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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22: 6-11
6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이렇게 말을 하는 자가 벌레냐, 사람이냐? 사람이다. 사람인데 이게 누구의 시인가 하니 다윗의 시다. 다윗이 하는 말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다윗이 무슨 죄를 짓고 버림을 받아서 이런 상태가 된 것인지, 아니면 백성들로부터 환난 핍박을 받고 버림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에서 나온 자기의 처지를 말하는 것인지? 간단하게 말하면 백성들이 다윗을 알아주지 않고 백성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마음에서 이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느낌에서 이 말을 하는 건지?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말귀를 잘 알아들어야 한다. 특히 성경을 볼 때 더 그렇다. 똑같은 말인데도 ‘누구의 중심에서 그 말을 하느냐?’ 하는 게 있는 거다. 사람중심, 육 중심에서 그 말을 하는 건지, 신앙으로 나오는 중심에서 그 말을 하는 건지? 이건 뜻이 전혀 달라지는 거다.
사람들끼리 대화를 할 때도 이걸 알지 못하면 ‘상대방이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하느냐?’ 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싸움이 나오게 된다. ‘나는 그런 뜻으로 말을 한 게 아닌데 네가 왜 그러느냐?’ 하면서 서로 싸우게 된다. 사람들 간에 주로 이런 데서 싸움이 많이 일어난다.
세상이라는 세상은 선악과를 따먹은 세상이다. 타락된 세계는 선악과 따먹고 나온 선과 악이 공존하지만 기독교 세계에서도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니 기독교 세계 안에 성령의 역사가 들어있고, 악령의 역사가 들어있다. 성경에 보면 이런 게 많이 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기 때문에 “저 사람이 ‘하나님’ 하는 걸 보니 하나님을 믿는가보다” 하고 생각이 들지만 ‘누구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하느님을 부르느냐?’ 하는 것에 따라 ‘신앙이다. 아니다’ 하는 게 나누어진다.
성령님도 ‘예수 잘 믿어라’ 하고, 악령도 ‘예수 잘 믿어라’ 한다. 그런데 ‘잘 믿어라’ 하는 그 목적이 다르다. 성령님께서 ‘잘 믿어라’ 하는 것은 그 안에 무슨 뜻이 들어 있느냐?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닮아라’ 이게 들어있다. 그런데 악령이 ‘예수 잘 믿어라’ 하는 것은 뭘 말하는 거냐? ‘세상의 썩어질 것을 많이 차지하라’ 하는 거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만든다.
선악과 따먹은 일반세계에서 악의 무리가 커지면 안 믿는 사람들 중에 나름대로 일반적으로 선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게 된다. 예수를 믿는 기독교 신앙세계에서도 세상적 육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단체가 커지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자 하는 의로운 성도들이 핍박을 받게 된다. 세상은 그런 거다.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세상은 이렇게 되어져 버렸다. 진리신앙 길을 걷는 성도들은 이런 세상 가운데 살면서 연단과 훈련을 받는 것으로 되어있다.
예수를 안 믿는 세상은 이걸 전혀 모른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적으로 믿는 사람들도 이런 이치를 모른다. 이런 사람은 진리말씀을 깨달아서 도의 봉우리로 올라갈 마음은 없고 ‘내 멋대로 세상에서 편하게 예수를 믿자’ 이렇게 나간다. 기독교 안에서 이렇게 세상 육적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안 믿는 악한 무리들과 생각을 같이 하게 된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 수준과 같아져 버린다.
세상 육적인 정신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를 잘 믿어서 예수 덕으로 세상에서 뭐든지 많이 가지자. 편해보자’ 라고 하지만 진리본질의 신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족족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간다. 이건 세상적으로 믿는 사람과는 질적으로 천지차이다. 세상 육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을 세상 속화된 기독자라고 하는 건데, 이 자들은 옳게 바르게 하나님의 뜻대로 믿으려고 하는 성도들을 핍박하게 된다. 그것도 안 믿는 이방사람들과 합세를 해서 옳은 성도를 핍박을 한다.
