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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2005. 6.21 (490호) | ||
탈북자 지원단체가 보낸 e메일을 통해 남재중(60) 박사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접한 것은 6월8일이었다. ‘6월6일 남재중 박사가 미국 자택에서 별세하셨습니다.’ 남재중 박사는 고려대 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 시민권을 얻어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개업한 이비인후과 의사다. 때문에 ‘닥터 남’으로 불렸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는 의원 일은 등한히 한 채 ‘이지스 재단’을 만들어 북한 인권 운동에 전념했다. 수시로 한국에 건너와 탈북자와 탈북자 지원단체 관계자들을 만나고, 이들의 사례를 미국에 전달하는 데 힘썼다.
한국에 와서는 통일 문제를 담당하는 언론사의 기자와 주한 외국 언론사 특파원을 만났고, 미국에 가서는 미 의회 관계자들과 한국 특파원들을 만났다. 그런 탓에 그는 북한 문제 전문가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지만, 항상 숨어 있으려 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수많은 언론사가 그의 사진 한 장 갖고 있지 못할 정도로 그는 철저히 음지에서 움직였다.
그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성장한 ‘남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개업 의사로서 벌어놓은 재산을 까먹어가면서 탈북자를 기자에게 소개해 북한 인권문제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 주력해왔다.
지난해에 그는 독극물 생체실험을 목격한 탈북자 김모 씨를 찾아내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 영국의 BBC 방송을 통해 세계에 알림으로써 북한 정권의 인권침해를 고발했다. 이어 김 씨를 미국 의회에 출석시켜 북한이 생체실험한 사실을 증언케 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국가정보원이 교묘한 방법으로 김 씨를 회유함으로써 그의 노력은 무위로 끝났다(주간동아 439, 440호 참조).
‘북한 자유화의 날’ 행사 주도
그가 탄생시킨 최대의 걸작은 2004년 10월 미국 상·하원에서 통과된 북한 인권법안이다. 미 의회가 이 법안을 제정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모종의 ‘공작’을 했다. 북한 실상을 제대로 알려야 미국 의회가 북한 인권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고 판단해 북한 문제에 정통한 일단의 미국인들과 함께 ‘북한 자유화의 날’ 행사를 준비한 것. 이 행사를 위한 포스터는 돈이 상대적으로 적게 드는 한국에서 만들었는데, 조선일보 디자인개발팀의 조의환 부장이 도안을 했다. 그는 인쇄소에서 막 찍혀 나온 포스터를 들고 가장 먼저 기자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이제 됐어. 이것으로 미국을 움직일 거야. 북한 인권법안이 만들어지면 전쟁을 하지 않고도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하며 흐뭇해했다 |
이 행사를 치른 뒤 그는 미국 의회에서 논의되는 북한 인권법안 초안을 들고 기자를 찾아왔다. 덕분에 기자는 누구보다도 먼저 북한 인권법안의 내용을 국내에 소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북한 내 반체제 단체인 ‘자유청년동지회’ 간부를 미국으로 망명시키는 일을 하다 별세했다.
남 박사는 유복한 집안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검사 출신 변호사로 대전 지역에서 활동한 유지였고, 그의 친형은 대전일보 사주다. 그는 일찌감치 미국으로 유학 가 정착했기 때문에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편안한 미국 생활을 마다하고 한국을 오가며 탈북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개중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많았다. 이러한 역경이 그를 지치게 만들었는지 그는 항상 피곤해 보였다. 결국 이러한 과로가 그를 이 세상에서 거둬간 것일까. 자신을 버리며 통일을 위해 뛰어다녔던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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