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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山 大宗師의 마지막 상좌가 듣고 본 이야기
금옹계전(金翁戒田) |부산 금정산 국청사 주지
1. 어느 날 갑자기
지금 내 나이 쉰다섯 살이다. 코흘리개 철부지가 절에 온 지 어언 43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43년 전, 영문도 모르고 그 어린 나이에 부모 품을 떠났던 것은 이 세상에 현신한 관세음보살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실제로 관세음보살을 만났고, 함께 생활했고, 그 자비를 입었고, 그 은혜 속에서 자랐다. 철없는 나를 그렇게 끔찍하게 보살펴 주셨던 관세음보살은 다름 아닌 우리 종문(宗門)의 중흥조이며, 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승이었고, 범어사의 큰 어른이었던 동산 대종사(東山 大宗師)이시다.
나는 1948년, 무자생으로 태어났다. 경북 포항시 죽도동이 고향인데,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무작정 절로 왔다. 전생에 무슨 인연이었는지 부모 밑에서 한창 자라야 할 어린 나이에 그것도 남도 아닌 친아버지 손에 이끌려 출가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1960년 11월에 절에 왔고, 1962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 날 사미계를 받았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계 받은 뒤, 바로 조실스님 시봉을 시작해서 열반하는 순간까지 모셨다. 말인즉 그렇고, 사실 조실스님을 시봉했다기 보다는 조실스님이 나를 키워준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시봉이라는 말은 언감생심이고 그 당시 철없는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찬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세월이 지나 내 나이가 좀 들어가니 새록새록 조실스님의 은혜가 뼈에 사무치고 잘 모시지 못한 일들이 천추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내 부족을 느낄수록 조실스님의 은혜는 강산같이 무겁기만 하고 나를 바라보던 자애의 눈빛은 한없이 그립기만 하다. 언제나 그 큰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는지……?
내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강제로 출가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 이야기이기에 길게 할 필요는 없고, 다만 나를 출가시켰던 그 아버지도 나중에 출가하여 수행하다가 얼마 전에 입적했다는 사실만 밝힌다. 물론 아버지의 출가를 인도하고 권유한 것은 나였다. 그러니까 우리 부자는 서로 출가를 이끌어 준 사이가 된 셈이다.
2. 아버지의 불연(佛緣)
나는 출가를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버지가 방학이니 절에 가서 숙제하라고 하여 범어사 내원암으로 따라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소풍가듯이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 산문을 들어섰다. 그런데 막상 숙제를 끝냈는데도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통 데리러 오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어린 내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아버지는 사정은 따로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부산 범어사 내원암까지 감언이설로 유인하여 데리고 온 사연은 따로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 고향에서 동장을 했다. 그때만 해도 포항시의 동장은 시골 면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았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최고 높은 분으로 보였다. 그런 아버지가 동사무소 직원들과 함께 근교에 있는 청하 보경사로 봄나들이를 갔고, 그때 어느 노장스님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노장스님이랑 각별한 친분이 맺어졌다.
그 당시 보경사 노장스님은 이미 팔심이 넘은 연세였고, 그로 인해 몸이 아파 병원에 가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시내에 있는 우리 집에 와서 며칠씩 묵으면서 병원치료도 하고 쉬기도 했다. 노장스님이 오면 우리는 좋아라 하고 장난도 치고 머리도 만져보고 무릎에도 앉고 방에서 씨름도 했다. 그때 노장스님께서 아버지한테 “어 아이 크면 꼭 출가시켜라”고 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노장스님은 그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노장스님이 돌아가신 뒤 항상 고민이었다. 노장스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다 결국 집안의 장손인 나를 절로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 당시 우리 사회분위기는 가사 결정권은 전적으로 가장에게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어머니나 가족 누구든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일제 때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력이 있어서 평소에도 가족들이나 동네 사람들 모두 아버지 뜻을 거역하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니 우리 집이나 우리 동네 그 누구도 나의 출가를 말리지도 못하고 그냥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는 딴도리가 없었다고 했다.
범어사 내원암에서 한 달 동안 지내면서 방학 숙제를 다하고 나서 나는 암주인 철관(鐵觀) 스님께 집에 보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철관스님은 도리어 호통을 쳤다.
“야, 이놈아! 절에서 한 달 동안 먹은 밥값은 어떻게 하고 간다는 거야?”
나는 속으로 ‘어이쿠나, 이제 집에 가기는 영 틀렸구나, 큰일났다’ 싶은 생각이 왈칵 들었다. 그렇지만 어린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밤중에 몰래 도망갈 수도 없었다. 집이 어딘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전혀 알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안다고 해도 내 수중에는 차비 한 푼도 없었다.
3. 동자들의 모임
그때 내원암에는 나와 암주인 철관 스님과 공양주, 이렇게 셋이 있었다. 절 식구가 적기도 했지만 내 또래가 없어서 무척 지루하고 심심했다. 나는 어차피 집에도 못 가고 절에서 살아야 한다면 내 또래가 많은 큰절로 가고 싶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암주스님에게 부탁했다.
