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사
고려시대부터 흥복사(興福寺)라고 불리던 절 자리에 1464년(세조 10) 5월 세조가 원각사의 창건을 결정하고, 1467년 사월초파일에 10층석탑의 완공과 함께 낙성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효령대군(孝寧大君)이 1464년 4월 회암사(檜巖寺) 동쪽 언덕에 석가모니의 사리(舍利)를 안치하고 원각법회(圓覺法會)를 열자, 그날 저녁에 여래가 공중에 나타나고 사리가 분신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 이를 세조에게 알려 이로써 절의 조성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이 절의 공사중에 일어난 사건이나 상서로운 일들, 그에 따른 왕의 사면령(赦免令), 대종(大鐘)의 주조와 백옥불상의 제작에 관한 기록 등이 있다. 창건 당시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선당(禪堂)·운집당(雲集堂)·해장전(海藏殿)·해탈문(解脫門)·반야문(般若門)·적광문(寂光門)을 세웠으며, 종각(鐘閣)·법뢰각(法雷閣)·향적료(香寂寮)·10층석탑 등이 있었다. 10층석탑에는 분신사리와 언해본 〈원각경 圓覺經〉을 봉안했다고 하며, 이 절에는 그 뒤에도 사리가 분신하거나 서기(瑞氣)를 발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이때마다 왕들의 기도행차와 반승(飯僧)의식, 백재(百齋) 등이 열렸다. 이와 같이 원각사는 국가의 안녕과 국왕의 평강(平康)을 비는 국왕의 원찰·국찰(國刹)로서의 기능을 했다. 1488년(성종 19)에 화재로 소실되자 성종이 중수하도록 명했지만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방(妓房)으로 만들고, 1512년(중종 7)에 원각사를 헐어 재목을 나누어줌으로써 절이 없어지게 되었다. 현재 절터인 탑골공원에는 원각사지10층석탑(1465, 국보 제2호)과 원각사 창건의 내력을 적은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남아 있다.
원각사 대원각사비
대원각사비
보물 제3호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원각사지 10층석탑
국보 제2호
탑골공원 안에 있는 조선 전기의 10층석탑. 국보 제2호. 높이 12m. 전체를 대리석으로 건조했으며 4면두출성형(四面斗出星形:또는 亞자형)의 평면으로 된 3층의 기단, 목조건축물의 형태를 모방한 10층의 탑신, 탑 표면의 장엄한 조각장식 등이 그 유례가 드문 특수한 탑이다. 1348년 개성근교에 건립된 경천사10층석탑을 본떠 1465년(세조 11) 원각사 창건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원각사의 창건 동기를 살펴보면 원각사 창건의 의도가 사리봉안에 있음이 강조되고 있어 당시 탑의 건립이 특히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탑의 상륜부는 없어졌으며 상층 기단부 3층과 탑신 3층까지 4면돌출형의 평면으로 이루어졌고, 4층 탑신부터 정사각형 평면으로 바뀌었다. 기단부의 면석(面石)에는 모서리에 상다리 모양의 장식적인 원기둥을 세우고 1층 면석에는 용·사자·꽃 등을 부조했으며, 2·3층에는 인물조상·건축물·짐승·초목 등을 표현했는데 변상도(變相圖)를 나타낸 듯하다. 기단 갑석(甲石)의 위아래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갑석 측면의 돌출부에는 당초무늬를 새겼다. 상층기단의 갑석 위부터 탑신부의 각 층에는 난간을 돌렸으며, 탑신부에는 다포계(多包系) 목조건축의 지붕을 그대로 본떠 장식했다. 1·2·3층은 팔작지붕으로 표현했는데 특히 3층은 겹처마로 하여 4층 이상의 단조로운 지붕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탑신부 각 면의 모서리에는 용을 부조한 원형의 석주를 모각하고 부처나 보살상·신장상·천인상 등을 부조했으며, 1~4층의 남면까지 탑신의 돌출된 면에는 13불회(十三佛會)의 조상을 부조하고 명칭까지 새겨놓아 불교신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전체적으로 화려한 의장이 돋보이는 이 탑은 표면의 부조들이 경천사10층석탑에 비해 평면적이지만 조선 초기의 조각양식 연구에 중요하다
원각사지 십층석탑
원각사지 십층석탑
원각사지 십층석탑
원각사지 십층석탑
원각사지 십층석탑
대각사 범종각
대각사 현판
대각사 대각성전
대각사(大覺寺)에 있는 대각성전(大覺聖殿), 범종각, 일주문 등의 전각은 모두 1986년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다. 대각성전은 각 층마다 난간을 두른 현대식 구조의 3층 건물인데 지붕은 팔작으로 되었다. 1층은 선방 · 종무소 · 재단법인 대각사 사무실로, 2층은 요사로 쓰이며 법당은 3층에 있다. 법당 안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는데, 역시 모두 근래의 작품이다.
대각사(大覺寺)는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 2번지 비원앞 방향에 위치하고 있는 재단법인 대각회(大覺會)의 사찰로서, 1911년 용성(龍城) 진종(震鍾) 대종사가 창건하였다. 대각회는 불교포교단체의 하나로 석가모니불의 대각불교사상을 선포하여 민족번영의 원리로 발전시킨 용성 스님의 대각사상을 선도하며 이에 필요한 시설을 유지 경영함을 목적으로 1968년 자운(慈雲) 스님 등에 의하여 기존의 대각사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창건 이후 용성 스님의 대각교는 이곳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해나가 1928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대각일요학교가 설립되었고, 이듬해에는 선회(禪會)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또 1930년에는 대각성전(大覺聖殿)과 요사가 새로이 지어지기도 했다. 그 뒤 1939년 조선불교 선종 총림 1944년에는 다시 경성포교당 대각선원 등으로 절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 무렵 대각교가 대각사를 중심으로 민족자주성을 일깨운다고 판단한 일제는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하여 대각교는 억지로 그 재산을 신탁하게 되는 등 수난을 겪다가 결국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다. 하지만 폐지 이후에도 대각사와 만주 간도(間島)포교당을 중심으로 대각교운동은 꾸준히 전개되었다.
1969년 동헌(東軒) 완규(完圭) 대선사를 비롯한 용성 스님의 제자들이 스님의 대각교 창립정신을 기리고 대각사상을 널리 드러내기 위하여 재단법인 대각회를 대각사에 설립하였으며, 1986년 대각사 경내에 있던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지하1층 지상3층 총건평 400평의 신축건물을 짓는 등 면모를 일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각사 사적비
대각사 심검실
대각사 석등
대각사 법당
대각사 법당내 금고
대각사 법당내 신중탱
대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