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징검다리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벌서 여섯 번이나 변하고도 남았다.
1953년 7월은 한민족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달이다. 그로부터 60여년, 앞으로도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는 살얼음 같은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수 십대의 소련제 T-34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을 하였다. 그 후 만 3년의 처참한 민족 상쟁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라는 생소한 이름표가 한 반도 상공에 뜨고 ‘휴전’이라는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처음에는 그 괴물이 별 것 아니고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커지고 길어졌으니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 꼬리가 얼마나 긴지 7천만 명이 60여년을 쫓아가도 꼬리는 보이지 않고 오리무중이다. 그 괴물의 이름표를 만들어 붙인 사람은 UN군 총사령관 마크 웨인 클라크(Mark Wayne Clark),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3인이다. 모두 괴물의 이름표만 만들어 주고 다른 세상으로 간지 오래다.
6.25는 불과 반 년 만에 한반도를 흉물덩어리로 만들었다. 가는 곳마다 난도질을 해서 흠집을 내고 불을 질러 잿더미를 만들고 오랫동안 전투의 흔적을 지울 수가 없게 황칠을 해 놓았다. 마을마다 M1소총과 카빈총(carbine) 또는 북괴군 따발총의 탄피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박격포탄이 땅에 박혀 있는 것이 예사였다. 불발탄을 잘못 건드려 터지면 그대로 죽거나 부상을 입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개구쟁이 아이들은 불발탄을 주우면 위험한 줄을 모르고 발사시험도 하였다. 총알을 땅에 거꾸로 박아 놓고 뇌관위에 못끝을 맞추어 흙으로 꼭꼭 다져 흔들리지 않게 해 놓은 다음 멀리서 큰 돌을 던져 총알을 발사 시킨다. 총알이 정확히 발사되는 장면을 보기는 어렵지만 만에 하나 잘못 되어 옆으로 튀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아이들은 박격포탄을 주워 위험한 놀이를 하다가 터져서 여러 명이 즉사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부서진 탱크위에 올라가거나 트레일러(trailer) 위에서 댄스를 치며 노는 것은 차라리 애교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권장할 일이었다. 달리 아이들의 놀이터나 장난감이 없고 가는 곳마다 탄피며 불발탄이 널려 있으니 그 곳은 그나마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38선이 가까운 전방지역에 살던 한상희네 가족이 홍천 근처로 이사를 온 것은 1952년 2월이었다. 판문점에서는 휴전 논의가 다소 진전되어 군사분계선 설정에 합의하고 쌍방 포로명단까지 교환하여 곧 전쟁이 끝날듯하였으나 총성은 멎지 않았다.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고 생활이 어려워 대대로 살던 고향을 버리고 멀리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먼 집안 아저씨가 있는 곳이다.
상희는 아래로 남동생 2명과 여동생이 3년 터울로 줄줄이 따라 오고, 아버지가 막노동을 하여 간신히 생계를 이어 가고 있는 가난한 집의 맏딸이었다. 어머니는 남의 밭일을 거들어주고 삯바느질도 하여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전에 살던 곳에서 읍내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전쟁 통에 학교가 쉬는 날이 많았고 선생님들이 군에 입대하면 수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중 1학년을 놀다시피 하고 그냥 보냈다.
상희는 아버지를 따라 명륜중학교 교무실에 들어섰다.
명륜중학교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당시 유교재단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였다. 교무실이라야 향교에 딸린 작은 벽돌집이다. 교무실 안에는 대여섯 명의 선생님들이 마침 쉬는 시간이라 책상에 엎드려 무엇인가 열심히 쓰기도 하고 한쪽에서는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교무실 안쪽 끝에서 아버지는 교감선생님과 상희의 전학에 대하여 의논하고 계셨다. 어떤 남자 선생님은 어디서 구했는지 영어로 된 잡지를 펴 놓고 다른 선생님에게 보여 주는 데 여자 배우들이 반나체로 있는 사진들을 보며 좋아하고 있었다. 양지쪽 창가에는 여선생님도 몇 명 보였다. 학생 수는 한 학년에 남.녀 1반씩 전부 6반에 200명도 안되고 선생님도 10여명밖에 안 되는 것 같았다. 교실은 폭격을 맞아 불타버리고 그 자리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겨우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된 천막교실이 몇 채 있는데 3명씩 앉는 긴 책상과 긴 의자가 놓여 있었다. 바닥은 황토 흙을 다져 놓은 맨 바닥이라 아이들의 발길이 닿는 곳은 파이고 닳아 울퉁불퉁했다. 상희는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하는 그 당시의 국민학교에서 머리가 좋아 6년 동안 줄곧 반에서 1등하는 우등생이었다. 지난 1년 동안은 거의 놀다시피 하였지만 아버지는 명륜중학교 2학년에 편입시켰다.