“스님, 저를 집에 안 보내 주려면 큰절에 보내 주세요.”
“그러면 집에 간다고 안할 테야?”
“예”
“그라문 너는 낮에는 큰절에 가서 있고, 밤에는 울라와 여기서 자라.”
그 다음 날 해가 뜨고 아침공양을 하자마자 나는 큰절로 달려 내려갔다. 그때 만난 동승들이 허현, 초연, 호연, 선교, 원동, 성덕, 덕군, 선혜, 원명 등이었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친구가 되었고 개구쟁이가 되었다.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를 베어 팽이를 만들고, 입고 있던 옷을 쭉 찢어 채를 만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팽이를 쳤다. 그러나 친구가 좋고 노는 것이 좋다 해도 허구한 날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일 년쯤 지나니까 노는 일고 딱 질려 버렸다. 그때부터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범어사 해행당 앞 내원암 올라가는 길에는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어린 나는 그 나무 밑에 앉아서 염불을 외웠다. 하루하루 정해진 양을 다 외워야 하는데 다 외우지 못하는 날은 얻어맞았다. 내원암 암주인 철관스님이 두드려 패니까 어쩔 수 없이 염불 책을 앞에 놓고 목청을 돋우어야만 했다. 사정이 그런데도 불구하고 염불은 잘 외워지질 않았다.
그때만 해도 민간인들이 절에 올 때는 남녀간에 한복을 떡 차려입고 집에서 먹을 것을 장만하여 머리에 이고 나들이 삼아 왔다. 큰절을 다 둘러보고는 으레 내가 앉아있는 큰 은행나무 밑 개울가에서 자리를 폈다. 그때는 사람 만나는 것이 산에서 노루 만나기보다 더 어려웠다. 그만큼 절에 오는 사람이 드물 때였다.
나는 한복 입은 여인들을 보면 금방 어머니 생각이 솟았다. 그들을 바라보고 어머니 생각을 하고, 어머니 생각을 하며 또 그들을 바라보는 사이 나도 몰래 목을 놓고 울었다.
“나 집에 보내 주소! 나 좀 집에 보내 주소!”
그렇게 소리치면서 나는 엉엉 소리내어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울다가도 스님들이 나타나면 언제 울었느냐는 식으로 울음을 뚝 그치고 시치미를 뗐다.
“니 또 울었지?”
“안 울었습니다.”
그렇게 둘러대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얻어맞기 때문에 엉겁결에 저절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그렇지만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스님들이 모르지 않았다. 쥐방울만한 내가 아무리 시치미를 잘 뗀다고 해도 모를 리가 없다. 눈은 벌써 빨갛고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에는 뗏국물이 흥건한데 나이 많은 스님들이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이 많은 스님들은 그런 나를 한 대씩 쥐어박기도 했지만 때로는 정다운 말로 달래주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설움에 겨워 참말로 마음 놓고 엉엉 울어버렸다. 달래던 스님도 울고 나도 울고 심지어 은행나무도 울고 산이나 시내도 같이 우는 것 같았다. 그렇게 허구한 날 은행나무 밑에 앉아서 울기만 했으니 어른 스님들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정말 참 많이 울었다. 우는 것은 원도 한도 없다.
아마 그렇게 한 일 년은 울었을 것이다. 줄곧 울고 나니까, 나중에는 눈물도 안 나고 그냥 목 쉰 소리만 꺼이꺼이 났다. 진짜로 많이 울면 나중에는 눈물이 말라버린다는 사실을 나는 어린 그때 이미 알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집에 보내 달라고 운 것을 보면 내 고집도 어지간했던 것 같다. 한 일 년 동안 줄기차게 울어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안 나는 운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앞에서 말했지만 그때의 심정 같았으면 도망을 갔겠지만 도대체 도망가고 싶어도 어디가 어딘 줄 모르니까 불가능한 일이었다.
4. 아무리 울어도 소용없는 일
아무리 울어도 집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즈음 조실스님을 시봉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조실스님 시봉할 시자를 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다행이 허락이 떨어졌다.
시봉이라기 보다는 사실은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하는 정도였다. 본격적인 조실스님 시봉은 사미계를 받은 뒤부터였으니까, 말하자면 행자 생활을 큰절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무렵은 해가 지면 스님들은 모두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행자로는 나와 흥교, 일미, 호연, 초연, 경암 등이 있어 채공도 하고 공양주도 했다. 다 같은 행자라고 해도 그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조실스님은 대중이 아무리 적어도 꼭 큰방에서 죽비를 쳐가며 발우공양을 했다.
그렇게 살다가 다른 행자들은 다 사미계를 주는데 나만 어리다고 빼놓았다. 그래서 나는 특기를 발휘해 크게 울어버렸다. 사실 어린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의사표현은 그것밖에 다른 것이 없기도 했다.
“나한테 계 안 주면 그만 집에 갈랍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큰소리로 엉엉 울어버렸다. 나무 밑에서 일 년 동안 운 내 실력과 고집을 모두 알고 있던 터였다.
