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mond-5】
본격적인 다이아몬드 생산은
이어 대규모 다이아몬드 광상이 발견되어 근대식 채굴법이 채택되었다.
대량 채굴된 다이아몬드는 널리 대중화되었다.
남아공에 다이아몬드 러시가 시작되었다.
영국인 세실 로즈 (Cecil John Rhodes)는 유대계인 로스차일드가의 자금을 받아 1888년 드비어스사를 설립했다.
드비어스는 보어인 형제의 이름이다.
평범한 농부인 이들은 남아공의 어느 농장을 50파운드에 매입했는데 우련히 그 농장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드비어스는 6300파운드에 팔았다.
형제는 이 농장을 팔면서 자신들의 농장의 이름인 ‘드비어스 광산’으로 영구히 붙여줄 것을 요구했다.
다이아몬드 사업의 요체는 채굴권으로 집약된다.
다이아몬드 사업이 발달한 계기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깊은 갱에서도 채굴을 할 수 있게 막대한 자금을 모아, 이에 투자하는 광산 금융회사라는 제도를 채택한 데 있다.
이 제도 자체를 세실 로즈가 생각해낸 것이다.
세실 로즈는 정계에 진출해 1890년 남아공 케이프 식민지 총독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각종 정책과 법을 영국인과 드비어스사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 다이아몬드 광산을 통합 독점하고 거부가 되었다.
인근 지방에 대한 무력정복도 서슴지 않았다.
로즈는 아프리카 남부 일대에 제국을 건설했는데, 그가 정복한 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로즈의 땅’이란 뜻의 ‘로디지아’이다
로디지아는 지금의 짐바브웨이다.
로즈는 정계에서 은퇴한 두 자신의 이름을 딴 ‘로즈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세실 로즈는 1902년 49살의 나이로 후계자 없이 죽었다.
그 뒤 드비어스사의 직원이었던 독일계 유대인 어니스트 오펜하이머(Ernest Oppenheimer)가 드비어스사의 주식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1916년에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J.P.모건으로붜 투자를 유치해 ‘Anglo America’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해 남아공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지배한다.
그 뒤 3대째인 니콜라스 오펜하이머에 이르고 있다.
오래전부터 세계의 금업계도 오펜하이머 일가가 움직여왔다.
이 오펜하이머가 다이아몬드 시장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Anglo America사는 앙골라, 콩고 등지로 사업을 확장해갔다.
세계적으로 다이아몬드는 중앙아프리카와 러시아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오펜하이머는 흑인 노동자에게 중노동을 시키면서도 임금은 적게 주어 이들을 착취했다.
또 공급량 조정과 가격 조작으로 경쟁사의 몰락을 유도하고 망한 경쟁사는 헐값에 사들였다.
그의 무자비한 경영으로 드비어스사는 대형기업으로 성장했고 오펜하이머는 1929년 드비어스사 회장에 올랐다.
1929년에 경제대공황이 닥쳤다.
오펜하이머는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전 세계 모든 다이아몬드를 헐값에 사들였다.
파산한 광산회사들도 모두 헐값에 사들였다.
이로써 드비어스는 공급 물량을 독점적으로 조절하기 시작했다.
생산-유통-재고관리-판매의 모든 과정을 장악하고 고가정책을 기본 모토로 삼았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