사람에게 조롱과 훼방을 하는 것은 자기들의 뜻과 목적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나타내는 행동들이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조롱과 훼방을 하면 안 된다. 이건 나쁜 마음들이다. 조롱하고 훼방을 하는 것은 악한 자들이 하는 짓이다. 조롱을 하고 훼방을 하는 것은 그 배후에 악한 영들이 들어있다. 하나님 앞에 선하고 의로운 자를 훼방하고 조롱을 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벌이 따르게 된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사람을 깨닫게 해서 낮은 차원에서 올려야 한다. 다른 사람이 진리신앙 정신이 아닌 경우에 물론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그 방편이 다르겠지만 어찌하든 깨닫도록 권고를 하든지, 다음 기회를 보든지,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도록 내버려 두든지, 위해서 기도를 하든지 해야 한다.
7절-8절: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글자 그대로 보면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다. 만일 이들이 이방인들이라면 다윗은 전쟁의 용사이니 그들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같은 동족이기 때문에 다윗이 이런 기도를 하는 거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핍박을 받았느냐, 자기 동족들에게 핍박을 받았느냐? 동족들이다. 동족들이 입을 비쭉이며 십자가 아래를 지나가면서 이런 말을 했다. 다윗에게도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 예수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예수가 죄인처럼 보여지고, 자기들은 참 신앙인으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보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믿지 않는 자들처럼 보여지는 태도가 많다. 한 개인의 행동 면이 그런 경우도 있지만 신앙정신 면으로 보면 육적 세상적인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이 바로 그렇다. 그래서 바리새파 외식자들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서 죽였듯이 지금도 육적으로 예수를 믿는 외식자들이 옳게 바르게 믿는 사람을 조롱을 하고 핍박을 한다.
예수를 믿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영적인 면에서 진리이치, 도덕이치, 생명이치를 무시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성령의 역사나 성령님의 감화 감동성을 훼방하게 된다. 이게 성령 훼방 죄다. 이렇게 되면 그 마음상태가 옳은 교훈을 주면 자기 양심에서는 옳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상당히 듣기가 싫은 거다.
옳기는 옳은데 사람을 의식해서 옳은 것을 저버리고 무리들을 따라가는 것이 성령 훼방 죄다. 자기 신앙양심에서 ‘정말 옳은 말씀이다’ 할 때 그 말씀을 살리면 자기가 사는 건데 자기 양심을 붙잡고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감화 감동을 죽여 버리면 이게 바로 성령 훼방 죄다.
성령 훼방 죄는 영원히 사함 받지 못한다고 했는데 믿는 사람이 성령 훼방 죄를 짓게 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냐? 그런 말이 아니라 옳은 것을 접어두고 옳은 것을 자기 양심에서 죽여 버리면 그 때 그 때마다 그 사람 속에서 깨달음으로 살아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참고 참고 참다가 불속에 집어넣는 것과 같은 사건을 주시는 거다.
진리이치의 교훈을 조롱하고 비꼬고 하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이방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 있는데, 이는 사람을 통해서 귀신이 예수님을 부르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을 불러놓고 하는 말이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한다.
사실 귀신과 예수님은 상관이 없다. 예수님이 귀신을 구원하러 온 거냐? 아니다. 예수님과 귀신은 상관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으니까 귀신이 들려있는 사람과는 관계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성을 짓고 살아야 할 존재라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인격적 애정적 관계성을 짓고 살면서 감사와 찬송이 나와야 하고 말씀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용기가 나와야 하는 건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건 없이 예수님의 마음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을 구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줄 목적으로 하늘나라에서 오신 거냐? 이건 구원과 상관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런 것을 자꾸 구하고 있다. 이런 것은 예수님이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다. 뜻이 멀다. 그러니까 이런 걸 구하는 건 뭐가 들린 기도냐? 귀신들린 기도다. 기도를 한다고 하면 예수님과 관계성이 있는 것을 구해야 한다. 이게 아닌 맨날 먹고 마시는 걸 달라고 한다면 이게 어떻게 마음과 마음끼리 통하는 인격적인 기도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는 자들이 많다. 이건 예수님과 관계가 없다. 네 죄와는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신앙의 성질적으로 볼 때 이런 걸 구하는 게 귀신들린 기도다. 생각을 해봐라.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세상 것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자기 노력 것 해서 세상 것을 많이 가지려고 피땀을 흘린다. 사는 목적이 그렇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은 노력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세상 것을 많이 달라고 하고 있으니 이는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의 마음보다 더 악한 거다. 도둑의 심보다.
