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독립군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와 6·25남북전쟁(六二五南北戰爭)의 유공자(有功者) 백선엽(白善燁)
◎ 황군(皇軍) 장교, 반민법정(反民法廷)에서 면죄부 받다
만주국군관학교(滿洲國軍官學校)란 만주국이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관학교를 말한다.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령한 뒤 이듬해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의 경우 조선이나 대만처럼 총독을 파견하지 않고 중국인으로 ‘얼굴마담’을 내세웠다. 청(淸) 공종(恭宗) 부의(溥儀)를 집정(執政)이라는 자리에 앉히고는 관동군 총사령관이 실권을 행사했다. 수도는 신경(新京), 연호는 대동(大同)으로 정했다.
만주국이 처음 세운 사관학교는 1932년 옛 수도인 봉천(奉天)에 세운 2년제 중앙육군훈련처(中央陸軍訓鍊處)로 흔히 봉천군관학교(奉天軍官學校)라고 부른다. 관동군은 만주를 점령한 후 군벌 장작림(張作霖)이 설립한 목단(牧丹)의 군관학교를 접수하여 6개월 과정의 장기 장교 훈련 과정을 개설했다. 시험 과목은 수학·물리·화학·지리·역사·작문·일본어 등이었으며, 시험은 각 군관구 사령부 소재지에서 실시하였다.
첫 3개 학년이 수료한 1년반 이후에는 2년제 과정으로 개편되었다. 이는 도쿄에 있는 일반참모학교를 모방한 것으로 기본 훈련 4개월, 정규 수업 14개월, 현장 실습 훈련 6개월의 교육 과정을 두고 있었다. 졸업시험에 합격하면 2~3개월간 상사 계급을 달고 견습사관을 한 후 소위로 임관되었다. 조선인들은 4기생부터 입교할 수 있었는데, 1939년 만계(滿系) 군관 후보 9기, 일계(日系) 군관 후보 11기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봉천군관학교 출신(군수학교 졸업생 포함) 조선인으로는 4기 강재호(姜宰浩)·김응조(金應祚) 등 7명, 5기 정일권(丁一權)·김백일(金白一)·김석범(金錫範)·송석하(宋錫夏) 등 18명, 6기 양국진(楊國鎭)·최남근(崔南近)·박승환(朴承煥) 등 7명, 7기 최철근(崔鐵勤) 1명, 8기 석주암(石主岩) 등 3명, 9기 백선엽(白善燁)·윤수현(尹秀鉉) 등 2명으로 총 39명이다.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으로 대륙 침략을 본격적으로 개시한 일본 육군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장교 양셩을 위해 1939년 만주국에 4년제 정식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정식 명칭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滿洲國陸軍軍官學校)로 흔히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라고도 불린다. 1939년 1월 만계(滿系) 제1기생 90명이 입교하였고 이듬해 일계(日系) 학생 172명이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개교식은 일계 제2기생이 입교한 1940년 6월 20일에 거행됐다. 예과에서는 학과 위주 교육을, 본과에서는 전술 위주의 교육을 실시하엿는데, 교육 내용과 복지 등에서 민족 간에 차별대우가 있었다. 조선인들은 초기에는 만계로 입학했으나 1943년 제5기생부터는 일계로 편입되었는데 졸업 후 일본군 예비역 소위 편입과 동시에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1945년 8월 일제 패망 때까지 만계 7기, 일계 6기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임관은 3기생까지였다. 일계 생도 가운데는 일본인 외에 일본의 식민지 조선과 대만 출신도 포함돼 있었다.
신경군관학교 출신으로 제1기생은 김동하(金東河)·윤태일(尹太逸)·방원철(方圓哲)·이기건(李奇建) 등 13명, 제2기생은 박정희(朴正熙)·이한림(李翰林)·김재풍(金在豊) 등 11명, 제3기생은 최주종·강태민 등 2명, 제5기생은 강문봉(姜文奉)·황택림(黃澤淋) 등 5명, 제6기생은 김동훈·육굉수·김윤근 등 11명, 마지막 기수인 7기생은 김광식(金光植) 등 4명으로 전체 졸업생 수는 48명이었다.
