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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세의 의인 노아
창6:1-22당세의 의인 노아
창6:1-22절, 442.444.502장. 3927
죄로 오염되어 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 심판과 그 속에서도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본장의 주요 내용입니다. 죄에 타락한 세상의 발전 과정이 설명됩니다.(1-4절).
그리고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대한 하나님의 개탄과 염려가 소개됩니다(5-7절). 하나님의 개탄과 염려는 무서운 심판과 새 세계를 마련하시려는 계획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여기에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작정하신 바를 실행하시고자 의인 노아를 부르시고 그로 하여금 대형 방주를 건설하도록 명령하시는 내용들로 말미를 짓고 있습니다.(8-22절). 창1장에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천지 창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온 세상을 모두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개입으로 죄가 이 땅에 들어왔고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하자, 사악한 세상의 많은 죄악도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본장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극도로 타락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전멸 당하게 되는 인류 최악의 사건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1.노아 시대의 부패상입니다.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합니다. 인류 역사 초기에는 인구 증가가 급속히 이루어져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들이 장수하였으며 많은 자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의(창1:28절) 성취이기도 합니다. 즉 초기의 인간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막강한 생식력을 가지고 다산함으로써 땅 위에 사람이 번성케 된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창9:7절에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고 하셨습니다. -인구 번성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창1: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죄악이 극에 달합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하자 사악한 세상의 많은 죄악도 번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류가 땅 위에 불어나면서 그들에게서 많은 딸들이 나왔습니다. 특히 가인의 후예 가운데 딸들이 생겼습니다.(창4:19절).
6;1-2사람의 딸들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아름다움에 끌려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고 말았습니다. 한번 타락한 인간들은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급속도로 부패하여 갔으며 죄악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위에 사람 지은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나의 창조한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라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3)하나님께서 한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활 속에 흐르고 있는 심각한 죄악의 흐름을 감찰하셨습니다. 인간들의 죄악은 자꾸 영역을 넓혀서 선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무질서와 혼돈 의 세상이 된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하는 세상을 보시고 하나님은 한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다는 것은 인간들의 죄악이 얼마나 극에 달하였는가를 보여 줍니다.
2)그러나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1)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을 작정하십니다. 인간들의 죄악의 관영함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한탄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창조하신 사람과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패륜과 죄악을 미워하십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롬8:8절). 하나님은 사랑하는 인간의 죄악을 도외시하지 않으시고 그 죄악을 벌함으로써 새로운 질서 새롭게하고 새 생명을 주시고자 심판을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삼라만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에게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2)은혜를 입은 노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 가운데서도 노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로 엄청난 새 질서와 새로운 시작의 첫 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고 섬기는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엄정한 심판을 작정하신 가운데 노아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 된 우리에게 확실한 산 소망의 증거입니다.
3)의인 노아입니다. 의인이란 “곧다“라는 뜻으로 흠 없고 무죄하다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는 믿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타락한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믿음의 신념을 지킨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를 가리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노아 최초의의인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3.심판에 대비한 준비입니다.
1)노아에게 심판을 알려 주십니다. 노아의 의로운 삶을 보신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겠다는 자신의 뜻을 노아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예고하셨고 깊은 비밀을 그 사랑하는 자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의인에게는 악의 종국을 예고해 주시나 악인은 그 멸망을 깨닫지 못합니다.
2)방주를 짓도록 하십니다. 노아에게 심판을 알려 주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삶을 살았던 그에게 방주를 짓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노아를 구원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하나님에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끝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을 노아의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3)순종하는 노아입니다.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노아는 전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를 받고 이를 믿었습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약속을 확증도 없이 믿음으로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했습니다.
4.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창6장을 통하여 다시 한번 인간의 사악함과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상과는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노아의 경건한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타락한 현대 사회 속에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타락하자 노엽게 여기시고 심판계획을 세우시고 노아를 통하여 준비하게 하시고 필요한 사람만 생명을 존속시키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노아가 선택 받았습니다. 도한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값없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노아처럼 귀하게 쓰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득 채우는데 맡겨진 사역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물 심판.
창7:1-24절, 383.390.402장.
부패된 세상을 심판하리라고 예고하신 하나님의 홍수 사건이 본장에서 실행되고 있습니다. 먼저 홍수 심판 이전의 준비, 즉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대피시키시고 다음 세대를 이어나갈 생명들을 보호하시는 내용으로 일관됩니다.(1-16절).
하나님께서는 인간 역사의 최 악적 상황에서도 소망의 씨를 반드시 남겨 두신 것입니다. 그 다음 내용은 창조 이래 전무후무한 대홍수 심판의 생생한 묘사입니다.(17-24절). 하나님의 심판 도구인 물이 세상을 뒤덮고 오랫동안 준비하여 온 방주는 마침내 물 위에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죄의 세상은 물에 잠기고 구원의 방주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창7장은 창6장에서 이미 예언된 홍수 심판이 120십 년 만에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비를 내리게 하기 전 일주일 앞서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과 모든 생물을 방주로 들어가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전무후무한 홍수 심판을 행하신 것입니다.
1.임박한 홍수입니다. 1)하나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가 있기 7일 전 노아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하셨습니다. 먼저 노아와 그의 가족을 보살피신 이유에 대해서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정한 짐승을 두 쌍씩,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씩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2)하나님의 날짜 예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지시하시고 7일 만에 비를 내리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범죄한 인간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최후 경고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심판의 모든 준비를 갖추시고 난 후에도 다시금 죄악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신 것입니다.(욘1:2절).
이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며, 심판을 통한 멸망보다 회개함으로 구원받는 것을 바라시는지 알게 해줍니다.
3)노아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홍수가 있기 바로 전이지만 아직 홍수가 닥칠 가시적인 징조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구름도 일지 않으며 계속 화창한 날씨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정결한 짐승과 새, 부정한 짐승과 새를 모았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한 노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2.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1)하나님의 지시대로 온 가족이 방주로 들어갑니다.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손으로 방주를 지은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자신의 가족들과 구별한 동물과 새와 함께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방주에 들어간 때에는 아직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방주에 들어간 노아와 그 가족들의 행위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믿음의 위대성은 순종함에 있습니다.
2)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가고 나자 하나님께서는 땅에 비를 내리셨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은 계획된 대로 정확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당시의 모습을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로 묘사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폭우와 함께 해일과 지하수의 범람까지 동원된 것을 암시합니다.
3)방주의 문을 닫으십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가고 난 다음 하나님은 거대한 심판에 착수하셨습니다. 그때 방주의 문을 닫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신 것은 그분께서 주권적으로 그 방주를 통괄하시며 또한 생명들마저 자신의 주권으로 보호하시겠다는 의지를 암시합니다.