영어시간이 되었다.
훤칠한 키에 웃는 얼굴에다 서글서글하게 생긴 영어선생님은 제 4과를 펴 놓고
“오늘은 아주 재미있는 과를 배우게 되는데 혹시 집에서 미리 공부해 온 학생 있으면 아는 대로 얘기해 봐라, 틀려도 좋다”고 하셨다.
상희가 벌떡 일어섰다. 애들이 모두 쳐다본다.
“쟤는? 새로 온 아인데?” 수군수군 한다.
“예, 어느 봄날 물가에 큰 조개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따스한 햇살을 즐기고 있는데... 큰 황새가 날아와 긴 부리로 조갯살을 쪼았어요. 조개는 깜짝 놀라 입을 꽉 다물었지요... 그러니 황새도 깜짝 놀라 부리를 빼려고 하였지만 이미 조개한테 물렸으니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었어요. 황새는 조개가 입을 벌리지 않으면 부리를 뺄 수 없고... 조개는 황새가 물고 있는 살을 놓아 주지 않으면 입을 벌려 줄 수 없게 되었지요. 둘이서 끙끙 앓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어부가 이 장면을 보고 쫓아 와서 ‘횡재했구나.’ 하면서 황새와 조개를 모두 망태에 집어 담고 가버렸대요...”
선생님도 놀라고 아이들도 놀랐다. 예습해 온 학생이 상희 혼자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2학년에서 상희만큼 영어를 잘 하는 학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잘 했다. 상희는 영어를 잘하는구나. 이 이야기는 옛날 중국 연나라와 조나라에서 나온 얘긴데 어부지리(漁父之利)라고 하지. 싸움을 하면 싸우는 양쪽은 다 손해고 제 3자만 이득을 보게 된다는 뜻이야.”
선생님은 싱글벙글하며 상희를 크게 칭찬하셨다.
그 날 이후 상희는 아이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게 되었다. 어떤 아이는 상희와 친해지고 싶어서 연필도 주고 소설책도 빌려 주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입을 삐쭉거리며 시샘하는 아이도 있었다.
김차숙은 상희보다 조금 크고 힘도 세다. 아버지는 일찍이 돌아가시고 오빠가 있으나 아무도 돌봐 주는 사람이 없으니 학교를 그만두고 무슨 짓을 하는지 나돌아 다녀 얼굴 보기도 어려웠다. 홀어머니는 참기름 병을 담은 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행상을 해서 세 식구 생계를 이어 가야하기 때문에 아이들에 대해서는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차숙은 항상 얼굴이 밝고 명랑하며, 공부도 꽤 잘하고 골목대장 노릇은 도맡아 하고 있었다. 연약한 상희가 한 반이 되어 왔으니 곧잘 도와주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하루는 얌전한 조영애를 꼬드겨 상희와 싸움을 붙였다. 상희가 네 욕을 하고 너를 무시하니 더 참지 말고 맛을 보여 주라고 하는 한편, 상희에게는 만약 영애가 싸움을 걸어오면 걔는 힘이 없는 애이니 피하지 말고 확 밀어버리면 금방 나자빠질 거라고 했다. 이튿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모퉁이를 돌아서니 공터가 나오고 영애가 느닷없이 달려들었다. 깜짝 놀라 엉겁결에 힘껏 밀었는데 웬걸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옥신각신 한 덩어리가 되어 밀고 당기고 싸우던 끝에 서로 뭔가 오해가 있는 것을 알고 영애가 한 발 물러서면서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이 광경을 길 건너편에서 차숙이와 하정선이가 숨어서 보고 키득거리며 즐기고 있었다. 하정선은 아버지가 큰 길 가에서 자전거 점포를 운영하고 있어 비교적으로 돈 걱정 없이 잘 사는 가정의 둘째 딸이었다. 차숙이와 단짝이 되어 차숙이가 하자는 대로 하는 아이였다.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남달리 좋아하고 사자, 치타, 하이에나, 악어 등 먼 나라의 동물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수의과 대학을 가서 수의사가 되었다. 춘천시내에 하나밖에 없는 동물병원을 차려 돈도 잘 벌고 상희를 여러 모로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차숙이와 정선이는 상희에게 미안해하며 더 가까이 지내려고 전보다 따뜻이 대해 주었다.
여름이 되었다. 6월 하순 큰 비가 와서 농작물이 쓰러지고 개천에 물이 불었다. 몹시 더운 날이다. 학교를 마치고 대여섯 명이 물놀이하러 개울가로 나갔다. 평소에 자주 가는 개천이라 보통 때에는 가장 깊은 곳이 허리 정도였는데 그 날은 물이 목에 찰 정도로 약간 깊었다. 바로 서서도 갈 수 있지만 정선이는 앞장서서 헤엄을 치면서 가고 아이들이 모두 따라서 건너편으로 갔다. 돌아 올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가장 깊은 곳을 지나 이쪽으로 거의 다 와서 어쩐 일인지 상희가 물살에 떠내려가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상희야, 빨리 발을 딛어! 다 왔어!”