만주국군관학교 출신 인사들 가운데는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북한 지역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창군 초기 군부 내에서 ‘만주파’로 불리며 세력집단을 형성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정일권은 함경도파, 백선엽은 평안도파의 우두머리로 불렸다. 신경 2기 출신의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김동하·박임항·윤태일 등 신경 출신 선·후배들이 이에 적극 가담하여 도왔다. 그러나 나중에 이들은 박정희 정권에 부담으로 작용해 이른바 ‘반혁명사건’으로 몰려 권력에서 제거됐는데 흔히 이를 ‘알래스카 토벌작전’으로 부른다.
한편 만주국군관학교 출신 군인들을 친일파로 볼 것인지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우선 당시 일본군(만주국군 포함) 장교의 위상과 역할, 그리고 만주국군관학교 입교자들의 성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는 군인이 통치 권력의 주체로 활동하던 시기로 일본 정부의 내각이나 조선·대만의 총독 역시 전부 전·현직 군 장성들이엇다. 당시 일본의 군대는 국가 안보를 담당하는 정부 조직 차원을 넘어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최상층의 권력 집단이었다. 따라서 이 같은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장교의 위상은 평시의 ‘직업 군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군관학교는 바로 그런 장교를 양성하는 국가교육기관이었다.
군관학교 입교자 가운데는 다양한 입학 동기를 갖고 있었다. 장교가 되기 위해 뚜렷한 목표의식과 투철한 시국관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중·고등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 진학 차원에서 군관학교를 택해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 또 주변의 권유나 심지어 장교 계급장을 단 제복차림에 반해 군관학교를 입교한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모든 군관학교 입교생들이 ‘황군(皇軍)’이 되기 위해 입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 일본군 장교의 임무가 무엇이었으며, 또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이 어떠했는지도 알고 있었다고 본다면 이들의 일본군 복무 전력을 변호할 명분은 그리 많지 않다. 결국 자원해서 군관학교에 입교했고, 또 졸업 후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전력자라면 그들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는 데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8·15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에서 일본군 장교 출신 인사들을 다루지 못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런 일인데 이는 전적으로 시대적 여건 때문이었다. 건국 초기 군부는 신성불가침 영역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그 당시 일본군 출신 인사들은 ‘창군의 주역’으로 이미 한국군의 상층부를 점령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 설사 대상자가 있었다고 해도 반민특위(反民特委)에서 이들을 체포, 소환해서 조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 출신 인사들은 본의 아니게 반민법정에서 면죄부를 받은 셈이 됐다. 다만 2005년에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항(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서는 일본군 소위 이상의 장교 출신 인사들을 조사 대상자로 규정했다. 물론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라는 단서 조항은 있다. 참고로《친일인명사전》의 경우 하사관까지도 대상으로 하고 있다.
◎ 간도특설대 출신, 반공주의자로 둔갑하다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란 간도 지역 내의 항일유격대(抗日遊擊隊) 토벌을 위해 관동군이 만든 특별부대를 말한다(일제는 간도특설대 외에도 국경감시대·자동차대 등의 특별부대를 운용하였다). 1938년 9월 15일 간도성 명월구(明月溝)에서 공비(共匪) 토벌을 주목적으로 창설된 간도특설대는 간부를 제외하고 사병 대부분이 조선인들로 구성됐다. 간도특설대 출신 송석하는 “명월구 주변에는 한국인이 많이 거주했다. 지형상 아담해서 이곳에 부대를 창설했는데 특별히 군사도시는 아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명월구에서 창설됐다고 해서 간도특설대 출신 OB모임이 ‘명월회’다).
간도성장(間島省長) 이범익(李範益)의 건의로 창설된 이 부대는 1943년 말까지는 간도성 일대에서 항일유격대 토벌을, 1944년 이후에는 열하·하북성에서 중국 팔로군(八路軍)을 상대로 치안숙정(治安肅正) 공작을 벌였다. 이 부대는 창설 당시부터 만주국 치안부 산하 정규군으로 출발하였는데, 본부 아래 부관·의무·군수 등 3개의 실(室)과 보병·기박(機迫) 2개의 연(連)을 설치하고 보병련과 기박련 아래 각각 3개와 2개의 내무반을 두었다. 이후 6관구사령부 예하로 소속이 변경되면서 보병1·2련과 기박련 등 3개 련 체제로 바꾸었다.