3.홍수의 참상입니다. 1)계속되는 홍수입니다.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십칠일에 시작된 홍수는 무려 밤낮 40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비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물을 동원하여 일시에 지구를 물로 채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이며 절대적인 섭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2)방주가 물 위에 떠다닙니다. 엄청난 양의 홍수가 방에 40일 동안 계속되자 구원의 도구이던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습니다.
물이 더욱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 위에 떠다니게 되었습니다. 홍수의 참상에 대해 성경은 천하의 높은 산이 다 물에 덮였다고 하였습니다.
3)멸망과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서의 물은 매우 강력하였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견디어 낼 수 없는 위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하신 자는 다 죽었고 살리기로 작정하신 자만 살아 남았습니다.
방주 안에는 구원이 있었지만 방주 밖에 있는 사람을 비롯하여 코로 호흡하는 것은 모두 죽었습니다.
4.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성행하고 있던 죄악의 요소를 하나도 남김없이 멸망시키기 위해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친히 말씀으로 만드셨고 “보기에 좋았더라.”라는 만족의 표시까지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만물을 파멸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는 단호한 분이심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를 방관하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찾아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로는 이웃 강대국을 이용하여 회초리로 활용하시기도 합니다. 왜! 그러실까요? 회개하고 돌이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과생각으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내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마음의 눈을 밝게하시고
피조물 된 저와 여러분은 세미한 죄까지도 철저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회개기도를 드림으로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특권을 통하여 회개 자복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조주이신 그리스도
골1:16-17, 53.82.84장, 3927
본문은 우주의 창조에 관한 기록입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창조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세계가 순전히 우연에 의해 탄생되었다는 세속주의나 인본주의자들의 견해가 있습니다.
둘째, 어떤 신에 의해 세상이 창조되었지만, 지금은 그 신이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는 견해입니다.
셋째, 순수한 기독교적인 진리로, 우주의 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본문은 우주나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본문의 선포가 모든 거짓 가르침을 얼마나 철저하게 깨뜨려 버리며 그릇된 신념들에 비교하여 얼마나 더 논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는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16절),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16절). -.그리스도께서 만물보다 먼저 계십니다.(17절).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보존하고 계십니다.(17절)
1,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16절),
1)“그에게”라는 말은 그 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창조사역은 그리스도 바로 그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2)“만물”이라는 말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모든 피조물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각각의 극히 작은 미립자와 물질, 그리고 각각의 실재하는 것들과 요소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안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요점은 세상에는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모든 것의 극히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2,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니다.(16절),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피조물이 높여야 할 분은 누구입니까? 피조물이 찬양하고, 높이며,
예배하고, 섬겨야 할 분은 누구입니까? 대답은 매우 분명합니다.
피조물은 창조자를 높여야 합니다. 피조물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자로 인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피조물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자를 찬양해야합니다.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창조의 목적과 완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은혜와 자비와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게 나타내시기 위해서 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간단히 말해. 우주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랑하시기 위해. -.수용하시기 위해. -.축복하시기 위해. -.구원하시기 위해. -.구속하시기 위해. -.존귀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높이며, 예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우주는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를 위해 존재합니다.“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15:28절),고 했습니다.
3,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보다 먼저 계셨습니다.(17절),
1)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간적으로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초의 피조물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계셨습니다. 그분은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우주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시작되기전, 즉 우주가 생기기 훨씬 이전에 선재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만이 영원하십니다.
“산이 생기기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2절),라고 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절),고 했습니다.
2)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중요성과 위엄과 탁월성에서 만물보다 뛰어나십니다. 세상에 그분보다 우월한 것은 나무것도 없습니다. 그분만이 우주의 주권자가 되십니다. 그분만이 주권자로 만물 위에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아래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따라서 그분을 예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9:5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보존하고 계십니다.(17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해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우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분을 계시합니다. 2)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합니다.
3)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가장 위대한 분이심을 계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이 자신을 사랑하고, 예배하며, 자신을 위해 살고, 헌신하기로 결단한 사람들로 가득 찰 때까지,
그 세상을 온전케 하기 위해 사랑을 베푸시며 역사하고, 섭리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귀하게 쓰임 받아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야에도 기적은 있다
요 6:1-14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시(時)로 알려진 신체장애 시인 송명희 씨는 “내 몰골이 참혹하다고 동정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믿음을 주셨으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 역설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약한 것이 자랑거리이고, 약할 때 온전하고, 약할 때가 곧 강함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우리의 삶이 광야 같이 척박하고, 약하고 고난스러워도 진실한 믿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기적의 축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본문은 벳세다 광야 지역으로 주님을 좇아 이만 여명 이상 몰렸는데 먹을 것이 문제가 됩니다.
광야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 오는 기적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절대 긍정하는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5-7) 우리의 환경은 빌립이 말하는 것처럼 언제든지 부정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드레는 주님의 긍정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요 6:8-9).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의 상황은 정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 그 말씀 속에서 긍정을 보게 될 때 그물이 터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부정적인 세상을 보면 기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적의 열쇠를 주님의 손에 드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요 6:10-11) 여기서 어린아이가 갖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는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릴 때 원대로 먹고 남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항상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에게 들려지면 광야에서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광야가 올수록 주님이 과거에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요 6:12-13). 은혜를 받고 기적을 체험하였지만 그것을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이 남겨두라고 했던 12광주리의 떡은 이 후에 오는 어떤 어려움도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미래에 다가올 환란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12광주리 남겨 주셨습니다. 과거에 주신 은혜를 잊지 않았다면, 그리고 믿음으로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면 앞으로도 하나님의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광야에서도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성경은 광야에 비교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고난이 많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 고난이 찾아올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난이 왔을 때 당황하지 않고 믿음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나는 이만큼 신앙생활을 하면 되었다고 자신을 믿기 때문에 예기치 않은 고난이 오면 시험 들어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늘 고난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광야의 삶에서 가장 큰 축복은 고난 때문에 늘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습니다. 적당히 기도하고,
안주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어려운 환경을 통해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광야로 밀어 넣으시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고난이 왔을 때 우리가 할 일은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엎드리는 만큼 기적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죽었다 살아나는 기적이 아니라 삶 속에서 아주 작은 일에도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신다는 그런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 광야의 체험이 있어야 우리는 늘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십년 동안 광야를 걷게 하는 것은 나를 낮추시고 시험하여 내 마음을 보시고 명령을 지키는지 알고자 하심입니다. 나를 낮추고 주리고 하고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심입니다.
