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조옥엽
남편이 거실에서 자고 있다
오늘은 어느 바다를 헤엄치다가
귀향했는지 탈탈거리는 엔진소리가
한밤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몸 누일 둥지를 틀고
식구를 먹여 살린다는 건
거친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
어둠을 뚫고 용케
어리바리한 물고기 몇 마리
건져 올려 하루를 접고 짠물에
절은 삭신 막걸리 몇 잔으로
달래 바닥에 눕히고 잠든 남편
잠결에도 압박감에 짓눌려
바다와 교신 중인지 간간이
미간을 찌푸린다
하루 치의 엔진오일을
보충하고 소진하는 과정으로
수수 년 이어져 온 생
숱한 고비들을 넘기고 다시
이어지는 날들이 기적 같은데
충전을 다 마쳤는가
뱃고동 소리 내뿜던 거실은 고요해지고
나는 주유기를 빼 제자리에
돌려놓고 정적이 주는 평화를
양손에 꼭 쥐고 돌아눕는다
----조옥엽 시집 {거실에 사는 고래}에서
고래의 종류에는 흑등고래, 향유고래, 흰돌고래, 범고래, 돌고래, 큰돌고래, 밍크고래, 긴수염고래 등의 수많은 종류가 있고, 수염고래류와 이빨고래류로 분류할 수가 있다. 고래는 물속에서 살아가지만 육상의 포유동물과도 똑같고, 폐로 호흡을 하며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운다. 고래는 2-3m 안팎의 작은 종들도 있지만, 25m이상의 대형 종들도 있고, 따라서 고래는 바다의 제왕으로서 무한한 관심과 찬양의 대상이 된다. 고귀하고 위대한 것은 큰 것이고, 크고 힘 센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경건하고 숭고한 것이고, 가장 이상적인 것이고, 그 어떤 결점도 없는 것을 말한다.
사자의 꿈, 호랑이의 꿈, 용왕의 꿈, 코끼리의 꿈 등이 있지만,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꿈 중의 꿈’은 고래의 꿈이고, 이 고래의 꿈은 그 뿜어 올리는 분수와 함께 천하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산다는 것은 고래의 꿈을 꾼다는 것이고, 고래의 꿈을 꾼다는 것은 그 어떤 시련과 고통과도 싸워 이기겠다는 것이다. 슬픔보다도 더 슬프고, 고통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꿈이 없다는 것이고, 꿈이 없다는 것은 그 어떤 고래도 그 커다란 몸통을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남편은 거실에서 자고 있고, “오늘은 어느 바다를 헤엄치다가/ 귀향했는지 탈탈거리는 엔진소리가/ 한밤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조옥엽 시인의 ‘고래’는 바다와의 싸움에서 지친 고래이며, 겨우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거친 바다에 몸을 던지”고, “어둠을 뚫고 용케/ 어리바리한 물고기 몇 마리”를 건져 올린 어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나, 늙고 지친 어부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거친 바다로 먹이사냥을 나선다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떨리며 무서운 일이란 말인가? 몸 누일 둥지를 틀고 식구들을 먹여 살린다는 것, 거칠고 사나운 바다에 몸을 던지며 어리바리한 물고기 몇 마리를 잡아 올린다는 것, 피곤하고 지친 육체로 하루의 일상을 접고 짠물에 절은 삭신을 막걸리 몇 잔으로 달랜다는 것도 생사를 넘어선 싸움이고, 술에 취해 잠을 자면서도 일상생활의 압박감에 짓눌려 바다와 교신하며 미간을 찌푸린다는 것, “하루 치의 엔진오일을/ 보충하고 소진하는 과정으로/ 수수 년 이어져 온 생/ 숱한 고비들을 넘기고 다시/ 이어지는 날들이 기적 같”다는 것도 생사를 넘어선 싸움의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도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듯이, 모든 위대함의 크기는 그 주체자의 고통과 희생의 크기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의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건다는 것은 하루치의 엔진오일을 보충하고 소비하는 것과도 같고, 숱한 고비들을 다 극복하고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모든 기적을 연출해냈다는 것과도 같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꿈은 어떤 꿈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굳세고 용기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고래의 꿈이고, 이 고래의 꿈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거는 사람이다.
희극이나 비극이나 그 작품의 구성원리상, 필요 이상의 미화나 과장은 필수적인 요소일 수도 있다. 희극의 주인공은 실제보다 더 바보스럽거나 우스꽝스럽게 표현할 수도 있고, 비극의 주인공은 실제보다 더 고귀하고 뛰어난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노릴 수도 있다. 조옥엽 시인의 [고래]는 비극의 주인공이고, 그는 일상생활에서 피곤하고 지친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그러나 생사를 넘어선 혈투에서 수많은 기적을 연출해낸 개선장군과도 같다고 할 수가 있다. 남편이 조업을 마치고 돌아와 술 몇 잔 마시고 쓰러진 모습에서 “오늘은 어느 바다를 헤엄치다가/ 귀향했는지 탈탈거리는 엔진소리가/ 한밤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는 시구도 탁월하고, “식구를 먹여 살린다는 건/ 거친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 어둠을 뚫고 용케/ 어리바리한 물고기 몇 마리/ 건져 올려 하루를 접고 짠물에/ 절은 삭신 막걸리 몇 잔으로/ 달래 바닥에 눕히고 잠든 남편”의 모습도 탁월하다. “잠결에도 압박감에 짓눌려/ 바다와 교신 중인지 간간이/ 미간을 찌푸린다”라는 직업의식도 탁월하고, “하루 치의 엔진오일을/ 보충하고 소진하는 과정으로/ 수수 년 이어져 온 생/숱한 고비들을 넘기고 다시/ 이어지는 날들”의 “기적”도 탁월하고, “나는 주유기를 빼 제자리에/ 돌려놓고 정적이 주는 평화를/ 양손에 꼭 쥐고 돌아눕는다”라는 아내의 소명의식도 탁월하다.
시는 기교가 아니고, 기교는 시를 질식시킨다. 자기 자신의 꿈, 즉, 고래의 꿈을 위하여 그 직업의식에 투철하고 그 어떤 위험과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 삶의 태도와 시인 정신이 기교를 낳고 그 아름다운 삶의 극치를 이룬다. 앞으로도, 뒤로도 물러 설 수가 없고, 한 걸음만 삐끗하고 균형을 잃으면 그의 삶이 끝나는 줄타기의 인생과도 같다.
시와 예술은 거짓이나 꾸밈이 없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기본에 충실하고, 그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은 ‘고래의 꿈’을 꾸게 된다. 새우가 고래보다 클 수도 있고, 고래가 새우보다 작을 수도 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키가 작고 평범할 수도 있지만, 키고 크고 고귀하고 위대한 탈을 쓴 사람이 더없이 어리석고 하찮은 인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조옥엽 시인의 [고래]는 비극의 삼일치에 기초해 있고, 그것은 시간의 일치와 장소의 일치와 연기의 일치라고 할 수가 있다. 시간은 밤이고, 장소는 시인의 거실이고, 연기의 주체는 선장이고, 그 이야기의 진행자는 시인이다. 너무나도 정직하고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삶의 태도와 시인 정신이 고귀하고 위대한 고래의 꿈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조옥엽 시인의 [고래]는 ‘시인 정신의 승리’가 ‘리얼리즘의 승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옥엽 시집 거실에 사는 고래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