더라, 아닙니까? 왜 이렇게 되었는지 좀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다 가르쳐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따라하지 않는다는 거죠. 오죽하면 세상 사람들이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싫어도 성경은 좋답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변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할 줄 믿습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려고 신앙생활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욕먹고 사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문제는 뭡니까? 성경을 읽고는 싶은데 재미없다, 지루하다 그겁니다. 좋은 말씀 같은데 읽으면 졸려. 수면제 저리가라야. 누차 이야기하지만 창세기는 잘 넘어가도 출애굽하기 힘들고 간신히 출애굽해도 레위기 들어가면 그만 녹초가 됩니다. 시편기자의 고백을 한 번 들어봅니다. 시 19 : 9 -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꿀보다 더 달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까? 그게 희망사항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글쎄, 꿀만큼 달아서 단잠을 자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 입에 어찌 그리 졸린지요 약국에서 파는 수면제보다 더 졸리나이다.’ 그렇습니까? 어느 쪽이 정상인가요? 꿀맛입니까, 졸린 맛입니까? 시 119 : 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우리 모두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지요? ‘아버지’ 맞습니까? 그런데 2천 년 전에 예수님도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우리는 형제네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맏형입니다. 롬 8 : 29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누구를 맏아들 되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까? 예수님입니다. 히 1 : 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말씀하시며” 이 맏아들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맏아들 곧 우리의 맏형이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가장 잘 닮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과 지식과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맏형이신 예수님은 그러한데 우리는 왜 그렇지 못한가요? 당연히 우리도 그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책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뀝니까? 안 바뀝니다. 왜요? 이 최고의 책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영향을 주지 못합니까? 책이 잘못되었습니까, 우리가 잘못되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라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고 명철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닮은 자들이고 더구나 세상에서 최고의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는가? 이유는 하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부르고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20억이 넘습니다.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안다면 세상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8백 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혜롭고 명철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누가 감히 지혜롭다 하겠는가, 자신이 없습니다. 왜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읽고 있는데 지혜롭게 되지 않는가? 모르고 읽기 때문입니다. 물론 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도대로 읽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듭니다. 성경에도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세상 누구나 좋아하는 단어 ‘복’을 생각해봅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복이 몇 가지 있습니까? 우리 옛말에 ‘5복’이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몇 가지 복이 있습니까? 마 5장에 나오는 ‘8복’입니까? 그럼에도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합니다. 몇 가지 복이요? ‘만복’입니다. 기도하면서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복과 하나님 주시고자 하는 복이 같다 다르다? 다르다. 하나님이 복되다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시 1 : 1 - 2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도 복되는 내용이 있다 없다? 없다. 아무튼 하나님께 복을 받고는 싶은데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일단 이 말씀을 따라 해보자 하는 마음을 가져보기 바랍니다. 복 받는 자가 되려니까? 율법 곧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한답니다. 하루 30분 읽기도 힘든데 어떻게 주야로 묵상할 수 있을까, 그것부터 문제지요. 게다가 어떻게 읽으랍니까? 즐겁게. 하이고, 졸지나 않으면 천만다행일 텐데 어떻게 즐겁게 읽는답니까? 갈수록 태산입니다. 복 받기 쉬워요?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도 복은 받아야 하겠지요? 그러니 어떻게든 참고 버텨야 합니다. 일단 단어는 같아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의미와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가 같다 다르다?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읽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북한이 사용하는 의미가 다른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지켜야 합니다.
1) 단어의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방금 예를 든 것과 같이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 55 : 8 - 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2) 성경은 하나하나 떼서 보기도 하지만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단 전체의 구성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완성되는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창세기는 모세가 기록하였습니다. 모세는 주전 1500년 사람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기록하였습니다. 주후 100년의 일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기록된 기한이 1,600년입니다. 그리고 그 속의 내용은 아담 때부터 계시록 때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자그만치 6천 년의 이야기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 옛날 옛적 이야기가 앞으로 일어날 사건 속에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니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주 가깝게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눅 17 :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는 예수님 오시기 약 2,4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 재림 때도 그와 같은 사건이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노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하겠다, 몰라도 된다? 그리고 과연 똑같은 사건일까요, 아닐까요?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3) 성경은 어떻게 기록되었다고요? 딤후 3 :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감동으로’ 곧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록되었으니 역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읽어야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직업이 어부였습니다. 당시 무식한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구의 힘으로? 성령의 힘으로. 그래서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요 14 :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분명히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깨우쳐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누구에게 오실까요? 행 10 : 44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아멘! 하나님 말씀 듣는 자에게 오십니다. 그러니 잘 들읍시다. 자꾸 들읍시다.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지요. 즉 읽고 듣고 자꾸 말씀을 가까이 하면 그 말씀을 닮아갈 줄 믿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일까요? 자녀인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세상의 빛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길은 하나입니다. 요 1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바로 하나님이신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을 자꾸 듣고 읽고 묵상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알고 따라가야지 모르고 따라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모르고 읽는 것과 알고 읽는 것은 다릅니다. 모르고 읽으면 수면제가 되고 알고 읽으면 말 그대로 구약과 신약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약을 주셨습니다. 먹고 안 먹고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제 문제는 읽기는 읽는데 재미가 없으니 금방 지친다는 것이지요. 참고 읽어도 출애굽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알아야 합니다. 기본적인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기 원하실까요? 반대로 질문해봅니다. 우리가 교회에 가는 것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가는 겁니까? 땅 이야기입니까, 하늘 이야기입니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자식들에게 무조건 하늘로 오라 하시겠습니까? 우리 세상 살며 이사를 가는데 가서 살 집이 어떠한지도 모르고 그냥 사가지고 들어가 삽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사전에 집이 어떠한지 들어가 살 만한지, 구조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그냥 와서 살자, 그러실까요? 그곳 하늘이 얼마나 좋은지 최소한의 설명이라도 해주지 않으셨겠습니까? 어디에요? 그야 성경이지요. 그런데 알 필요 없이 그냥 가면 됩니까?
좀 상식을 가지고 신앙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하늘 이야기를 담아두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이루실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해두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하늘을 본 적이 없기에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이 바로 하늘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갔더니 하늘 이야기해요, 땅 이야기해요? 잘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대부분 땅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면 안 된다 등등. 그런 이야기는 세상에 깔려 있습니다. 정작 알고 싶은 것은 하늘이고 우리 앞에 이루어질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고 세상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게 하나님 뜻입니까, 자기 뜻입니까? 좀 엉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 하늘 이야기가 하늘 언어 곧 천국어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국어를 먼저 배워야 합니다. 성경이 왜 어렵습니까? 하늘 이야기를 땅의 이야기로 하고 있으니 소위 코드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겁니다.
예를 들어 마 24장에서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말씀하십니다. 해달별이 어두워지고 떨어진답니다.(29절) 그랬더니 천지개벽이 일어날 거라고 야단입니다. 웃기지요. 천국어를 모르니 해프닝이 일어납니다. 성경이 재미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어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성경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이야기해주신 하늘나라가 보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신앙합니다. 아버지 뜻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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