모두들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정선이가 달려가서 상희의 손을 잡았다. 두 애가 다 같이 약간 떠내려가다가 정선이가 자세를 바로잡아 상희를 끌어당기며 자갈밭으로 올라섰다. 하마터면 큰 일이 날 뻔하였다.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몇 m만 더 내려갔더라면 다시 목에까지 물이 차고 물살이 센 위험한 곳인데 천만 다행이었다. 차숙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보고만 있었다. 역시 물에서는 정선이가 차숙이 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생물시간이 되었다.
이대현 선생님은 상희의 담임 선생님이다. 서울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 명륜중학교에 부임한 약관 25세의 새내기 선생님이다. 일제 강점기에 만주 북간도에서 용맹을 떨친 독립운동가의 손자였다. 할아버지는 대대로 내려온 명문 집안의 종손으로 춘천 근교에서 큰 부자였지만 나라가 망하고 일제의 압력이 심해지자 ‘나라가 없는데 집안이고 재산이고 다 무슨 소용인가’하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을 팔았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에 자금을 대고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아버지는 대대로 내려온 문중 제사를 받들어야하기 때문에 고향을 버리지 못하고 한 가닥 남은 조상의 묘소에 딸린 종토를 관리하며 간신히 생활을 이어 나갔다. 8.15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그 어려운 시련을 극복하고 아들과 두 딸을 훌륭히 길러 내었다.
“사람의 소화기관은 돼지나 개 같은 동물의 내장과 거의 같아.”
선생님의 생물과목 수업이 시작되었다.
“입에는 이빨, 혀, 편도선 등이 있고 침샘이 있어 음식물에 침을 섞어 소화가 잘 되도록 도와주지. 이빨은 어른이 되면 32개가 되고...음식물이 식도를 지나 위에 내려가면 위는 자동적으로 움직이는데 교감신경이 위를 운전하는 것과 같아. 또 위는 펩신, 염화수소 같은 위액을 풀어내어 음식물과 섞어서 장으로 내려 보내지.
장은 소장과 대장으로 나누어지는데 소장은 길이가 6m나 되고, 대장은 소장보다 굵지만 길이는 1.5m 정도밖에 안 돼. 소장의 제일 위쪽 부분은 십이지장인데 간에서 만들어진 쓸개즙과 이자에서 나오는 이자액을 음식물에 섞어 밑으로 내려 보내지. 소장에서는 탄수화물은 포도당으로,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지방은 지방산과 글리세롤로 소화시켜 흡수하는 역할을 해요. 대장에서는 남은 찌꺼기에서 수분을 흡수하고 직장에 모아 두었다가 항문을 통해서 몸 밖으로 내 보내는 거야.”
칠판에 시원시원하게 그림을 그려가면서 설명하니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차차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생물시간이 기다려지고 생물을 가장 좋아하는 과목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이 하나씩 둘씩 늘어났다. 곤충에 대해서 묻기도 하며 꽃이나 나무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서슴없이 물었다. 아이들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니 알고 싶은 것이 끝없이 나왔다. 그에 따라 이대현 선생님의 인기는 날로 높아 졌다. 나중에 커서 선생님이 되겠다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선생님은 혈액형에 대해서도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아이들의 혈액형 검사까지 해 주었다.
“사람의 혈액형은 o, a, b, ab 등 4종류가 있지. 전쟁터에서 다쳐서 피를 많이 흘린 군인은 급히 남의 피를 수혈 받아야 하는데, 의사는 환자의 혈액형이 무엇인지 그리고 받아도 되는 혈액형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해. 만약 실수를 해서 서로 맞지 않은 혈액형을 넣어 주면 피가 엉겨서 바로 죽어요.
수혈 법칙은
첫째, 같은 혈액형끼리는 마음 놓고 서로 주고받을 수 있고
둘째. 같은 형이 없을 때에는 급한 대로 다른 혈액형도 받을 수 있지만
a형은 o형만 받을 수 있고
b형도 o형만 받을 수 있고
ab형은 o, a, b, 다 받을 수 있지.
o형은 a, b, ab 다 받을 수 없어요.
다시 말하면 o형은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하느님이고, ab형은 누구에게도 주지는 못하고 받기만하는 욕심쟁이야.”