즉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은 근원이 하나님께 나왔으므로 내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을 체험하게 하신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다면 하나님 존재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처한 지금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광야의 삶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이 임하므로.
행11:1-30절, 446.434.460장. 3927
이 본문에서 나타난 사건은 교회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 사건은 믿는 자들과 각 교회가 주의해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관계를 배웁니다. 문제는 "종족의 선입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오해에 있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구약이 보여 주는 바는 지상왕국에 관한 것으로, 메시야의 통치를 통하여 이방인들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민족이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거절하였으므로 이로써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들은 유대교로 개종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가이사랴에서의 베드로의 경험(행10장)과 바울이 밝힌, "교회의 비밀"(엡3장)은 이 질문의 해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경험이나 바울이 밝힌 교회의 비밀로 볼 때, 유대인과 이방인은 모두 정 죄 아래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왕국에 대한 "예언 프로그램"이, 이 시대에는 교회의 "비밀 프로그램"으로 넘겨진 것입니다.
1.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을 받아들입니다.(1-18절) 충실한 유대인들은 베드로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그것은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가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왕국 프로그램이 작용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베드로의 행위는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왕국은 "유대인에게 먼저"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라고 명령하셨는데(눅24:47, 행1:8절), 예루살렘이 믿을 때에 이 민족은 메시야를 영접하게 될 것이며 왕국이 설립될 것입니다.(행3:25-26절).
베드로가 고넬료(이방인)의 집에 간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11:12절). 베드로의 행동을 비판한 충성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미워했기 때문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충실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성령께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임하신 사실과 그의 사역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인한 것으로서 성령께서 인준하셨음을 말합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행한 일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5-11절)과,
성령의 인도하심(12절)과 하나님의 말씀(16절)을 들어 입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 할 때는 언제나 환경, 마음에서의 성령의 인도, 하나님의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의 세 가지를 필수적으로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2.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을 격려합니다.(19-26절) 누구를 받아들인다는 일과 누구를 격려한다는 일은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복음이 이방인의 지경, 곧 수리아의 중심 도시인 안디옥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 행8:1절 이하에서 언급된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에서 300마일(482,7 Km)쯤 북쪽에 있는 안디옥까지 흩어지게 했습니다.
이들은 위임받은 일에 성실하여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했었으나 몇몇 소수의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11:20절에 나오는 헬라인은 6:1절에 나오는 헬라파 유대인이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이 단어는 헬라 사람들, 다시 말해서 이방인을 뜻합니다.
많은 헬라인들은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알게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보내어 상황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사명은 8:14-17절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신자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23절).
이것이 구원과 연관하여 "은혜"란 말이 사도행전에서 맨 처음 사용된 곳입니다. 은혜는 앞으로 바울이 전하는 위대한 멧세지가 됩니다.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21절) 은혜로(23절) 구원받은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2:8-9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이러한 이방인 교회를 보게 된 것을 기뻐하였으며 믿음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권고하였습니다.
그가 다음에 취한 행동은 좀 이상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남겨 두고 바울을 찾으러 갔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바나바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전도를 위임하셨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행9:15, 행9:27절).
베드로는 무대에서 퇴장하였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 프로그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다음의 지도자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멧세지를 전파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 년이 다 가도록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가르쳤으며, 이 교회로부터 첫 선교 여행을 떠났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대신하게 되자 안디옥에 있는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대신하게 되었으며, 바울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도로서 "교회의 비밀"을 계시하게 되었습니다.
3.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의 도움을 받아들입니다.(27-30절)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기 위하여 지 교회에서 사역한 신약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왔다는 사실은 두 교회 사이에 친밀한 교제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28절의 "천하"는 전 로마 세계를 뜻하며 또는 온 땅(유대)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이방 신자들은 유대에 있는 신자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보내옴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기근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44-45절과 4:31-35절을 읽어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생동적인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앞부분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전혀 궁핍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1:27-30절을 보면 이들이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봅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에 관한 계획과 그 계획이 지니고 있는 축복들을 차단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왕국이 유대인들에게 제시되고 있던 동안에는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특별한 축복을 주셔서 저희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4:34절).
그러나 스데반이 돌에 맞음으로써 왕국이 최종적으로 거절되었을 때, 이 특별한 축복은 끊어지게 되고 유대 신자들은 가난과 곤핍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차례 특별한 도움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보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롬15:26, 고전16:1-, 고후8-9절).
사도행전 2:44-45절, 4:32-35절에서의, 헌납의 형식은 오늘날 지 교회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안디옥에 있는 신자들이 "모든 것을 통용"하지 않고, 그들의 능력에 따라 개인적으로 헌납했음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우리 자신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교훈하며(딤전5:8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믿음 없는 이교도보다 더 나쁘다고 경고했습니다.
헌금에 대한 하나님의 방식은 각 신자들이 십일조와 헌금을 각 지 교회에 바치며,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 교회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 헌금을 예루살렘에 보내는 일을 위해 바나바와 사울(바울)이 선택되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마가 요한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12:25절).
12장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특별한 사역이 종식되는 것을 보게 되며, 13장에서는 사도 바울의 사역으로 우리를 안내해 갑니다. 변화의 시기는 이것으로 막을 내리게 되며, 몇 가지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왕국의 멧세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선교의 중심지가 예루살렘에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대치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바울로 대치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신하여 이방인들이 사역의 범위에 포함되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란 방법이 "누구든지 믿는 자는"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성령 받는 데에 물세례가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 구분들을 명심한다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멧세지를 왕국의 멧세지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선교, 복음전파, 교회의 비전입니다.(27-30절), 교회 자체적으로 세계선교에 착수했습니다. 안디옥의 사역을 위해 몇몇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왔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들을 인도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이 왔는지에 관해서도 우리는 모르지만, 이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그들이 온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1)큰 궁핍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중 하나인 아가보가 전세계적인 기근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1)그 예언은 추론도 아가보의 이성적 능력으로 선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예언은 성령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2)그 기근은 주후41-54년에 통치한 글라우디오 가이사의 통치 때에 일어났습니다. 2)금전과 양식을 나누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힘대로" 부조를 예루살렘에 보냈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것입니다. 안디옥에 새로 세워진 교회가 이제 자체적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처음에 그들을 도왔던 모 교회를 도왔습니다.(22-24절), 3)사역 자들을 보냈습니다. 교회로부터 보내어진 사람이 누구인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바로 주된 두 사역자인 바나바와 사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교회의 장로들에게 헌금을 전달했습니다.