진리신앙의 본질을 모르면, 옳은 진리신앙의 이치를 모르면 자기는 자동적으로 주님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주님의 뜻과 상관이 없는 것을 신앙하면서 자기는 바른 신앙을 하고 있다고 하게 된다. 그러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냐? 이건 스스로 속는 거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인도자나 교인들은 자기에게 보혜사 진리가 찾아온 것을 죽이는 셈이 되는 거고, 자기의 영적 기능과 지능 면을 죽이는 셈이 되는 거고, 이건 성령 훼방 죄다.
9절: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이것이 모태신앙을 말하는 거냐? 다윗 자기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알고 믿었다는 말이냐, 아니면 다윗 자기는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모태에서부터 다윗을 택했다는 말이냐?
모태신앙 자랑하지 말아라. 자기가 모태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교만한 거다. 이건 자기가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을 믿고 나왔다는 말과 같다. 그나마도 세상적으로 믿어 나오는 신앙이면서 자기가 모태신앙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말하자면 자기가 모태신앙인 것이 마치 상류 신앙인 것처럼 생각을 한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첫째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지으셨다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이런 정도는 누구든지 안다. 그런데 인간 자기를 지은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 대해서는 아는 자가 별로 없다. 하나님께서 태중에서 왜 자기를 지으셨는지, 무엇 때문에 지으셨는지? 인간 자기를 지으심에 대한 하나님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너무나도 많다. 두 번째는 신앙사상과 정신면에서 볼 때 다윗이 어느 신앙사상에서 출생을 했느냐? 누구의 신앙사상에서 길리움을 받고 나왔느냐? 말하자면 다윗의 그 진리신앙의 모체(모태)가 어디냐?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거다.
기독교 안에서 교인들을 보면 여러 신앙정신들이 있는데, ‘그 신앙정신들이 어디서 생겨져 나왔느냐?’ 하는 그 모체가 있는 거다. 육적으로 생각해서 ‘어머니 태속에서 나왔지. 하나님께서 만드셨지’ 하는 정도는 누구든지 안다. 그런데 ‘그 속에 어떤 뜻을 넣어서 길렀느냐?’ 했을 때 영의 눈을 가지고 다시 보면 다윗의 그 신앙의 모체가 어디냐? 다윗의 신앙이 생산이 되는 어머니 태와 같은 신앙이 생산 된 모체가 어디냐?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교회 안에 가만히 보면 자기의 신앙이 신비주의 신앙이 모체가 된 사람이 있다. 신비주의에서 신앙을 갖게 된 사람, 그 다음에 구복주의가 있다. ‘복 복’ 하는 여기서부터 신앙이 된 사람도 있다. 이게 그 사람의 신앙의 모체다. 사회주의 신앙도 있고, 현세주의 신앙도 있고, 극기 극복주의 신앙 등등 많이 있다. 그러니까 정말 진리의 신앙의 모체에서 나온 자는 그렇게 많지를 않구나.
우리가 일반적인 이치로 생각을 해보면 신체적인 면에서 볼 때 날 때부터 허약한 사람이 있다. 또 날 때는 건강했었는데 자라나오면서 안 먹어서 허약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날 때부터 비대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나올 때는 말랐었는데 자라면서 비대한 사람이 있다. 또 날 때는 허약했지만 자라면서 건강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신체적인 면에서 체질개선을 해야 할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런 것처럼 영의 눈으로 볼 때 신앙정신 사상 면에서 성도 각자가 신비주의니 구복주의니 사회주의니 별별 신앙의 모체가 많았었지만 이제는 질적인 면에서 진리본질로, 진리신앙으로 체질개선을 해야 한다. 예수님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다. 정신세계에서 볼 때 일반정신은 전부 병들어 있고, 병들 가능성도 많고, 미칠 가능성도 많고, 자기 성질이 나면 지랄병 같은 성질도 많다. 이걸 전부 예수님의 정신으로 체질개선을 하자 그 말이다. 이게 성경이요, 이게 예수 믿는 거다.