여름방학도 지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아직도 햇볕이 쨍쨍 내려 쪼이고 아침부터 더운 9월 어느 날, 상희네 반은 체육시간이 되어 운동장으로 나와 줄을 맞추어 서서 목소리가 큰 체육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장형찬 선생님은 대학에 다닐 때 배구선수였는데 전쟁 중에 군에 입대하여 전투중 소위로 임관되어 일선에서 맹활약하던 용사였다. 어깨에 관통상을 입고 후송되었다가 6개월 후에 제대하여 국방부의 추천으로 교련 배속장교 겸 체육교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교련시간에는 엄격하고 용감한 군인정신을 가르치는 무서운 호랑이선생님이지만 체육시간에는 부드럽고 인자한 큰 형님 같아 학생들이 아주 좋아하였다. 그때는 전쟁 중이므로 모든 중·고등학교에 교련과목을 두고 학생들에게 기초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남학생들은 모양만 비슷하게 만든 군대 배낭, 목총 등으로 무장하고 제식훈련과 사격연습까지 하였다.
장선생님은 배구경기의 기본을 설명하고 학생 전원이 한 번씩 배구를 할 수 있도록 팀을 짜서 운영하는 방법을 지도하는 중이었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상희는 갑자기 선생님 말씀이 희미하게 들렸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된지 모른다. 정신이 들어 눈을 뜨니 웅성웅성하는 말소리가 멀리 들리고 선생님과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내려다보는 얼굴들이 보였다.
“상희야!”
차숙이가 부르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운동장 가의 나무 그늘에서 하늘을 보고 반듯이 누워있는 것이었다. 빈혈로 쓰러졌다가 깨어 난 순간이다. 얼굴에 약간의 찰과상을 입어 피가 흐르는 것은 반창고를 몇 조각 붙여 주는 것으로 간단히 처리되고 이내 일어날 수 있어 선생님과 아이들이 안심했다.
1953년 상희는 3학년이 되었다. 시골 학교의 학생들은 모두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어렵게 공부하고 있었다. 판문점에서는 오랫동안 밀고 당기는 휴전협정 논의가 지루하게 계속되었지만 전방 후방, 농촌 도시 할 것 없이 먹고 살기가 어렵고 학생들은 부잣집아이가 아니면 공책과 연필을 사 쓰기도 어려웠다. 연필이 닳아 몽당연필이 되면 자루 대용으로 풀칠한 종이를 돌돌 말아서 더 이상 깎을 수 없을 때까지 썼다. 학교 교과서는 울퉁불퉁하고 시커먼 갱지에 인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글자가 뭉개진 페이지가 절반이었다.
인기가 많았던 이대현 선생님이 군의관 학교로 입대하였다. 학생들은 주인 잃은 양떼처럼 마음을 둘 데가 없어 오랫동안 허전한 날을 보내야했다.
전방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고 판문점에서는 막바지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협상이 2년이라는 긴 시간을 끈 것은 포로교환을 어떻게 하느냐, 군사분계선은 어떻게 긋느냐 등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 때문이었다. 협정 체결을 앞두고 쌍방이 한 치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백마고지전투, 피의 능선전투 등 처참한 살육전을 벌려 쌍방 간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3년 1개월 만에 한반도에 총성이 멎었다. 그에 앞서 6월 8일 포로송환협정이 체결되었으나 한·미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휴전할 수 없다고 반대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애국 동포까지 북한으로 보낼 수는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협정을 묵살하고 18일부터 4일간에 걸쳐 전국 7개 수용소에 있던 반공포로 27,000여명을 전격 석방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휴전은 되었지만 유엔군 측은 많은 양보를 안게 되었다. 포로교환 숫자만 보더라도 북으로 돌려보낸 포로가 83,000여명인데 비해 남에서 돌려받은 포로는 그 6분의 1도 안 되는 13,000명에 불과하였다. 적을 많이 죽이고 포로를 많이 잡았다는 것은 전쟁에서 이겼다는 뜻이다. 그러나 휴전협상은 별개의 문제이다. 유엔군 측은 전쟁에 이기고 협상에 진 것이다. 더욱이 미귀환 국군포로가 60여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이북에 남아 있는 현실이니 협상을 잘 했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이승만대통령은 나라를 분단하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통일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몇 개월 동안 군의관 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이대현 선생님은 홍천 근처에 있는 부대로 배속되어 오셨다. 겨울 방학이 되어 몇몇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하였다.
상희는 도저히 진학할 형편이 안 되어 낙담하던 중 선생님을 다시 만나 크게 반갑고 위안이 되었으나 진학을 포기해야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기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선생님을 실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희가 진학을 포기했다는 말을 한 것은 차숙이였다. 선생님은 명륜중학교 졸업생중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학생은 20명도 안 되는데 그나마 상희 같은 우등생이 돈 때문에 진학을 포기한다니 매우 안타까웠다. 어떻게 하든 상희에게 용기를 주어 진학시키고 싶었다.
“가난 때문에 공부를 포기한다는 것은 가난 때문에 자기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같아. 가난은 일시적이지만 인생은 100년까지도 갈 수 있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일단 응시는 해 봐.