바울은 후에 하나님 백성(百姓)의 필요(必要)를 계속 채워주라고 격려(激勵)했습니다. 갈6:10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딤전6:18절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히13: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시37:3절에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 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기업, 선교하는 사업장. 선교하는 가정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돈의 힘을 말할 때 금권(金權)이라 하고 정치의 힘을 말할 때 정권(政權)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힘 있는 것은 영권(靈權)입니다. 영적인 권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예수님이 가지셨던 죄를 사하는 권세 곧 죄를 사하는 힘은 누구나 갖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막2:1-12절, 182.253.193장. 3927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10절에서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의 핵심적인 성경구절입니다. 권세는 권위와 세력이란 뜻이지만 결국 영어 성경대로 힘 곧 파워입니다.
본문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시며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임을 예리하게 관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할 때 중풍병자나 그의 네 친구들이 행한 행동이 핵심이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흔히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친구들의 영웅적인 신앙행위를 지나치게 부각시킴으로서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 또 구주로서의 왕적인 권위와 힘이 약화될 우려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중풍병자와 그를 예수님께 데려오되 지붕을 뜯고서 줄을 달아 내린 그들의 신앙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갖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 그리고 병을 고치시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선 본문의 배경부터 살피면서 이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분명한 메시지를 살피고자 합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처음 갈릴리 전도 여행 중에는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예수의 능력을 상징하는 사건 하나만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에 돌아오신 예수는 자기가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이적을 행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육체의 병을 고치시는 일을 했지만, 나머지 부분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참된 목적은 육체의 병은 말할 것도 없고 영혼의 병 곧 죄의 병을 고치러 왔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이 본문에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민중들의 호응도가 커가자 예수님께 대한 고의적이고 강한 반대가 일어났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대중들은 순수하게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보고. 구름떼처럼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기득권층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마음 가운데 은근히 시기와 놀라움, 두려움, 질투가 범벅이 되어서 예수님께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특별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속을 뒤집어 놓은 것은 중풍병자를 고치는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중풍병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풍 병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중한 간질과 같은 질병입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갑자기 발작적 고통이 일어나 그만 쓰러지고 마는 병입니다. 그리고 그런 증세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중증의 질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볼 때 그보다 더 중증의 병은 바로 죄의 병이란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죄 사함을 받았느니 라고 말씀하시고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습니다. 즉, 영혼의 병을 먼저 고치고 육신의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데는 관심이 많아도 영혼의 병 곧 죄의 병을 고치는 데는 무심한 것이 사실입니다. 영혼의 병이 치료되어야 육신의 병도 치료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메시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는 예수님께서 중 풍병을 고치신 과정에서 나타나는 깊은 계시의 의미를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는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았다는 말씀입니다. 5절 상 반절에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깊이 묵상해 보는 것도 그들의 믿음이 어떠했길 래 예수님께 그들의 믿음을 인정 했는가 함입니다.
중풍병자와 그 일행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왔을 것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예수님께서 행한 이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경고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소문은 소문의 꼬리를 물고 번져갔습니다.
영육 간에 아울러 병든 자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였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천국과 회개와 구원을 주제로 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2절에 보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도 유다1;3 믿음의 도를 말씀하시고 눅20;21하나님의 도를가르키고있습니다.히6;1-2그리스도의도를 행7;38생명의도를
고전1;18십자가의도를말씀하고있습니다.
그렇다면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도 어깨 너머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으로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겨난 믿음입니다.
로마서 10:17절의 말씀대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고 한 것은 진리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자동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결단도 자동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열매도 자동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만약에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을 읽지 않고 믿음이 생겼다면 그런 믿음은 옳은 믿음이 아니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들도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나타난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 구속 주 하나님 심판 주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모든 다른 종교는 인본주의와 바탕을 둔 자율 주의적 종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를 만나게 되는 것은 그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는믿음인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5절 후반절에 보면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소자야 라는 말은 얘야! 아들아! 와 같이 아주 부드러운 말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다소 뜻밖의 말이었습니다.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병 낫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는 선포는 당사자들도 놀랐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반대자들에게 큰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이 수근 대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담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절)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반응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서는 당연했습니다.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인가 라는 강한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참담하기 그지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율법에 따라 자칭 하나님이므로 죽여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시고 계신 점입니다.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10절에서 그들의 마음을 읽고 대답하면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선언(宣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죄를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겠네 라는 찬송대로 주께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예수 앞에는 용서 못받을 죄가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해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 문제를 이미 해결했습니다. 저를 믿는 자에게 영생의 축복과 죄의 용서로 말미암은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면서 아직 기쁨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속죄의 기쁨 곧 사죄의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우리의 죄 짐을 벗겨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아시고 영육간의 질병을 아시는 주님께 우리의 전폭을 맡기십시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할 때 그는 벌떡 일어나 상을 들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영육간의 병을 깨끗하게 고침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런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이시오, 우리 구주의 죄 사하는 권세 앞에 우리가 취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래도 본문에 나타난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삶의 모습이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동원해야 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수많은 무리들이 집 안에서, 집 밖에서 움직일 수 없으리 만큼 운집한 그 장소에서 들것에 들린 환자를 데리고 예수님을 만나기는 말 그대로 하늘에 별 따기입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기발한 착상 뿐 아니라 지붕을 뜯어 내고 침상을 줄로 매어 내리는 극단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무례하고 얼마나 결례가 되고 얼마나 경솔한 행동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친구의 병을 고쳐주어야 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 해결은 예수 밖에 없다는 데 마음이 모아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려면 이런 적극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우리 앞에 산이 있다, 벽이 있다,
강이 있다. 라고 합니다. 또는 비가 온다. 눈이 온다. 등 안 되는 쪽으로 무엇이든지 몰고 갑니다. 이런 인생에게는 하나님께서 기적의 역사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 사함 받는데 무슨 실례, 무슨 염치, 무슨 절차를 따지겠습니까?
학벌, 직장의 직위, 세속적인 권세 권위 그리고 잘못된 자존심 모두 십자가 앞에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벌거숭이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은혜를 받습니다. 극성인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힘쓰고 애쓰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장애물이 있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문 앞에까지 꽉 들어찬 군중들은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에게는 분명히 장애였습니다. 그러나 장애를 두려워 말고 발상의 전환을 시도해야 합니다. 가다가 산이 있으면 돌아갈 수도 있고 굴을 뚫을 수도 있습니다.
지붕을 뚫고서라도 무례한 일이 있어도 실례가 되더라도 소동이 일어나도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야겠다는 그들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차지합니다. 보다 적극적인 신앙의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기주의 가 팽배한 이때에 육신의 질고를 치료하시고 죄를 사하는 권세까지 지니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는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를 갖고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절, 442.444.502장. 3927
죄로 오염되어 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 심판과 그 속에서도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본장의 주요 내용입니다. 죄에 타락한 세상의 발전 과정이 설명됩니다.(1-4절).