예수 믿으면서 신앙의 체질개선을 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돼지가 씻었다가 도로 제 자리에 눕듯이 더러운 곳에 가서 눕게 된다. 이런 신앙은 결국 병들어 죽게 된다. 그러니 자기 모체, 즉 자기 모태의 신앙을 알았느냐? 잘못됐으면 바꾸자 그 말이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흐름을 정통적으로 그대로 이어받았다. 참 귀한 신앙이다. 다윗 때에 어느 선지자가 있었느냐? 사무엘 선지자다. 아주 귀하다. 이게 다윗의 신앙의 모체가 되는 거다. 그런데 남의 교회는 말할 것 없고 우리교회 교인들은 자녀들이 부모의 신앙모습과 태도를 보면서 세상의 어떤 바람이 휘몰아칠지라도 변질되지 않는 신앙이 내려가야 한다. 그럴 자신이 있느냐? 이걸 생각을 하면서 자녀를 길러야 한다.
그런데 부모부터가 예수 믿는 것은 덤으로 믿고, 세상 사는 것은 본업으로 하고 산다면 자녀들의 신앙이 바로 들어가겠느냐? 이게 저질적인 신앙이다. 이러면 세상바람이 불면 이리 날아갔다 저리 날아갔다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 자식은 자기는 모태신앙이라고 하면서 건방지게 날뛰게 된다. 이건 천하 못쓴다. 사람이 못됐다.
우리 부모들은 신앙정신 면에서 인격적으로 주님과 같은 심사가 돼야 한다. 그리고 자녀를 생각을 하면서 신앙을 가져야 한다. 본이 돼야 한다. 자기의 모체의 신앙이 잘못됐다면 여기에 와서는 주님의 것으로 고쳐야 한다. 그런데 보면 희한한 정신들을 신앙이란답시고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바꿔야 한다. 안 바꾸면 세월이 흐르면서 네 자녀들을 봐라. 그 자녀들로 통해서 너의 신앙을 보여준다.
후대야 어떻든 내 당대에 먹고 마시고 살면 되는 거냐? 그게 신앙이냐? 부모는 아무리 가정이 어렵더라도, 아무리 굶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정신 면에서는 자녀들에게 본이 돼야 한다. 이게 매우 중요하다. 훗날에 큰 복이 된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자기를 나오게 했다는 것이다. 모태신앙이란 이렇게 알아야 한다. 이건 부모가 예수를 믿으면서 자기를 낳았으니까 모태신앙이라고 하는 그런 게 아니다.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젖 먹을 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말인데, 이걸 글자 그대로 본다면 젖 먹는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겠느냐? 그러니까 이 말씀은 진리본질과 하나님의 생명으로 양육을 받는 자는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는 뜻이다. 진리생명의 젖줄이 아니면 신앙인격이 자라지를 못하는 것이니 세상을 의지하는 신앙은 그 믿음이 빈약해진다. 진리생명의 젖줄이라야 만이 빨리 깨달음을 받고 자기의 신앙이 빨리 자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의 인격은 자라게 되니 그 신앙정신 자체가 주님을 의지하는 성질로 되는 거다. 질이 그렇다.
10절: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누가 성도 다윗을 날 때부터 주께 맡겼느냐? 아버지가 맡겼느냐, 어머니가 맡겼느냐?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다고 하는 것은 첫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형과 대행으로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을 중생시킨 기본구원을 말한다. 이 기본구원, 기본은혜를 받은 자는 주의 것으로 주께 맡긴바 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룰구원 성화구원으로 교육을 받게 된다는 의미에서 주께 맡긴바 되었다고 하는 거다. 진리신앙을 아는 자는 이 사상으로 들어있다. 자기가 진리신앙이라면 ‘내가 기본구원을 받았구나’ 한다면 그 다음에는 이룰구원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이걸 말하는 거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는 내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라는 뜻이 ‘하나님이 다스릴 것이다.’ 그러니까 주 하나님이 맡아서 기르신다는 뜻이다. 예수 믿는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이다.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기본구원을 입혀놨으니까 그 다음에는 주 하나님이 우리를 기르신다. 이를 위해서 간섭을 하기도 하고, 때릴 때는 때리고, 권고할 때는 권고하고, 권면할 때는 권면하고, 야단칠 때는 야단을 치기도 하신다. 주 하나님이 사건 환경을 가지고 너를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이 맡아서 기르신다는 말이다.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다’고 하는 것은 다윗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다.’ 인간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거다.