미국의 링컨대통령도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가난을 극복하고 대통령까지 되지 않았니?“
선생님은 링컨대통령에 대해서 상세히 이야기를 해 주셨다.
“링컨대통령은 켄터키주(州) 호젠빌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가난한 농부여서 학교는 못 다니고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며 틈틈이 독학을 했어... 어찌나 가난한지... 링컨이 사는 오두막집은 비가 오면 방안에 빗물이 떨어져 그릇을 받혀 놓아야 했어... 하루는 빌려 온 책이 홀랑 젖어서 책값을 물어 주어야 하는데 돈이 없어 책값 대신 3일간 일을 해 주었다고 해. 그 정도로 어렵게 자라서 28세인 1837년에 변호사가 되었지. 주 의회 의원으로 출발해서 연방 하원의원을 거쳐 잠시 쉬었다가 1850년대 노예문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크게 부각되자 1856년 ‘노예제도 반대’를 내걸고 창당한 공화당에 입당했어. 그는 한 나라의 국민이 반은 노예, 반은 자유민인 상태에서는 그 나라는 영구히 지속될 수 없다는 주장을 폈지.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 링컨이 당선되자 남부의 여러 주에서 반기를 들어 이듬해에 남북전쟁이 터졌어. 전쟁 중인 1864년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고 이듬해 4월 9일 남부군이 완전 항복하여 전쟁은 끝났지... 그런데 5일 후인 14일에 연극을 관람하던 중, 남부 사람인 배우가 대통령을 쏘아 아깝게도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어.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전쟁 중인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설립 기념식에서 한 말인데 너무나 유명한 말이지.”
아이들은 눈을 깜박이며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들었다. 선생님은 “사범학교에 가면 수업료도 싸고 졸업 후에 바로 취직이 되어 생활도 안정이 될 것이니 억지로라도 3년만 고생해 보라”고 하셨다. 원래 사범학교는 큰 도시에 있는데 각 도에 하나 또는 둘씩 밖에 없고 일반 고등학교보다 시험 날짜도 빠르고 수재들만 모이는 곳이라 합격이 어렵지만 상희의 실력이면 해 볼만하다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상희는 이대현 선생님의 강력한 권고를 외면할 수 없어 ‘진학을 하고 안하고는 나중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그냥 포기할 것이 아니라 일단 원서라도 내 놓고 보자’며 부모님 몰래 원서를 썼다. 명륜중학교에서는 차숙이도 함께 내기로 했다. 차숙이는 집도 가난하고 실력도 모자라 사범학교까지는 생각할 수 없는 형편이지만 용감하게 지원하는 것을 보고 상희가 자극을 받았다. 게다가 혼자 응시하는 것보다는 함께 가는 친구가 있어서 큰 위로가 되었다. 선생님의 권고와 함께 상희가 원서를 내게 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상희는 입학원서를 내고부터는 부모님에게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사정을 뻔히 알면서 큰 짐을 지워드리는 것 같아 말도 못하고 미안한 나날을 보냈다.
“너 손 잘 그렸니?”
차숙이 자신이 없는 표정으로 상희에게 물었다.
“응, 그런대로 그렸어”
상희는 음악은 좀 모라라도 그림은 보통이상으로 잘 그렸다. 입학시험 날 오후, 미술 실기 시험은 교단에 놓인 비너스 석고상을 그리든지, 아니면 석고상이 잘 안 보이는 곳에 있는 학생은 자기 손을 그려 내도 된다는 것이 시험문제였다. 국민학교는 전공과목별 선생이 정해져 있지 않고 담임선생이 모든 과목을 가르쳐야하기 때문에 사범학교에서는 음악, 미술, 체육 등 실기과목을 중요시한다. 일반 고등학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사범학교 입학시험에는 실기시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날씨는 사흘 굶은 시어머니 상으로 잔뜩 찌푸려 있고 추웠다. 실내 전등마저 밝지 않아 앞자리에 앉은 몇몇 수험생을 제외하고는 석고상을 그리기가 마땅치 않았다. 상희와 차숙이는 수험번호가 멀리 떨어져 있어 각각 다른 교실에서 손을 그렸다.
합격자 발표 날이 되었다. 새벽차를 타고 온 상희는 차멀미를 해서 얼굴이 노랗게 되어 있었다. 사범학교 운동장에는 수험생이나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들과 학부형들로 꽉 차 있고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로 장터 같이 시끌벅적하였다.
“이번 수석은 명륜중학교 학생이 차지했대...”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몰라도 이런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상희야!”
본관 쪽에서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차숙이가 뛰어 오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얘, 축하한다. 너 일등이래, 나도 합격된 거 알지?”
하며 상희의 두 손을 잡고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학교는 입학시험 성적을 발표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학교건 수석합격은 소문이 나기 마련이다.
“누가 그러데? 내가 일등이라는 거.”