그리고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대한 하나님의 개탄과 염려가 소개됩니다(5-7절). 하나님의 개탄과 염려는 무서운 심판과 새 세계를 마련하시려는 계획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여기에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작정하신 바를 실행하시고자 의인 노아를 부르시고 그로 하여금 대형 방주를 건설하도록 명령하시는 내용들로 말미를 짓고 있습니다.(8-22절). 창1장에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천지 창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온 세상을 모두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개입으로 죄가 이 땅에 들어왔고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하자, 사악한 세상의 많은 죄악도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본장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극도로 타락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전멸 당하게 되는 인류 최악의 사건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1.노아 시대의 부패상입니다.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합니다. 인류 역사 초기에는 인구 증가가 급속히 이루어져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들이 장수하였으며 많은 자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의(창1:28절) 성취이기도 합니다. 즉 초기의 인간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막강한 생식력을 가지고 다산함으로써 땅 위에 사람이 번성케 된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창9:7절에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고 하셨습니다. -인구 번성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창1: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죄악이 극에 달합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하자 사악한 세상의 많은 죄악도 번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류가 땅 위에 불어나면서 그들에게서 많은 딸들이 나왔습니다. 특히 가인의 후예 가운데 딸들이 생겼습니다.(창4:19절).
6;1-2사람의 딸들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아름다움에 끌려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고 말았습니다. 한번 타락한 인간들은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급속도로 부패하여 갔으며 죄악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위에 사람 지은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나의 창조한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라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3)하나님께서 한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활 속에 흐르고 있는 심각한 죄악의 흐름을 감찰하셨습니다. 인간들의 죄악은 자꾸 영역을 넓혀서 선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무질서와 혼돈 의 세상이 된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하는 세상을 보시고 하나님은 한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다는 것은 인간들의 죄악이 얼마나 극에 달하였는가를 보여 줍니다.
2)그러나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1)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을 작정하십니다. 인간들의 죄악의 관영함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한탄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창조하신 사람과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패륜과 죄악을 미워하십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롬8:8절). 하나님은 사랑하는 인간의 죄악을 도외시하지 않으시고 그 죄악을 벌함으로써 새로운 질서 새롭게하고 새 생명을 주시고자 심판을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삼라만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에게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2)은혜를 입은 노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 가운데서도 노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로 엄청난 새 질서와 새로운 시작의 첫 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고 섬기는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엄정한 심판을 작정하신 가운데 노아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 된 우리에게 확실한 산 소망의 증거입니다.
3)의인 노아입니다. 의인이란 “곧다“라는 뜻으로 흠 없고 무죄하다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는 믿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타락한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믿음의 신념을 지킨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를 가리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노아 최초의의인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3.심판에 대비한 준비입니다.
1)노아에게 심판을 알려 주십니다. 노아의 의로운 삶을 보신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겠다는 자신의 뜻을 노아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예고하셨고 깊은 비밀을 그 사랑하는 자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의인에게는 악의 종국을 예고해 주시나 악인은 그 멸망을 깨닫지 못합니다.
2)방주를 짓도록 하십니다. 노아에게 심판을 알려 주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삶을 살았던 그에게 방주를 짓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노아를 구원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하나님에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끝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을 노아의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3)순종하는 노아입니다.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노아는 전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를 받고 이를 믿었습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약속을 확증도 없이 믿음으로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했습니다.
4.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창6장을 통하여 다시 한번 인간의 사악함과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상과는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노아의 경건한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타락한 현대 사회 속에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타락하자 노엽게 여기시고 심판계획을 세우시고 노아를 통하여 준비하게 하시고 필요한 사람만 생명을 존속시키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노아가 선택 받았습니다. 도한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값없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노아처럼 귀하게 쓰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득 채우는데 맡겨진 사역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물 심판.
창7:1-24절, 383.390.402장.
부패된 세상을 심판하리라고 예고하신 하나님의 홍수 사건이 본장에서 실행되고 있습니다. 먼저 홍수 심판 이전의 준비, 즉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대피시키시고 다음 세대를 이어나갈 생명들을 보호하시는 내용으로 일관됩니다.(1-16절).
하나님께서는 인간 역사의 최 악적 상황에서도 소망의 씨를 반드시 남겨 두신 것입니다. 그 다음 내용은 창조 이래 전무후무한 대홍수 심판의 생생한 묘사입니다.(17-24절). 하나님의 심판 도구인 물이 세상을 뒤덮고 오랫동안 준비하여 온 방주는 마침내 물 위에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죄의 세상은 물에 잠기고 구원의 방주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창7장은 창6장에서 이미 예언된 홍수 심판이 120십 년 만에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비를 내리게 하기 전 일주일 앞서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과 모든 생물을 방주로 들어가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전무후무한 홍수 심판을 행하신 것입니다.
1.임박한 홍수입니다. 1)하나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가 있기 7일 전 노아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하셨습니다. 먼저 노아와 그의 가족을 보살피신 이유에 대해서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정한 짐승을 두 쌍씩,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씩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2)하나님의 날짜 예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지시하시고 7일 만에 비를 내리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범죄한 인간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최후 경고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심판의 모든 준비를 갖추시고 난 후에도 다시금 죄악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신 것입니다.(욘1:2절).
이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며, 심판을 통한 멸망보다 회개함으로 구원받는 것을 바라시는지 알게 해줍니다.
3)노아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홍수가 있기 바로 전이지만 아직 홍수가 닥칠 가시적인 징조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구름도 일지 않으며 계속 화창한 날씨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정결한 짐승과 새, 부정한 짐승과 새를 모았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한 노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2.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1)하나님의 지시대로 온 가족이 방주로 들어갑니다.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손으로 방주를 지은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자신의 가족들과 구별한 동물과 새와 함께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방주에 들어간 때에는 아직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방주에 들어간 노아와 그 가족들의 행위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믿음의 위대성은 순종함에 있습니다.
2)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가고 나자 하나님께서는 땅에 비를 내리셨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은 계획된 대로 정확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당시의 모습을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로 묘사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폭우와 함께 해일과 지하수의 범람까지 동원된 것을 암시합니다.
3)방주의 문을 닫으십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가고 난 다음 하나님은 거대한 심판에 착수하셨습니다. 그때 방주의 문을 닫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신 것은 그분께서 주권적으로 그 방주를 통괄하시며 또한 생명들마저 자신의 주권으로 보호하시겠다는 의지를 암시합니다.
