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1~2)
히브리서 11장 1~3절은 '믿음이란 무엇인가?'인지 믿음의 정의에 대한서론적
설명이다.
'믿음은 ~이다'라는 표현에서 '~이다'에 해당하는 동사 '에스틴'(estin; is)은 직설법 현재
시제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시제는 항구적으로 항상 그러함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다'라는
사실이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임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11장에서 핵심어인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티스'(pistis; faith)는 고전
희랍어에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 혹은 신에 대하여 갖는 '신뢰' 또는 '진실성'이나
사업상의 '신용', '보증', '증명'등을 의미하여 다양하게 쓰였다.
원래 이 어군의 단어들은 '계약이나 약정을 존중하는 행동'을 나타냈지만, 헬레니즘
시대의 회의론과 무신론이 난무하는 시기에는 '피스티스'가 신들의 존재와 행위에
대한 '신념'(conviction)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라고 번역된 '엘피조메논 휘포스타시스'(elpizomenon
hypostasis)에서 우리는 '보증'으로 번역된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substance;
realization; assurance; guarantee)에 주목해야 한다.
이 단어는 '밑에 놓다', '기초를 두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휘피스테미'(hyphistemi)
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문자적으로는 '아래에(hypo; 휘포) 서 있는 것(stasis;
스타시스)', 즉 '토대','기초'라는 의미이다.
이런 뜻 외에도 '본질', '실체', '확신', '확고성', '보증'등의 다양한 의미가 있다.
이제 교회의 전통 안에서 이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① 일부 파피루스에서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는 '보증'이라는 의미에서 소유권을
입증하는 문맥에 쓰였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권리 증서이다', 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고 있는 천상의 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확실하게 보증해 주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즉 믿음이라는 보증물을 내보일 때 천상의 것들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확실하게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② 초대 교회 몇몇 교부들은 이 단어를 '현실화'(realization)의 개념으로 보았다.
믿음이 장래의 바라는 것들을 현실적으로 발생하게 해준다고 본 것이다.
③ '실체', '실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믿음이란 아직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바라는
것들을 실질적으로 확실한 것으로 붙잡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④ 초대 교회 교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중세 스콜라 신학의 대부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하는 견해로서 '토대', '기초'(foundation)라고 보는 견해이다.
말하자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바라는 것들')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하면, '믿음이란 희망을 지탱해 주는 토대로서 희망하는 것이
허상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을 보증해 주는 실체'라는 의미가 된다.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라고 번역된 '프라그마톤 엘렝코스 우 블레포메논'
(pragmaton ellengchos u bllepomenon)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일들의 증거'라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에 해당하는 '우 블레포메논'에서 '블레포메논'(bllepomenon)은
'보다'(see)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블레포'(bllepo)의 수동태 분사이다.
따라서 '우 블레포메논'은 인간의 눈에는 가리워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또한 '실체들의'로 번역된 '프라그마톤'(pragmaton)의 원형
'프라그마'(pragma)는 고전 희랍어에서는 '행위', '사물', '사업', '논쟁'등의 의미로
쓰였으며,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일'(사도5,4), '사실', '일'(루카1,1) 등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실체들'이란 '보이지 않는 사실들'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일들이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 등은 믿음이라는 장치를 가져야만 신뢰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확증'에 해당하는 '엘렝코스'(ellengchos)는 '밝히 드러내다',
'폭로하다', '납득시키다' 등을 뜻하는 동사 '엘렝코'(ellengch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고전 희랍어에서는 '증거', '확인'등의 의미를 지닌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겉으로 밝히 드러내주는 것, 확실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실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누가 못 믿는가?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을
누가 못 믿는가? 그리고 관찰, 실험, 검증에 의해 과학적으로 이미 사실(fact)로 밝혀진
것들을 누가 못 믿는가?
그러기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믿음의 어두운 차원을 뛰어넘어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마치 태양이 어두운 먹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두운 먹구름 넘어
태양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차원인 것이다.
'사실 옛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2)
여기서 '옛 사람들'로 번역된 '호이 프레스뷔테로이'(hoi presbyteroi)에서
'프레스뷔테로이'의 원형 '프레스뷔테로스'(presbyteros)는 '늙은', '나이 많은'을
의미하는 '프레스뷔스'(presbys)의 비교급으로서 '나이가 더 많은', '노인' 또는 '장로',
'원로' 라는 의미이다(마태26,3; 사도2,19).
고전 희랍어에서는 처음에는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더 늙은'(older)이라는 뜻을
나타냈지만, 후에는 '더 존경받는'이라는 의미가 첨가되었다.
본절에서는 신약에서 흔히 쓰이는 '원로'의 의미가 아니라(1베드5,1), 히브리서
저자와 독자들의 공통된 조상, 즉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구약 시대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살았던 모든 조상들'을 말한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11장 4절 이하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대별 믿음의 영웅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며, 동시에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고 증거하신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인정을 받았습니다'로 번역된 '예마르튀레테산'(emartyrethesan; were
well attested; were commended)은 '마르튀레오'(martyreo)의 과거 수동태이다.
이 '마르튀레오'동사의 뜻은 '증언하다', '어떤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되다', '어떤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어떤 사실을 확증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동태로 쓰인 것은 거명된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증인이 바로 하느님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증거하셔야만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속임을 당할 수도 없고 속일 수도 없는 진리의 근원이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직접 그들의 믿음을 확증해 주셔야만 진정한 신앙인으로 인정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