“명륜중학교에서 일등이 나왔다고 모두들 깜짝 놀라서 수군수군하는 걸 들었어. 우리학교라면 너 말고 누가 있어? 나는 꼴찌도 감지덕지인데...”
사범학교는 부속중학교가 있고 부중은 일반 중학교보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많고 중1때부터 성적순이 거의 정해지다시피 되어 왔다. 사범학교 입시에서는 당연히 부중 졸업자가 다수 합격하므로 합격은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고 누가 수석을 차지하느냐가 큰 관심사였다. 수석은 거의 예측이 되어 있는데 금년에는 얼토당토않게 이름도 없는 시골 3류 중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했다고 하니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학교에서는 더욱 쉬쉬하고 수석합격자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상희와 차숙이는 본관 게시판 앞에서 떠날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상희와 차숙의 사범학교 합격은 명륜중학교 개교 이래 가장 큰 경사가 되었다. 학교가 개교한지는 오래 되었지만 학생 수도 적고 시골이므로 일반 고등학교 진학도 쉽지 않았다. 하물며 도내에 하나밖에 없는, 그 어려운 사범학교에 2명이 응시하여 2명이 모두 합격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기적이고 큰 경사인데 수석합격의 영광까지 차지하였으니 학교가 들썩들썩하고 교문 에는 커다란 축하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고등학교 입시에 온갖 신경이 쏠려 있는 중학교들은 물론, 신입생을 뽑는 모든 고등학교에 이 소식이 전해지고 가는 곳마다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그로부터 수 십 년간 이 지방에서는 상희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아버지는 건축공사장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로부터 상희의 사범학교 합격소식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소식을 전해준 그 집 딸은 명륜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상희가 사범학교에 응시한 줄도 몰랐는데 합격했다는 소식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앞이 캄캄해지고 얼굴에 먹구름이 가득 덮였다. 앞으로 하루 이틀도 아니고 3년간이나 되는 도시생활에 엄청나게 드는 숙식비는 어떻게 대어주며 옷값이며 학용품값과 책값은 얼마나 들것인가? 지금 다섯 식구 끼니도 이어가기 어려운데 당장 필요한 입학금은 어디서 구해야 한단 말인가? 걱정이 태산이었다.
휴전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살기 어려운 시절이다. 일제 강점기에 나라의 알짜배기는 다 빼앗기고 쭉정이만 남은 폐허 위에 건국한 지 2년 만에 더 혹독한 전쟁의 참화를 입었으니 도시는 파괴되고 농촌은 황폐하여 생필품이 모자라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정말 암담한 시대가 되었다. 다행이 미국이 잉여 농산물과 구호품을 풀어 놓아 극빈자들이 아사하는 사태는 면했지만 누구든지 하루 이틀이 각박한 세상이다.
“탄환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죽일 수는 있어도 공산주의 자체는 죽일 수 없다. 공산주의는 가난과 불만이 있는 곳에 항상 번식하는 독버섯이다.”
UN군 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의 말이 절실하게 와 닿는다. 전쟁에 이기고 공산주의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모든 사람들이 가난을 벗어나야 한다.
사범학교는 남녀 공학이다. 3년 후에는 모두 국민학교 선생님이 된다.
상희는 면사무소에 다니는 친척 아저씨한테서 빌린 돈으로 간신히 입학금을 낼 수 있어 천만 다행이었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를 잡은 심정이었다. 학교에서 2km나 떨어진 변두리 촌 동네에서 빈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하였다. 저녁때면 동네 코흘리개 어린이들이 상희를 찾아 와서 재잘재잘 이야기도 하고 여름에는 먹던 감자도 주었다. 상희는 아이들의 숙제를 봐 주기도 하고 시간이 되면 주인집 텃밭에서 일도 거들어 주었다.
상희는 추운 겨울 불기운을 본지가 오래인 싸늘한 자취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도록 공부하였다. 뜨거운 물을 넣은 군용 수통을 안고 손을 녹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추워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으니 공부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잉크가 얼어 글을 쓸 수도 없다. 그 시절에는 볼펜도 없고 PC도 없는 것은 물론, 시커먼 종이 한 장도 귀했다. 라면이라는 것도 없고 전기불도 귀했다. 목욕도 자주 하지 못하고 지저분한 환경이라 빈대와 벼룩과 이(蝨)가 들끓었다. 가난한 시골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의 머리와 목에 DDT를 뿌려주기도 하고 미역국 같은, 쓴 회충약을 끓여 먹이기도 하였다.