3.홍수의 참상입니다. 1)계속되는 홍수입니다.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십칠일에 시작된 홍수는 무려 밤낮 40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비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물을 동원하여 일시에 지구를 물로 채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이며 절대적인 섭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2)방주가 물 위에 떠다닙니다. 엄청난 양의 홍수가 방에 40일 동안 계속되자 구원의 도구이던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습니다.
물이 더욱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 위에 떠다니게 되었습니다. 홍수의 참상에 대해 성경은 천하의 높은 산이 다 물에 덮였다고 하였습니다.
3)멸망과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서의 물은 매우 강력하였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견디어 낼 수 없는 위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하신 자는 다 죽었고 살리기로 작정하신 자만 살아 남았습니다.
방주 안에는 구원이 있었지만 방주 밖에 있는 사람을 비롯하여 코로 호흡하는 것은 모두 죽었습니다.
4.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성행하고 있던 죄악의 요소를 하나도 남김없이 멸망시키기 위해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친히 말씀으로 만드셨고 “보기에 좋았더라.”라는 만족의 표시까지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만물을 파멸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는 단호한 분이심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를 방관하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찾아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로는 이웃 강대국을 이용하여 회초리로 활용하시기도 합니다. 왜! 그러실까요? 회개하고 돌이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과생각으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내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마음의 눈을 밝게하시고
피조물 된 저와 여러분은 세미한 죄까지도 철저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회개기도를 드림으로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특권을 통하여 회개 자복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조주이신 그리스도
골1:16-17, 53.82.84장, 3927
본문은 우주의 창조에 관한 기록입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창조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세계가 순전히 우연에 의해 탄생되었다는 세속주의나 인본주의자들의 견해가 있습니다.
둘째, 어떤 신에 의해 세상이 창조되었지만, 지금은 그 신이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는 견해입니다.
셋째, 순수한 기독교적인 진리로, 우주의 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본문은 우주나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본문의 선포가 모든 거짓 가르침을 얼마나 철저하게 깨뜨려 버리며 그릇된 신념들에 비교하여 얼마나 더 논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는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16절),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16절). -.그리스도께서 만물보다 먼저 계십니다.(17절).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보존하고 계십니다.(17절)
1,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16절),
1)“그에게”라는 말은 그 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창조사역은 그리스도 바로 그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2)“만물”이라는 말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모든 피조물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각각의 극히 작은 미립자와 물질, 그리고 각각의 실재하는 것들과 요소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안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요점은 세상에는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모든 것의 극히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2,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니다.(16절),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피조물이 높여야 할 분은 누구입니까? 피조물이 찬양하고, 높이며,
예배하고, 섬겨야 할 분은 누구입니까? 대답은 매우 분명합니다.
피조물은 창조자를 높여야 합니다. 피조물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자로 인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피조물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자를 찬양해야합니다.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창조의 목적과 완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은혜와 자비와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게 나타내시기 위해서 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간단히 말해. 우주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랑하시기 위해. -.수용하시기 위해. -.축복하시기 위해. -.구원하시기 위해. -.구속하시기 위해. -.존귀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높이며, 예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우주는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를 위해 존재합니다.“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15:28절),고 했습니다.
3,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보다 먼저 계셨습니다.(17절),
1)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간적으로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초의 피조물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계셨습니다. 그분은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우주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시작되기전, 즉 우주가 생기기 훨씬 이전에 선재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만이 영원하십니다.
“산이 생기기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2절),라고 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절),고 했습니다.
2)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중요성과 위엄과 탁월성에서 만물보다 뛰어나십니다. 세상에 그분보다 우월한 것은 나무것도 없습니다. 그분만이 우주의 주권자가 되십니다. 그분만이 주권자로 만물 위에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아래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따라서 그분을 예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9:5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보존하고 계십니다.(17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해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우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분을 계시합니다. 2)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합니다.
3)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가장 위대한 분이심을 계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이 자신을 사랑하고, 예배하며, 자신을 위해 살고, 헌신하기로 결단한 사람들로 가득 찰 때까지,
그 세상을 온전케 하기 위해 사랑을 베푸시며 역사하고, 섭리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귀하게 쓰임 받아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야에도 기적은 있다
요 6:1-14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시(時)로 알려진 신체장애 시인 송명희 씨는 “내 몰골이 참혹하다고 동정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믿음을 주셨으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 역설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약한 것이 자랑거리이고, 약할 때 온전하고, 약할 때가 곧 강함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우리의 삶이 광야 같이 척박하고, 약하고 고난스러워도 진실한 믿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기적의 축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본문은 벳세다 광야 지역으로 주님을 좇아 이만 여명 이상 몰렸는데 먹을 것이 문제가 됩니다.
광야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 오는 기적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절대 긍정하는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5-7) 우리의 환경은 빌립이 말하는 것처럼 언제든지 부정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드레는 주님의 긍정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요 6:8-9).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의 상황은 정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 그 말씀 속에서 긍정을 보게 될 때 그물이 터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부정적인 세상을 보면 기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적의 열쇠를 주님의 손에 드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요 6:10-11) 여기서 어린아이가 갖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는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릴 때 원대로 먹고 남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항상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에게 들려지면 광야에서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광야가 올수록 주님이 과거에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요 6:12-13). 은혜를 받고 기적을 체험하였지만 그것을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이 남겨두라고 했던 12광주리의 떡은 이 후에 오는 어떤 어려움도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미래에 다가올 환란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12광주리 남겨 주셨습니다. 과거에 주신 은혜를 잊지 않았다면, 그리고 믿음으로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면 앞으로도 하나님의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광야에서도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성경은 광야에 비교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고난이 많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 고난이 찾아올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난이 왔을 때 당황하지 않고 믿음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나는 이만큼 신앙생활을 하면 되었다고 자신을 믿기 때문에 예기치 않은 고난이 오면 시험 들어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늘 고난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광야의 삶에서 가장 큰 축복은 고난 때문에 늘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습니다. 적당히 기도하고,
안주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어려운 환경을 통해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광야로 밀어 넣으시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고난이 왔을 때 우리가 할 일은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엎드리는 만큼 기적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죽었다 살아나는 기적이 아니라 삶 속에서 아주 작은 일에도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신다는 그런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 광야의 체험이 있어야 우리는 늘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십년 동안 광야를 걷게 하는 것은 나를 낮추시고 시험하여 내 마음을 보시고 명령을 지키는지 알고자 하심입니다. 나를 낮추고 주리고 하고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심입니다.