간도특설대는 창설 당시 안도현 치안대. 훈춘 국경감시대, 연길현 청년훈련소, 봉천 중앙육군훈련처 등에서 선발한 위관급 이상의 일본군 장교 7명, 조선인 장교·부사관 각 9명 등이 기간 요원으로 출발했다. 1938년 12월 제1기 2백명을 모집한 이래 일제 패망 때까지 총 7기 690명 내외를 모집하였는데, 사병들은 간도성 일대 조선인 청년들을 지원병 형식으로 모집하였다. 간도특설대의 총인원을 두고 1013명에서부터 최대 2100명까지 다양한 주장이 제기된 바 있는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 정규 모집 인원보다는 다소 늘어난 8백~9백여명 정도의 대대급 규모로 추정된다.
한편 간도특설대는 1944년을 기점으로 활동 무대와 내용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1938년 명월구에서 창설될 초기에는 간도성 일대의 항일유격대 토벌과 조선인 동원 및 통제가 주요 활동이었다. 이들은 일본군이나 만주국군과 합동으로 토벌에 나서거나 이를 위한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4년 열하성으로 부대가 이동하면서부터는 열하·하북성 일대의 팔로군을 상대한 교전과 이 지역내 중국 인민을 상대로 한 ‘치안숙정’이 주요 업무가 되었다. 이로 인해 조직에도 변화가 생겼다. 1944년 가을 간도특설대는 관공군과 북지나방면군이 만주국군 중 일부를 임시 파견부대로 조직한 ‘철석부대(鐵石部隊)’의 직할로 편성됐다.
철석부대는 만주국군 등으로 구성된 혼성 부대였으나 작전권은 일본군이 갖고 있었으며, 자동차대 등 여러 직할부대를 두고 있었다. 간도특설대가 이 부대의 직할부대가 된 배경은 대략 두 가지로 추정된다. 첫째는 이 부대가 처음부터 독립적 부대로 조직돼 독립적인 활동을 해온 점인데, 그럴 경우 부대 활동 성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둘째는 1944년 열하성으로 이동하면서 부대 내에 정보반을 조직했는데, 이 정보반을 활용할 경우 철석부대의 정보 업무 효율을 높일 것으로 기대한 점이다. 간도특설대 정보반은 팔로군과 지하공작원 포로에 대한 고문과 변절자를 이용한 정보 수집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는데 주임 김석범, 부주임 홍청파는 모두 조선인이었다.
정보반원들은 첩보 활동을 핑계로 마을에 들어가 민간인들에게 잔혹한 탄압도 수차례 자행했는데, 1945년 8월 일제 패망과 함께 이 부대는 해산되었다. 마지막 대장 후지이 마사요시[藤井正義] 대좌(大佐)는 당시 2개 련 3백여명의 부대원을 인솔하고 기차로 금주(錦州)로 나와 8월 26일 부대 해산식을 가졌다.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간도특설대 출신임을 숨기고 지냈다. 그러나 남한으로 돌아온 자들은 자신의 전력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반공주의자로 둔갑해 자신들의 간도특설대 경력을 미화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간도특설대 정보반 주임을 지냈고, 이들 가운데 선임자 격인 김석범이 그런 자다.
“우리들 만주군인 출신들은 일제 압제 하에서 조국땅을 떠나 유서 깊은 만주에서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여 무예를 연마한 혈맹의 동지들이다. 우리는 타향인 만주에서 철석같은 정신과 신념 밑에서 철석같은 훈련을 거듭하여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건국 40유여년이 된 오늘날 50여 명의 장성급과 다수의 영관급 고급장교가 배출되어 조국의 독립과 자유수호에 공헌하였다.”