상희는 점심을 거르는 날이 많았고 시중에 돌아다니는 군용건빵 몇 개로 점심을 때우기도 하였다. 하루에 계란 하나로 버틴 적도 있었다. 시골집에서는 방학 때 보리쌀 몇 되 가져 오거나 인편에 아버지가 보내 주신 수업료를 두 번 받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내 음식점 주방에서 일을 거들어 주고 학비를 벌기도 하고 종이 박스를 모아 고물상에 파는 할머니들을 도와주고 용돈을 몇 푼 받기도 하며 살았다. 제대로 먹지를 못하니 점점 여위어 갔고 헐벗고 굶주린 자취생활 2년 반의 긴 터널을 어렵게 어렵게 지나가고 있었다. 학교 수업료가 많이 밀려 선생님들 보기도 민망하고 학교 친구들에게도 폐만 끼치는 것 같아 학교 가기도 싫어졌다. 몸도 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져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마침내 방학이 되었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학업을 포기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고생을 생각하면 학교 중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 짐을 정리하여 떠나기 전에 이대현 선생님을 만나 뵙고 인사나 드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그 무렵 선생님은 춘천 부근으로 부대가 이동하여 온지 얼마 되지 않았고 학교에서 30분이면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시내 전셋집에서 사모님과 3살 된 딸을 두고 영외 생활을 하고 계셨다. 학교 선생님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한 체격에 장교계급장을 달고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믿음직한 군인이 되어 있었다. 3년 만에 만난 상희를 반가이 맞아 주셨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심신이 나약해져 학교를 중퇴하고 집으로 갈려고 하는 상희의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이 하신 첫마디였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교편생활 1년 반 동안에 유일한 희망이자 장래가 훤히 보이는 수제자가 좌절하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러 말 하지 말고 당장 짐 싸가지고 우리 집으로 와. 아무리 어려워도 몇 달 동안이야 같이 못살겠나?”
선생님의 2층 전셋집은 방이 2개 밖에 없는데 한 방은 애기를 데리고 내외분이 쓰고 작은 방은 책상과 옷장이 있고 빈자리 없이 잡동사니들로 꽉 차 있었다. 어디로 오라는 것인지 상희는 알아듣지 못하였다.
“나도 고등학교 다닐 때 무지 어려웠어. 돈이 없어 그 먹고 싶은 짜장면 한 그릇도 사 먹을 수 없었지... 학교 마치고 집에 올 때 중국집 앞을 지나면 구수한 짜장면 냄새가 나고... 저녁 늦게 석간신문을 배달하고 나면 배가 고파 호떡집에 들려 빵을 사 먹는데 한 개만 달라고 하니 호떡집 아저씨가 혹시 잘 못 들었나 하고 다시 보는데 정말 부끄럽고 민망했어... 고구마 1개를 3등분하여 세끼를 때운 적도 있었어. 다행이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학교 사환이 되어 새벽부터 교무실에 난로를 피우고 눈을 쓸고... 방과 후에는 교무실과 운동장 청소를 하고 심부름과 잡일을 도맡아 했지. 방학 때에는 온 동네 다니며 돼지 먹이로 뜨물과 음식 쓰레기를 모아다주고 대학 입학금을 마련하기도 했어.”
선생님은 계속하셨다.
“마침 잘 됐다. 내 대학선배 중에 성호경이라는 분이 있어... 의학박사인데, 인체에 관한 외국서적을 번역하는 중이라고 하더군. 글은 번역하면 되지만 수많은 삽화는 일일이 켄트지에 그려야 하는데 자기는 그릴 줄도 모르고 그릴 시간도 없다고 하면서 누가 도와주면 좋겠다고 했어... 그림에 소질이 있는 학생이 있으면 보내 달라고 하니 방학 동안에 가서 도와주도록 해. 적당히 용돈을 줄 거야.”
상희는 차디 찬 북극의 바다에서 한 조각 얼음을 만나 올라앉은 심정으로 선생님의 전셋집에, 몸만 간신히 붙일 수 있는 공간에 짐을 풀어 놓았다. 그 선생님에 그 사모님이라, 후덕한 사모님이 동생같이 생각하며 반갑게 맞아 주어 남의 집 같지 않고 편안하였지만 가뜩이나 좁은 집에 비집고 들어 온 것이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선생님의 은혜에 깃털만큼이라도 보답하려고 틈틈이 애기를 봐주고 청소도 하였다. 둘째를 임신 중인 사모님은 가마솥 같은 더위에 지쳐서 몹시 힘들어 하셨다. 상희에게는 난생 처음으로 근심 걱정에서 해방된 나날이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상희가 현관문을 들어서니 일찍 퇴근하신 선생님께서 “상희야, 김치 비빔밥이 먹고 싶구나.”라고 하셨다. 상희가 얼른 알아듣고 ‘선생님이 점심식사를 집에서 하려고 일찍 퇴근하신 게로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빨리 식사를 준비하여 상을 차려 드렸더니 “아니다. 네가 먹어라.” 하신다. 평소 점심을 거르거나 먹어도 빵 한두 조각으로 점심을 때우는 상희인줄 알기 때문에 일부러 상희가 좋아하는 김치비빔밥을 주문하신 것이었다. 상희는 속으로 울었다. 바다같이 넓으신 선생님이 너무나 고마웠다.