즉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은 근원이 하나님께 나왔으므로 내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을 체험하게 하신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다면 하나님 존재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처한 지금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광야의 삶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이 임하므로.
행11:1-30절, 446.434.460장. 3927
이 본문에서 나타난 사건은 교회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 사건은 믿는 자들과 각 교회가 주의해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관계를 배웁니다. 문제는 "종족의 선입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오해에 있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구약이 보여 주는 바는 지상왕국에 관한 것으로, 메시야의 통치를 통하여 이방인들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민족이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거절하였으므로 이로써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들은 유대교로 개종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가이사랴에서의 베드로의 경험(행10장)과 바울이 밝힌, "교회의 비밀"(엡3장)은 이 질문의 해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경험이나 바울이 밝힌 교회의 비밀로 볼 때, 유대인과 이방인은 모두 정 죄 아래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왕국에 대한 "예언 프로그램"이, 이 시대에는 교회의 "비밀 프로그램"으로 넘겨진 것입니다.
1.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을 받아들입니다.(1-18절) 충실한 유대인들은 베드로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그것은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가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왕국 프로그램이 작용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베드로의 행위는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왕국은 "유대인에게 먼저"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라고 명령하셨는데(눅24:47, 행1:8절), 예루살렘이 믿을 때에 이 민족은 메시야를 영접하게 될 것이며 왕국이 설립될 것입니다.(행3:25-26절).
베드로가 고넬료(이방인)의 집에 간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11:12절). 베드로의 행동을 비판한 충성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미워했기 때문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충실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성령께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임하신 사실과 그의 사역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인한 것으로서 성령께서 인준하셨음을 말합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행한 일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5-11절)과,
성령의 인도하심(12절)과 하나님의 말씀(16절)을 들어 입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 할 때는 언제나 환경, 마음에서의 성령의 인도, 하나님의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의 세 가지를 필수적으로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2.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을 격려합니다.(19-26절) 누구를 받아들인다는 일과 누구를 격려한다는 일은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복음이 이방인의 지경, 곧 수리아의 중심 도시인 안디옥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 행8:1절 이하에서 언급된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에서 300마일(482,7 Km)쯤 북쪽에 있는 안디옥까지 흩어지게 했습니다.
이들은 위임받은 일에 성실하여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했었으나 몇몇 소수의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11:20절에 나오는 헬라인은 6:1절에 나오는 헬라파 유대인이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이 단어는 헬라 사람들, 다시 말해서 이방인을 뜻합니다.
많은 헬라인들은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알게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보내어 상황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사명은 8:14-17절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신자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23절).
이것이 구원과 연관하여 "은혜"란 말이 사도행전에서 맨 처음 사용된 곳입니다. 은혜는 앞으로 바울이 전하는 위대한 멧세지가 됩니다.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21절) 은혜로(23절) 구원받은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2:8-9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이러한 이방인 교회를 보게 된 것을 기뻐하였으며 믿음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권고하였습니다.
그가 다음에 취한 행동은 좀 이상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남겨 두고 바울을 찾으러 갔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바나바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전도를 위임하셨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행9:15, 행9:27절).
베드로는 무대에서 퇴장하였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 프로그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다음의 지도자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멧세지를 전파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 년이 다 가도록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가르쳤으며, 이 교회로부터 첫 선교 여행을 떠났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대신하게 되자 안디옥에 있는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대신하게 되었으며, 바울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도로서 "교회의 비밀"을 계시하게 되었습니다.
3.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의 도움을 받아들입니다.(27-30절)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기 위하여 지 교회에서 사역한 신약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왔다는 사실은 두 교회 사이에 친밀한 교제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28절의 "천하"는 전 로마 세계를 뜻하며 또는 온 땅(유대)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이방 신자들은 유대에 있는 신자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보내옴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기근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44-45절과 4:31-35절을 읽어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생동적인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앞부분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전혀 궁핍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1:27-30절을 보면 이들이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봅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에 관한 계획과 그 계획이 지니고 있는 축복들을 차단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왕국이 유대인들에게 제시되고 있던 동안에는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특별한 축복을 주셔서 저희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4:34절).
그러나 스데반이 돌에 맞음으로써 왕국이 최종적으로 거절되었을 때, 이 특별한 축복은 끊어지게 되고 유대 신자들은 가난과 곤핍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차례 특별한 도움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보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롬15:26, 고전16:1-, 고후8-9절).
사도행전 2:44-45절, 4:32-35절에서의, 헌납의 형식은 오늘날 지 교회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안디옥에 있는 신자들이 "모든 것을 통용"하지 않고, 그들의 능력에 따라 개인적으로 헌납했음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우리 자신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교훈하며(딤전5:8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믿음 없는 이교도보다 더 나쁘다고 경고했습니다.
헌금에 대한 하나님의 방식은 각 신자들이 십일조와 헌금을 각 지 교회에 바치며,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 교회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 헌금을 예루살렘에 보내는 일을 위해 바나바와 사울(바울)이 선택되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마가 요한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12:25절).
12장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특별한 사역이 종식되는 것을 보게 되며, 13장에서는 사도 바울의 사역으로 우리를 안내해 갑니다. 변화의 시기는 이것으로 막을 내리게 되며, 몇 가지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왕국의 멧세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선교의 중심지가 예루살렘에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대치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바울로 대치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신하여 이방인들이 사역의 범위에 포함되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란 방법이 "누구든지 믿는 자는"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성령 받는 데에 물세례가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 구분들을 명심한다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멧세지를 왕국의 멧세지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선교, 복음전파, 교회의 비전입니다.(27-30절), 교회 자체적으로 세계선교에 착수했습니다. 안디옥의 사역을 위해 몇몇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왔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들을 인도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이 왔는지에 관해서도 우리는 모르지만, 이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그들이 온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1)큰 궁핍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중 하나인 아가보가 전세계적인 기근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1)그 예언은 추론도 아가보의 이성적 능력으로 선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예언은 성령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2)그 기근은 주후41-54년에 통치한 글라우디오 가이사의 통치 때에 일어났습니다. 2)금전과 양식을 나누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힘대로" 부조를 예루살렘에 보냈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것입니다. 안디옥에 새로 세워진 교회가 이제 자체적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처음에 그들을 도왔던 모 교회를 도왔습니다.(22-24절), 3)사역 자들을 보냈습니다. 교회로부터 보내어진 사람이 누구인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바로 주된 두 사역자인 바나바와 사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교회의 장로들에게 헌금을 전달했습니다.
