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은혜를 알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놀라움에 흥분하게 됩니다. 그래서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렇듯 은혜로 완성된 우리의 정체성을 온전히 깨닫게 되면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원하고 나의 부르심을 성취하고 싶은 소망이 생깁니다. 하지만 부르심의 성취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은혜로 완성된 우리의 정체성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정체성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아들, 신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전부 성경 말씀이 주장하는 것들입니다. 이 세 가지 정체성 모두 은혜로 받은 것이지만 아들의 정체성은 정말로 은혜로만 된 것입니다. 내가 뭘 해야 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정체성"의 또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면서 (거듭나면서) 가지게 된 나의 정체성, 자의 자격, 나의 신분, 등등 정말로 놀랍게 바뀐 나의 새 정체성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신부의 정체성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를 새로운 정체성으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께 아무런 두려움 없이 가까이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온전한 신부는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이미 아는 자들입니다. 혹여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아들의 정체성 없이)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린다 해도 그 사람이 아는 하나님은 성경적으로 정확한 하나님이 아닐 가능성이 있고 이런 경우 대부분 하나님께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에 하나님이 내 삶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서 자신의 기능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르심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골고루 발달되어야 하며 어느 하나만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예외 없이 균형이 없는 신앙인이 됩니다.
"은혜"는 세 가지 정체성과 모두 관련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아들의 정체성과 가장 깊이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났기에 거저 받는 것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니까요. 누군가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선천적인 것이며 노력으로 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성경에 '양자의 영(롬 8:15)'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양자가 아니라 유대문화의 하나인데, 어린 자녀가 성장하면 성인식 비슷한 것을 하고 그때, 장성한 자신의 아들을 정식 아들로 “입양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유대문화를 모르는 경우,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주장이겠지만 이 성인식(바 미츠바)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선포를 받으신 것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다만 유대 남아들은 13세 때 이 예식을 치릅니다.)
'자기 자식을 입양한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굉장히 말이 되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이 세상 신, 마귀의 자식으로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귀가 우리를 창조한 것은 아닙니다. 그 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피조물이였으니까요. 창세 전부터 말입니다. 그런 우리가 마귀의 자식 노릇을 하다가 다시 원 상태로 복귀를 한 것입니다. 용서받은 탕자처럼 말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해 주시고, 타락한 이후에도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아, 다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