하늘 높고 물 맑은 가을이 왔다.
설악산이 아름다운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고 전국 제 1의 관광명소로 붐비는 계절이다. 학교에서는 졸업을 앞두고 수행여행을 간다고 모두 들떠 있었다. 차숙이도 수학여행을 위해서 3년 동안 한푼 두푼 모아 두었던 돈이 있어 설악산에 간다고 한다. 차숙이는 어려울 때 조금씩 도와주는 오빠가 있어 그나마 상희보다는 형편이 나았다. 차숙이 오빠는 중학교도 못 다니고 건달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1년 전부터 동두천 미군부대 근처에 있는 술집에서 종업원자리를 얻어 정착하였다. 동생 차숙이가 졸업을 앞두고 수학여행을 하게 되니 여행비를 조금 보태 주기도 하였다. 상희의 어려운 사정을 너무나 가까이서 보아 온 차숙이는 상희가 수학여행을 함께 가지 못하는 것을 그냥 보기가 미안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모른 척 했다.
단풍도 지고 설악산 대청봉에는 하얀 눈이 쌓였다.
눈물 많고 설음도 많았던 3년이 다 가고 졸업 날이 코앞에 다가 왔다. 그 동안 밀린 수업료와 졸업사진 값, 여기저기서 조금씩 빌려 쓴 돈, 당장에 사야 할 신발 값 등등 꼬리를 물고 덮쳐 오는 생각에 몸을 뒤척거리다가 새벽녘에야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나 급히 준비하여 학교로 갔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방바닥에 뒹굴던 일기장을 사모님이 발견한 것은 그 날 오후였다.
졸업을 앞두고 기쁨과 희망에 찬 상희인 줄 알았는데 고민과 암담한 심정으로 얼룩진 일기장을 보고 인정 많은 사모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늦게 퇴근하신 선생님도 놀랐다.
그 이튿날, 밖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들어 온 상희를 선생님내외가 불러 앉히고 신문지로 싼 두툼한 물건을 상희 앞에 밀어 놓았다. 돈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고민이 있는 줄 몰랐다. 진작 말 할 것이지....”
선생님은 계속하셨다.
“사람은 살다 보면 죽음 직전까지 떨어지기도 하고 천국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도 한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 돈 없다고 서러워할 필요도 없다. 지금 돈이 없으면 내일은 돈이 있다는 증거다. 이 돈은 갚을 생각 말고 마음 놓고 써라. 이 돈을 빚이다 생각하고 갚고 나면 그때부터 나와의 인연은 멀어질 것이다. 빚을 갚는 대신 그 돈을 두 배로 불려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라.”
하늘에서 내려온 성인(聖人)이 따로 없구나. 선생님의 후덕한 모습이 어느 성인보다 못하랴. 성경의 어떤 구절이나 부처님의 어떤 경전에 이보다 절실한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전쟁으로 파괴된 황야에서 쥐꼬리 만 한 군인봉급으로 자신의 생활도 어려운데, 알뜰히 모은 큰돈을 아낌없이 던져 주시는 선생님과 사모님. 상희는 한참동안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울었다.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눈물 속에 사범학교를 졸업한 한상희는 교장선생님이 되어 수 천 명의 제자를 길러 내고 정년 퇴직한지도 십 수 년을 넘긴 할머니가 되었고, 이대현 선생님은 육군 대령으로 제대하여 치과의사로 40여년을 사회에 봉사하시다가 은퇴하여 서울 교외의 한적한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
한상희 교장선생님은 물에 빠지기 직전 어려운 고비마다 징검다리를 놓아 주신 이대현 선생님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늙어 있을지 아찔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선생님이 천수(天壽)를 넘어 다수(茶壽)와 황수(皇壽)를 누리시라고 간절히 기도드린다.
예나 지금이나 대관령은 높은 고개, 길길이 쌓인 눈 속에서 황태는 얼고 녹고,
한상희 교장선생님은 황태덕장을 바라보며 어느 시인의 시를 조용히 읊조리고 있다.
황태덕장
바다를 건져 올려 산위에 펴 놓으니
억울해 울부짖는 백만 대군 아우성이
대관령 쪽빛 하늘에
겨울 내내 퍼진다.
바다는 덕장에서 통째로 얼고 녹고
키 높이 눈에 묻혀 황태로 변했구나.
산 아래 동해바다는
봄을 찾아 나서고.
창 밖에는 함박눈이 더욱 펄펄 내려 지난 세월을 하얗게 덮어 주고 있다.
첫댓글 우리 정말 힘들게 살았지요...
이부회장님 수고많으셨어요 거듭 이봉수님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