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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 1942년)
이런 상황에서 야마토는 지휘함 역할을 한다는 핑계로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는 바람에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지휘부가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지만 해전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지휘부에게는 가장 크고 튼튼한 전함이 기함으로 주어진다. 미군의 윌리엄 홀시 역시 아이오와급 전함 미주리를 기함으로 주력 항공모함 전단과 함께 행동했다. 27노트인 야마토는 항공모함과 동행하기엔 느리다고 생각했다면 후일의 오자와 지사부로처럼 항모를 기함으로 삼거나 혹은 공고급에라도 기함을 옮겨야 했다. 야마모토가 전함 무용론을 적극적으로 설파하던 항공주병론자였기에 이런 핑계의 설득력은 더욱 떨어진다.
후일의 과달카날 전역 같은 일회성 전투로 끝나지 않는 광범위 전역을 통제해야 하는 사례라면 상황이 또 달라지지만, 전술적 대규모 함대결전에 가까운 미드웨이에서는 지휘통신체계의 유지가 더 중요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제1항공함대와 동행할 필요가 있었다. 미군과 같은 효율적인 지휘체계가 도입되지 않은 일본군 입장에서는 함대결전급 대규모 전투를 현장에서 직접 상황을 확인 및 대응하며 지휘해야 하는 직책이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다. 정 지휘부가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했다면, 아예 니미츠의 태평양함대 사령부처럼 연합함대 수뇌부를 안전한 지상기지로 옮기고, 현장 지휘관인 나구모에게 플레처나 스프루언스처럼 충분한 재량권을 보장해 주고 야마토를 비롯한 전투함들은 항공모함과 함께 일선에 투입시켜야 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일본군은 이를 수행할 만한 지휘체계의 능력도 부족했고 그럴 의지도 부족했다.
문제는 그 뿐 아니다. 항공모함 기동 부대를 전함부대의 앞으로 내세운 것도 문제가 된다. 항공모함의 중요성이 대두된 후에도 존재한 전함 유효론의 핵심 논지가 항공모함을 전함이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었을 정도였고, 실제로 전함은 상대의 보조함들의 기동을 방해하는 막강한 존재감을 유지했기에 항모 시대가 열린 후에도 상당히 오랬동안 중요한 위치를 유지했다. 전함이 괜히 바다의 움직이는 요새라 불린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국가의 존망을 건 중대한 작전에서 당연히 전함이 움직여야 했는대, 그 전함을 그냥 뒤에 처박아두고 허약하다고 비웃음 사던 항공모함을 냅다 전면에 내던진 것이다.
또한, 귀중한 주력함을 어이없게 날려버릴 수 있다는 것을 첫 대전쟁에서부터 입증해온 잠수함에 대한 대책도 전무하다시피했다. 당시 일본 해군의 어설픈 대잠 역량을 둘째치더라도, 애초에 고작 12척의 구축함으로 주력함 4척을 보호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상설이다. 전함의 부재 또한 잠수함 위협을 가중 시키는대, 전함에 대잠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함이 존재하면 그 전함 때문에 상대의 함대가 잠수함의 침투를 지원하기 곤란해지며, 전함이 가진 압도적 존재감이 잠수함의 공격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해군이 이렇게까지 느슨한 자세로 싸움에 임한 것은 진주만 기습 이후로 계속된 일방적인 전투를 거치면서 미군이 잔뜩 쫄아 있을 거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야마모토는 미드웨이가 점령되고 나서야 미 해군이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일견 어이없어 보이는 부대 배치 또한 이를 감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를 비롯한 일본군의 그 누구도 미군이 쫄기는 커녕 악에 받혀서 '진주만을 기억하라! 12월 7일을 기억하라!(Remember Pearl Harbor! Remember December 7th!)'는 구호 아래 복수심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는 걸 몰랐으며, 그래서 현재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승리병이라고 일컫는다. 당시 일본군의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자만심에 대한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안일함의 또다른 예로, 진주만 공습 당시 제1, 제2항공전대와 함께 제1항공함대를 구성했던 제5항공전대(쇼카쿠, 즈이카쿠)가 이 작전에서 빠진 것을 들 수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들 역시 제1항공함대 소속으로 MI작전에 참가했어야 하나, 작전 입안 중 MO작전에 2척의 항공모함을 지원하기로 함에 따라 둘만 먼저 전장에 나가게 된 것이다. MO작전은 산호해 해전으로 이어졌고, 이 전투에서 항모들이 저마다 피해를 입고 전열에서 이탈하게 되면서 결국 미드웨이 침공 불참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즈이카쿠의 경우 쇼카쿠와 달리 배 자체의 피해가 경미해, 함의 수리를 서두르고 큰 피해를 입은 기존 항공대 대신 다른 항공대를 배속시키면 충분히 작전 투입이 가능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과 그에 배속된 항공대를 쇼군과 다이묘, 전함과 주포마냥 일체화된 존재로 취급했기 때문에 항공대가 항공모함을 옮겨다니며 작전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이러한 경직된 사상 덕에 여차하면 투입이 가능했던, 일본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항공모함 1척이 가장 중요한 전투의 순간에 발이 묶여 있었다.