바울은 후에 하나님 백성(百姓)의 필요(必要)를 계속 채워주라고 격려(激勵)했습니다. 갈6:10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딤전6:18절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히13: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시37:3절에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 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기업, 선교하는 사업장. 선교하는 가정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돈의 힘을 말할 때 금권(金權)이라 하고 정치의 힘을 말할 때 정권(政權)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힘 있는 것은 영권(靈權)입니다. 영적인 권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예수님이 가지셨던 죄를 사하는 권세 곧 죄를 사하는 힘은 누구나 갖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막2:1-12절, 182.253.193장. 3927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10절에서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의 핵심적인 성경구절입니다. 권세는 권위와 세력이란 뜻이지만 결국 영어 성경대로 힘 곧 파워입니다.
본문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시며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임을 예리하게 관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할 때 중풍병자나 그의 네 친구들이 행한 행동이 핵심이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흔히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친구들의 영웅적인 신앙행위를 지나치게 부각시킴으로서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 또 구주로서의 왕적인 권위와 힘이 약화될 우려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중풍병자와 그를 예수님께 데려오되 지붕을 뜯고서 줄을 달아 내린 그들의 신앙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갖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 그리고 병을 고치시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선 본문의 배경부터 살피면서 이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분명한 메시지를 살피고자 합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처음 갈릴리 전도 여행 중에는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예수의 능력을 상징하는 사건 하나만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에 돌아오신 예수는 자기가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이적을 행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육체의 병을 고치시는 일을 했지만, 나머지 부분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참된 목적은 육체의 병은 말할 것도 없고 영혼의 병 곧 죄의 병을 고치러 왔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이 본문에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민중들의 호응도가 커가자 예수님께 대한 고의적이고 강한 반대가 일어났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대중들은 순수하게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보고. 구름떼처럼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기득권층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마음 가운데 은근히 시기와 놀라움, 두려움, 질투가 범벅이 되어서 예수님께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특별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속을 뒤집어 놓은 것은 중풍병자를 고치는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중풍병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풍 병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중한 간질과 같은 질병입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갑자기 발작적 고통이 일어나 그만 쓰러지고 마는 병입니다. 그리고 그런 증세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중증의 질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볼 때 그보다 더 중증의 병은 바로 죄의 병이란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죄 사함을 받았느니 라고 말씀하시고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습니다. 즉, 영혼의 병을 먼저 고치고 육신의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데는 관심이 많아도 영혼의 병 곧 죄의 병을 고치는 데는 무심한 것이 사실입니다. 영혼의 병이 치료되어야 육신의 병도 치료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메시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는 예수님께서 중 풍병을 고치신 과정에서 나타나는 깊은 계시의 의미를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는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았다는 말씀입니다. 5절 상 반절에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깊이 묵상해 보는 것도 그들의 믿음이 어떠했길 래 예수님께 그들의 믿음을 인정 했는가 함입니다.
중풍병자와 그 일행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왔을 것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예수님께서 행한 이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경고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소문은 소문의 꼬리를 물고 번져갔습니다.
영육 간에 아울러 병든 자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였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천국과 회개와 구원을 주제로 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2절에 보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도 유다1;3 믿음의 도를 말씀하시고 눅20;21하나님의 도를가르키고있습니다.히6;1-2그리스도의도를 행7;38생명의도를
고전1;18십자가의도를말씀하고있습니다.
그렇다면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도 어깨 너머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으로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겨난 믿음입니다.
로마서 10:17절의 말씀대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고 한 것은 진리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자동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결단도 자동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열매도 자동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만약에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을 읽지 않고 믿음이 생겼다면 그런 믿음은 옳은 믿음이 아니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들도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나타난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 구속 주 하나님 심판 주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모든 다른 종교는 인본주의와 바탕을 둔 자율 주의적 종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를 만나게 되는 것은 그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는믿음인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5절 후반절에 보면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소자야 라는 말은 얘야! 아들아! 와 같이 아주 부드러운 말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다소 뜻밖의 말이었습니다.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병 낫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는 선포는 당사자들도 놀랐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반대자들에게 큰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이 수근 대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담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절)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반응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서는 당연했습니다.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인가 라는 강한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참담하기 그지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율법에 따라 자칭 하나님이므로 죽여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시고 계신 점입니다.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10절에서 그들의 마음을 읽고 대답하면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선언(宣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죄를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겠네 라는 찬송대로 주께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예수 앞에는 용서 못받을 죄가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해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 문제를 이미 해결했습니다. 저를 믿는 자에게 영생의 축복과 죄의 용서로 말미암은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면서 아직 기쁨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속죄의 기쁨 곧 사죄의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우리의 죄 짐을 벗겨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아시고 영육간의 질병을 아시는 주님께 우리의 전폭을 맡기십시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할 때 그는 벌떡 일어나 상을 들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영육간의 병을 깨끗하게 고침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런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이시오, 우리 구주의 죄 사하는 권세 앞에 우리가 취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래도 본문에 나타난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삶의 모습이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동원해야 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수많은 무리들이 집 안에서, 집 밖에서 움직일 수 없으리 만큼 운집한 그 장소에서 들것에 들린 환자를 데리고 예수님을 만나기는 말 그대로 하늘에 별 따기입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기발한 착상 뿐 아니라 지붕을 뜯어 내고 침상을 줄로 매어 내리는 극단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무례하고 얼마나 결례가 되고 얼마나 경솔한 행동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친구의 병을 고쳐주어야 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 해결은 예수 밖에 없다는 데 마음이 모아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려면 이런 적극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우리 앞에 산이 있다, 벽이 있다,
강이 있다. 라고 합니다. 또는 비가 온다. 눈이 온다. 등 안 되는 쪽으로 무엇이든지 몰고 갑니다. 이런 인생에게는 하나님께서 기적의 역사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 사함 받는데 무슨 실례, 무슨 염치, 무슨 절차를 따지겠습니까?
학벌, 직장의 직위, 세속적인 권세 권위 그리고 잘못된 자존심 모두 십자가 앞에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벌거숭이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은혜를 받습니다. 극성인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힘쓰고 애쓰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장애물이 있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문 앞에까지 꽉 들어찬 군중들은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에게는 분명히 장애였습니다. 그러나 장애를 두려워 말고 발상의 전환을 시도해야 합니다. 가다가 산이 있으면 돌아갈 수도 있고 굴을 뚫을 수도 있습니다.
지붕을 뚫고서라도 무례한 일이 있어도 실례가 되더라도 소동이 일어나도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야겠다는 그들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차지합니다. 보다 적극적인 신앙의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기주의 가 팽배한 이때에 육신의 질고를 치료하시고 죄를 사하는 권세까지 지니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는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를 갖고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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