조실스님은 그만 내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때 수계자는 모두 스물네 명이었는데 이미 불명을 다 지어 놓았다. 그러다가 내가 계를 달라고 하도 울어대니까 내 이름난 당일 아침 갑자기 지어야만 했다. 조실스님은 즉석에서 이름을 지었다.
“오늘 계 받는 날이니까, 그만 계전(戒田)이라고 이름해라.”
그래서 내 이름은 계전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계전이다.
그날 계를 받고나서야 나는 정식으로 조실스님 시봉이 되었다. 조실스님께 새로 인사를 드리니까 내게 다짐을 내렸다.
“너는 이제 행자 때하고는 다르니까 염불 외우고 법당에서 하는 의식작법을 익혀야 한다. 이제는 계 받은 수행자야.”
나는 어찌나 좋은지 큰소리로 씩씩하게 화답했다.
“예, 알았습니다.”
돌이켜보아도 그때는 너무 어리고 또 어리석었다. 절에 온 이후로 한 번도 일주문을 나가지 않았다고 투정하니까 조실스님은 더 무서운 말씀을 했다.
“너는 일주문을 한 발자국이라도 넘으면 죽는다. 알았지?”
나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로 내 또래 다른 아이들은 밤 따러 일주문을 넘어가는데 나만 일주문 안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 친구들이 밤을 따올 때까지 기다렸다. 내가 일주문을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어떤 스님이 물었다.
“너는 여기서 뭐하고 앉아 있나?”
“우리 조실스님이 나는 일주문 넘어가면 죽는다고 해서 못나가고 있습니다.”
“그래 맞다. 그 말씀이 맞다. 그러니 절대로 일주문을 넘으면 안된다.”
그러고는 다들 지나갔다. 그러니 더더욱 일주문을 나갈 수가 없었다. 또 여름 한낮은 너무나 더웠다. 일주문 어산교 밖에는 목욕하기 좋은 널따란 웅덩이가 있다. 금정산 양쪽 계곡의 물이 합쳐지는 곳인데 대성암 쪽에서 내려오는 물과 내원암 쪽에서 내려오는 물이 바로 그 웅덩이로 모여들었다. 팬티를 입지 못하고 살던 시절이어서 바지를 홀랑 벗으면 금방 고추가 달랑 나오기 때문에 사람이 없는 그 웅덩이까지 가야 하는데 다른 동자들은 다 가도 나는 갈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한 발만 살짝 들어서 일주문 밖으로 내디뎌 보았다. 그러다 겁이 더럭 나서 얼른 발을 들어올렸다. 다시 심호흡을 한 뒤 마음을 가다듬고 살며시 발을 들어서 내려놓아 보았는데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무척 신기했다. 그 순간 어떤 기쁨이 솟아올랐다. 나는 당장 청풍당으로 올라가 조실스님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다.
“조실스님, 제가 일주문을 넘어가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오늘 한 발만 살짝 들어 디뎌봤는데 괜찮은데요?”
조실스님은 그 천진한 웃음으로 한참이나 빙그레 웃으셨다. 지금도 나를 바라보시면서 웃으시던 그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괜찮아, 인제는 안 죽어.”
“그래요?”
그 뒤부터는 마을에도 내려가 보고 그렇게 가고 싶었던 웅덩이에도 가보고 밤 따러도 갔다.
사실 내가 조실스님을 모신다고 말하기보다는 곁에서 살았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때의 어린 내 깜냥으로는 조실스님을 잘 모셔야 한다는 생각으로 늘 긴장하고 살았다. 그래서 세월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차츰 집 생각도 잊어버렸다. 또 짬짬이 조실스님께 한문도 배우고, 염불도 배우면서 수행자의 기초를 하나하나 몸에 익혀 나갔다. 그리고 조실스님이 드실 반찬을 내 나이 열다섯 살 때부터 만들었다. 전생부터 한 일이어서 그런지 조실스님께서는 내가 만든 반찬은 잘 드셔도 다른 사람이 만든 반찬은 입에 맞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때 시자방과 조실스님 방은 바로 곁에 있어서 조실스님의 잔 기침소리까지 들렸다. 그래서 나는 언제 부르시나 하고 조실스님 방쪽으로 마음을 두었기에 항상 긴장된 상태로 생활했다. 그런 까닭에 잠을 자도 누워서 편안히 자지 못하고 방석을 접어서 배에다 대고 머리를 땅바닥에 박은 채 엎드려 잤다. 덥고 잘 이불도 없었던 시절이니 다른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원주실과 시자실이 나란히 붙어 있어서 나는 더더욱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축농증이 걸려서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4 위법망구, 송암지원, 도피안사
첫댓글 오늘부터 계전스님의 글로 시작합니다. 아직 큰스님에 관한 말씀을 나오지 않습니다만 어린 나이에 출가하신 계전스님의 일화가 재미있네요. 일주문 밖으로 한발짝만 나가면 죽는다는 말씀을 100% 믿는 마음, 그 마음이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기다려 집니다,다음회가~ 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