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민정음
한글을 비슷한 다른 글자로 보이게 응용하거나 비슷한 한자어를 한글로 대체, 또는 단어의 각도를 틀어 유사한 단어로 읽히게 하는 등 모든 한글 비틀기를 '야민정음'이라고 일컫는 추세다. 흑자는 언어 규범의 파괴를 우려하고 흑자는 창조적인 언어유희라고 높이 평가하는 야민정음. 당신은 어떤 평가를 할지 궁금하다.
야민정음'을 아십니까?
아마 40대 이상 중장년층이 들으면 까무러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에게 이런 숙제를 던져주고 맞춰보라고 하면 어떤 대답과 반응이 돌아올까.
다음 한글을 우리말로 풀어보시오.
'방커머 으어뚠어뚠'. 너무 어려운가?
좀 더 쉬운 문제로 '뜨또'는 어떨까.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트렌드에 민감한 10, 20대들 이라면 누워서 떡 먹기 정도로 쉽게 맞출지 모른다.
첫 번째 정답은 '방귀 대장 뿡뿡이'이고,
두 번째는 "비버'다.
이렇게 알려준 정답에도 여전히 무표정으로 “왜"를 남발하는 '어른'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방커머 '에서 커는 귀'자와 닮았다. 은 한자 장(長)자와 비슷하다. '으어뚠어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90도 꺾어 보면 'ㄸ'이 'ㅂ'같고 'ㅜ와 'L'의 결합이 또 'ㅂ'같아 자세히 보면 'ㅃ'처럼 읽힌다. '어는 뉘면 ' '이 다. '뜨또' 역시 뉘면 비버로 쓰인다. 이렇게 한글 단어를 비슷한 다른 글자로 보이게 응용하거나 비슷한 한자어를 한글로 대체하거나 단어의 각도를 틀어 유사한 단어로 읽히게 하는 모든 글자 비틀기를 '야민정음'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대표적인 단어로는 머한민국'(대한민국), '박ㄹ혜'(박근혜) 등이 있다.
야민정음은 인터넷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 국내 야구갤러리의 야구와 훈민정음의 합성어다. 기원은 여러 설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디시인사이드 운영자의 이름 중 '유자의 서명이 ' '으로 휘어져 보인다는 이용자의 댓글이다.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한 출연자가 '앵커리지를 '얭귀리지로 읽었다는 설, 프로야구 히어로즈 야구팀 포수 강귀태 선수의 유니폼에 적힌 이름이 강커태로 보인다는 설 등도 기원설의 강력한 후보들이다.
세종대왕은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아니할세~'(우리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말(음성)이 서로 맞지 않아~) 한글 28자를 만들었는데, 500여 년이 지난 '지금 세대들은 ,표준어가 너무 식상해 변칙과 응용이 필요한 바'의 이유로 한글에 갖은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한때는 '레알', '셀카' 등 외국어를 통째로 갖다 쓰며 '한국어화'하기 바빴고, 이도 식상해지자'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같은 줄임말로 재미 붙이다, 이젠 한글 자체를 '다르게' 보는 창의력에 눈을 뜬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상상의 나래가 필쳐질지 일부는 호기심으로, 다른 일부는 우려의 눈길로 지켜보고 있다.
야민정음을 대충 이해했다면 인터넷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다음 단어들도 찬찬히 이해가 갈 듯하다. 강아지에게 '덍덍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멍멍이'란 뜻이고'대전은 머전'으 로, '판판띵물'은 관광명물'로 읽을 수, 아니 읽어야 한다. 분절로 해석되지 않을 땐 방향틀기 방법을 써 먹을 수 있다. '름곡름곡'(눈물눈물)이 대표적.
야민정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각종 응용문제가 난립하고, 마치 시험 문제 푸는 수준으로 난도가 올라가자 급기야 이를 해석 해주는 '친절한 번역씨'도 나왔다. 구글 번역기는 지난해 구글 신경망 기계번역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통해 각종 언어를 번역해주는데, 이 중 줄임말과 야민정음도 '훌륭하게' 번역해낸 다. 영어로 번역을 요청하면 'ㅇㅈ?'(인정하니? 의 줄임말)의 경우 'Is it?'으로 번역하는 것은 물 론이고' 세종머왕' 같은 야민정음은 'King Sejon 이라고 알아서 표시해준다. 신경망 스스로 단어 자체에 몰입하지 않고, 문장 자체를 보기 때 문에 적절한 해석이 나온다는 애기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 소설 네트워크서비스(SNS)에 주로 이용되는 야민정음은 세종대왕을 농락한 언어 파괴의 주범일까, 문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창작 활동의 일환일까. 이를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입장도 제각각이다. 찬성론은 일시적 놀이문화의 유행이라고 본다. 한글 자체가 세계적으로 뛰어난 과학적 언어인 점을 들어 언어의 변형과 창조가 즐거움을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야민정음의 적극적 옹호론자인 박진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언어가 지닌 사회적 함의에 주목하며 시대 변화에 따라가는 언어의 변형을 발랄한 놀이문자로 규정했다. 박교수는 “야민정음은 일부러 다른 문자를 사용하되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문자를 추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희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특히 언어의 일탈이 사회 문화 현상을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든다는 점에 주목했다. 박 교수는 “창조자가 문화적 산물을 어떤 목적과 의도로 만든다고 해도, 그 산물을 향유하는 이들이 독립적으로 해석하고 비트는 데서 새로움이 싹 트는 것 이라고 강조했다.
비판론자들은 언어의 비틈이 창조의 기반이 아닌 오로지 재미나 유희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내세우며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이도홈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언어가 사상을 규정하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단어로 새로운 세계를 그릴 가능성이 작지 않다"며 “하지만 단순 언어유회를 위해 쓰이는 언어는 사회적 약속을 깨는 것 이라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때로는 의식적으로 인식을 전환하라
한때 TV 광고에서 '침대는 과학'이라는 카피가 인기를 끌었는데, 어느 순간 이 문구가 사라 졌다. 초등학생들이 진짜 침대는 과학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떤 단어를 제대로 인지하고, 그 '인식'을 기초로 응용하는 재미는 창작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지만, 처음부터 재미로 응용된 사실 자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건 혼란을 초래하기 일쑤다. 실제 많은 학생이 기가 막 힌다는 뜻의 표현을 '어의없다'로 알고 있거나 병에서 회복하다는 의미의 '낫다'를 '놯다'로 알고 있는 등 엉터리 한글 표기들이 난무하는 현실이다.
아직 대통령을 실제 머통령으로 쓰거나 인식 할 정도의 혼란은 나타나지 않았다. 많은 학자나 전문가가 야민정음을 대체로 놀이문화나 유회로 보는 것도 무지의 소산이라기보다 단어를 이리저리 굴려보고 응용하는 상상력에 더 높 은 기대치를 투영하기 때문이다.
야민정음은 어른에겐 어렵고, 아이에겐 쉽다. 그래서 역설적인 제안이지만, 야민정음은 어찌면 기억력이 퇴화하는 어른들에게 가장 좋은 건강 도구로 쓰일 수 있다. 치매에 대한 해결책으로 현대 의학이 내미는 가장 좋은 치료법은 걷는 것이다. 특히 걸으면서 숫자를 계산하거나 단어를 연결할 때 가장 좋은 효과를 본다고 한 다. 어른들이여, 기억이 흔들리는가. 걸으면서 야민정음법 계산으로 단어를 응용해보자.
출처: <저작권문화> 12월호 글: 김고금평 머니투데이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