11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진리성도 다윗이 주 하나님의 통치와 애정권 안에서 살고 싶다는 자신의 심정을 말하는 거다. 기본구원을 얻은 성도는 이제 환난과 핍박과 시련을 통해서 지독한 훈련을 받게 된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나를 도울 자 없나이다.’ 사람이란 인격적인 존재로서 다른 사람과 연관성을 갖는다. 짐승들에게는 이런 게 없다. 그래서 평소에 인격적으로 가깝게 지낸 사람과는 멀리 하지 않을 것이고, 평소에 멀리 하고 살았다거나 대립적으로 살았다면 인격적으로 멀리 지내면서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게 된다. 그런데 다윗의 이 기도를 들어보면 평소에 하나님을 위해 살다보니 환난을 당하는 것인데, 이 때 다윗이 그동안 하나님과 가까이 지냈다면 다윗의 이 기도를 안 들어주시겠느냐?
환난이라고 할 때 육적인 환난이 있고 영적인 환난이 있는데, 육적인 환난에는 개인적인 것도 있고 지엽적인 것도 있다. 그러니까 전쟁이나 지진이나 홍수나 기근이나 전염병 등의 환난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겪는 육적인 환난이 있다. 예수를 잘 믿다보니 이런 것도 빼앗기고 저런 것도 빼앗기는 일이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직장에 다니게 되면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하다 보니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동료들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한다.
악한 세상에서는 정직하게 살려고 할수록 이런 사람을 더 미워한다. 이로 인해서 의식주의 고난과 때로는 목숨이 죽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육적인 환난에서 그렇다. 그런가 하면 영적인 환난도 있는데, 이 영적인 환난은 육적인 환난과 관계가 될 수도 있을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육적인 환난이 같이 있을 수도 있고 영적인 환난만 있을 수도 있다. 육적인 면에서는 아주 잘되는데 영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못 받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영적인 환난과 육적인 환난을 분리를 못하게 되면 육적인 환난만을 알아서 자기의 육신이 편하게 되면 자기에게 영적인 환난이 오고 있고 당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영적인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된다. 우리는 이런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영적인 환난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싶고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하나님의 옳은 말씀을 찾을 수가 없어서 목이 타는 상태다. 예수를 믿어도 이걸 느끼는 자도 있지만 못 느끼는 자도 많이 있다.
영의 눈이 밝은 자는 교회가 이방세상과 똑같이 육으로 치우쳐 있으면 준비를 한다. 무슨 말이냐? 교회들이 소원 목적하는 것이 세상 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이럴 때 육적으로는 아무 탈 없이 잘 산다고 할지라도 이건 영적인 환난이 온 거다. 영의 눈이 밝은 자는 이걸 알고 준비를 한다.
유형교회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육적인 신앙사상으로 치닫고 올라가면 세상은 끝났다고 단정을 내려라. 인류 1차적 종말인 노아홍수에서 이걸 보여준다. 그런다고 해서 이럴 때 교회에서 예배의식이 없느냐? 예배의식은 정말로 거창하다. 예배의식을 보면 거기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 같고 눈요기 할 것도 많지만 진리의 말씀은 없다. 이럴 때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은 준비를 한다.
환난 속에서 고통을 덜 느끼려면, 또는 다른 사람이 맛보지 못하는 느끼지 못하는 기쁨을 맛보려면 하나님의 진리통치권, 하나님의 생명통치권, 하나님의 사랑통치권 안에 살아야 한다. 이걸 벗어나면 고통이 온다. 진리이치 생명이치의 신앙이 아닌 자기 모체의 신앙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 진리신앙을 자기의 모체로 삼아라 그 말이다. 환난에 부딪히기 전에 진리신앙 정신으로 체질개선을 하고 말씀무장도 서둘러야 한다.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지금이 서둘러야 할 시기다. 나는 이렇게 본다.
교회들이, 거짓 종들이 비진리적 세상적 육적인 신앙으로 치닫고 있다면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은 준비를 해야 한다. 절대로 우습게 여기지 말아라. ‘편안하다. 편안하다 할 때 환난이 덫과 같이 임하리니.’ 언제 환난이 임할 런지 인간 자기는 모른다. 항상 준비를 해두는 자가 영리하고 똑똑하고 명철한 사람이다. 준비가 잘 돼 있는 사람일수록 환난이 오면 고통을 덜 받는다. 많이 준비가 되어있으면 환난 속에서 기쁨을 맛보는 거고, 준비가 되지 못하면 고통 중에 고통의 연속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