설령 이러한 사상이나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야마모토 제독을 비롯한 군 상층부에서 전력을 최대한 끌어모으려는 생각이 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즈이카쿠를 완편 상태로 참가시켰을 것이지만, 야마모토 제독을 비롯한 군 상층부는 즈이카쿠를 미드웨이 침공에 참가시키려는 그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심각한 피해를 입고 빈사 상태로 돌아온 요크타운을 긴급 수리해서 억지로 참전시켰던 미 해군의 행보와 매우 대조되는 장면이다. 또한, 그때까지 일본 해군이 진주만 공습을 비롯한 서전에서 거둔 화려한 전과와 산호해 해전의 결과로 인한 MO작전의 실패가 하나같이 항공전력의 숫적 우세와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행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끝나지 않는데, 제1항공함대를 이끌고 있는 나구모 주이치 제독은 원래 항공전과는 전혀 무관한 수뢰전 전문가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나구모 주이치는 함대파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조약파이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충돌도 잦았다. 쉽게 말해 전문 분야도 아닌데다 상부와 알력을 빚고 있는 사람에게 일선 지휘를 맡겼다. 그나마, 나구모 본인도 항공전에 대한 자신의 식견 부족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공전과 관련된 야마모토의 명령에 대체로 순응하고 있었고, 일선에서 이뤄지는 항공작전에 대해서는 참모들의 의견을 거의 그대로 따라갔으므로 연합군이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전쟁 초기에 대전과를 거둘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참모진의 능력이 중요해지지만, 나구모 옆에 있는 참모장 쿠사카 류노스케도 항공작전을 수립하고 진행하는데엔 능력이 모자랐던터라 실질적인 항공작전의 수립과 실행은 항공참모였던 겐다 미노루(당시 중좌)의 몫이었다. 그러나, 겐다는 당시 일개 중좌(중령)에 불과했기에 경험과 전체 전황을 조망할 식견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후대에서는 항공병과에 조예가 깊고 1항공전대를 육성한 경험이 있던 오자와 지사부로나, 야마구치 다몬이 어떤 형태로든 기동함대 전체 지휘를 맡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곤 한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 당시 오자와는 기수가 나구모와 하나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남견함대 사령장관으로 부임한지 수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고, 야마구치 역시 연공서열에서 밀려 있었다. 이들을 중장급 자리인 기동함대 사령관에 앉히는거나 참모장으로 보내는 것은 연공서열을 중시하던 당시 일본 해군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간기부터 대표적인 항공주병론자이자 명목상 실전부대를 총지휘하는 직책인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라면 진주만이나 미드웨이처럼 자신의 목을 걸고 반 공갈로 강하게 추진한 작전에는 자신이 직접 참가해서 나구모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도 있었겠지만, 야마모토는 상술한 대로 보신주의에 젖어 전쟁 기간 중에는 자신이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전함에 틀어박혀 안전한 후방에서 턱짓으로 지시를 내릴 뿐이었다.
이렇게 일본 해군 안에는 불안 요소가 산재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를 제대로 인식한 사람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월 25일부터 각 함대들의 출항이 시작되며 MI작전의 막이 올랐다.
그러나 5월 말, 6월 초에 이르러 위에서 언급된 미군의 부산하고도 수상한 움직임(비록 항공모함을 직접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이 계속 포착되면서, 미군이 일본군의 의도를 알고 있다는 정보가 야마모토에게 전달되었다. 앞서 가는 나구모 제독 역시 이 정보를 알고 있었으나, 야마모토와 나구모 모두 이 정보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해당 정보를 접수한 본대에서 제1항공함대와 연락하려다가 "나구모 제독도 통신을 들었을 것이니 굳이 본대의 위치를 노출시킬 필요는 없다."는 진언을 받아들여 제1항공함대에 정보를 보내지 않았는데,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나구모 제독은 기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무선 봉쇄 덕분에 이 정보를 듣지 못했으며 결국 이것이 커다란 패착이 됐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 결과로는 나구모 제독도 미군의 움직임을 이미 알았다는 것이 정론이다.