김석범은《만주국군지》란 책을 통해 자신의 만주국 근무 전력을 두고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한 행위”라며 가증스런 궤변을 늘어놓았다. 특히 그는 말기에 철석부대에 소속됐던 사실을 들어 이 짧은 문장에서도 두 번씩이나 ‘철석’을 언급하였다. 그의 말대로 만주국군 출신들은 해방 후 한국군에서 50여 명의 장성과 수십 명의 고급장교를 배출했다. 비단 군대뿐만 아니라 대통령·국무총리·국회의장 등도 배출하면서 한국 권력층의 상층부를 한동안 점령했다. 이들은 게릴라작전 경험을 바탕으로 4·3제주도민항쟁(四三濟州道民抗爭) 등에서 토벌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해 무고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에 펴낸 보고서(3-2)에 실린 간도특설대 출신 조선인 장교들의 명단과 당시 직책 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김용헌(특설대 제1기 지원병, 보병 2련 반장, 소위)
◎ 전쟁영웅으로 미화된 친일파 백선엽
지난해 6·25남북전쟁 60주년을 맞아 KBS는 2011년 6월 24일~25일 이틀간에 걸쳐 이른바 ‘백선엽 장군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항일 독립운동가 추모 기념사업회를 비롯한 시민단체에서는 방송이 나가기 전부터 이 특집방송 프로그램이 ‘백선엽 미화방송’이 될 우려가 있다며 방송 제작 중단을 촉구하였다. 특히 백선엽의 친일행적 등은 제대로 다루지 않고 그를 전쟁영웅으로 만들 가능성에 대해 경고를 한 셈이다. 이에 대해 KBS 측은 백선엽의 허물조차도 가감없이 다루겠다고 약속했다.
백선엽(1920년~ 생존)은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택하여 1940년 만주국군 봉천군관학교 제9기로 입학하여 이듬해 12월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동부 파오칭[寶淸]에 있던 보병 제28단에서 견습사관을 거쳐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 하였다. 그 후 약 1년간 자무스[佳木斯]에서 신병훈련대 소대장으로 근무한 다음 1943년 2월에 만주 간도성 명월구에 있던 항일무장 독립세력을 탄압하던 간도특설대로 전임되어 해방될 때까지 항일무장세력에 대한 탄압활동과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였다.
백선엽은 1942년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이래 1945년 일제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만주국군 장교로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중에서도 1943년 2월부터 만주지역 항일무장 독립세력을 무력으로 탄압하던 간도특설대에서 이들에 대한 탄압활동을 전개하였고, 또 1944년부터 1945년에 걸쳐 간도특설대원으로서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의 일환으로 열하성으로 들어가 기동(冀東)지역에서 중국군 팔로군을 ‘토벌’하는 작전에 종사하였다. 또 1945년 봄부터 일제의 패전 당시까지 연길지역 국경수비 임무에 종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백선엽의 이러한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백선엽의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10호에서 규정하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
- 출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7권 835페이지 ‘판단’ 부분
“…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主義主張)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다고 해서 독립이 빨라졌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위 내용으로 보면 백선엽 자신도 당시 간도특설대의 군사작전이 반민족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는 여태 이런 점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한 적이 없다. 오히려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는 이 책에서 “간도특설대는 만주국군 가운데 사격·총검술·검도대회에서 매번 우승하는 등 정예부대였으며, 군기도 엄정(嚴正)했다”고 밝혔다. ▶정운현 著 김이수 纂『친일파는 살아있다』책으로 보는 세상 版(2011년 發) |
첫댓글 일반적인 일본 군인 이라고 해도 친일 인사에 듣재 되지 않지만 간도특설대는 일반 병 이라고 해도 친일 인사에 기록 됩니다 즉 같은 민족으로 독립군 에게 충 겨눈 부대 이기 때문에
잘 보았습니다.
백선엽.백인엽 형제가 세운 대학이 인하대라 합니다~
이처럼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 우후죽순 설립하거나 이미 세워진 학교를 자기것으로 돌려놓은게 사립학교 태반이니 친일파=사립학교=사립대초대총장 또는 재단이사장 등식이 됩니다!
박정희때 공교육을 키우는대신 친일파들에게 사립학교 설립을 마구잡이로 허가한 결과 오늘날 국민들의 교육비 부담으로 돌아온 거죠!!!
인하대는 대한항공 조중훈이 세운 학교이고... 백선엽 인엽 형제가 설립한 선인학원은 예전에 인천체전으로 불린 지금의 인천대학교입니다.
악플전문가님~
제가 착각했는데 잘 알려주셨네요^^
책 이름이 와 닿는군요."친일파는 살아있다"
친일파는 백년이 지나도 친일파입니다 .
그 죄상은 천년이 지나도 역사에 남아서 후대에 전해야 합니다 .
나라에 친일파가 단 한명도 없었다면 일본은 결코 36년이란 세월동안 우리나라에 머무르지 못했을 겁니다 .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훨씬 치명적인 해악을 끼칩니다 .
순전히 여담입니다.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가 왜 일제36년일까요? 날짜로 따지면 35년에서도 14일이 빠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