이런 어이없는 행동의 원인은, 미리 짜놓은 계획이 헝클어지는 것을 원치 않은 데다 미드웨이와 하와이 사이에 미리 배치해 둔 잠수함들이 미 항공모함의 접근을 알려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 잠수함들은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은 또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이 잠수함 부대의 지휘관은 미드웨이 공격 작전에 별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가 뒤늦게 잠수함 부대를 전개하는데, 제때 전개했어도 이미 늦었다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전개가 늦었다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일본군의 실책은 충분한 전력 우세를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 미 해군은 진주만에서 그냥 증발 해버렸고, 남은건 고작 중순양함 몇척과 소수의 구축함, 그리고 항모 3척 뿐이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 해군은 엄연히 주력함인 중순양함이 7척이 있었던 반면, 일본 해군은 고작 순양전함 2척과 중순양함 2척을 동원하여, 주력함 수에서 오히려 열세였다. 게다가 미드웨이의 미군 기지에서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는 육상 발진 항공기들 덕분에 항공기 수에서도 열세였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만 하루전인 1942년 6월 3일 오전 8시, 일본은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에 공습을 감행했다. 그리고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대한 상륙 작전도 병행됐는데, 미군의 저항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방에 파견된 제8기동부대의 사령관 테오볼드 소장이 "일본 놈들이 알래스카(...)를 공격할 것이다."라면서 부대를 엉뚱한 곳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양 측 모두 별다른 손해 없이 공습은 마무리되었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미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일본군이 자신들이 예측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 만족하고, 곧 미드웨이에 일본 함대가 출현할 것이므로 정찰을 강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6월 3일 오전 9시, 미드웨이에서 파견된 PBY 카탈리나 정찰기가 미드웨이에서 930km 떨어져 있는 해상에 있는 일본 제 2 수뢰전대를 발견했다. 이로서 미군은 일본 함대의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은 미드웨이 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음날 오전까지도 미군 함대의 위치는 물론, 미군 함대가 미드웨이 주변에 존재하는지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며, 다음날 아침에야 미 함대의 존재와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정보전에서의 성패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패를 가른 시발점이 되었다.
정찰기를 통해 일본 함대의 위치를 파악한 미군은 곧장 B-17 폭격기를 출격시켰다. 오후 4시경 일본 선단에 도달한 B-17 폭격기들이 일본 함대를 폭격하였으나 수평폭격의 한계로 인해 실패했다. 이어서 미군은 어뢰를 탑재한 PBY 카탈리나 비행정을 동원하여 새벽 1시경 다나카 라이조 제독의 수송 함대에 뇌격을 가해 수송선과 유조선에 피해를 주었다. 하지만 속도가 떨어지는 수준의 피해였으며, 작전 참여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6월 3일 오전 9시, 미드웨이 정찰기가 일본 함대를 처음 발견했을 때, 나구모 제독은 정찰기와의 접촉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상황으로 여기고 그냥 보고만 올리고 말았으며 다음날 새벽에 미드웨이를 공격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정찰을 통해 일본 함대의 위치를 파악한 미군 함대 지휘부는 일본 함대와의 교전 예상 지점으로 함대를 이동시켰고, 다음날 있을 대규모 교전을 대비하여 승조원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시켰다.
6월 3일 하루 종일 미군이 4일 아침께 있을 해상전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일본 해군 수뇌부는 미군 함대의 존재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날 새벽 있을 미드웨이섬 공격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고, 미 함대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드웨이 기지 공방전
내가 있던 진지 옆으로 폭탄이 떨어졌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나와 함께 있던 해병대 대공포병들은 18~22살의 청년들이었다.
그렇게 침착한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난 깨달았다. 승리가 우리의 것임을.
- 영화감독 존 포드
6월 4일 새벽 3시를 기점으로 일본 해군과 미드웨이섬 방어군은 각각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새벽 4시, 미드웨이에서 전투 정찰 임무를 띤 미군 카탈리나 비행정과 F4F 와일드캣들이 이륙하여 일본 함대 수색에 나섰다.
새벽 4시 30분 드디어 일본 함대에서 제로센, 급강하 폭격기, 뇌격기 등으로 구성된 항공대가 이륙하여 미드웨이섬으로 출동했다. 이때 나구모 제독은 노련한 조종사들을 후위로 뺀 다음, 경험이 적은 조종사들을 1파로 보냈다. 항공대 지휘관은 토모나가 조이치 대위였다. 원래 항공대 지휘관은 후치다 미츠오 중좌였으나 맹장염 수술을 받았기에 항공기 탑승이 불가능했고, 그 대신 자신이 신임하는 부하인 토모나가 조이치 대위를 항공대 지휘관으로 추천했다.
한편 나구모 제독은 미국 항공모함이 출현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정찰기들을 발진시켰으며, 일부 정찰기는 함선 공격용 철갑탄을 무장하여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문제는 20기나 정찰에 투입한 미군과 달리 딸랑 8기만 날렸다는 점이다. 그 넓은 해역에서 (상대적으로) 쬐끄만한 미군 항공모함을 발견하기 위한 정찰기 숫자로는 매우 부족한 수준이었다. 한편,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에서 발진시키기로 되어 있던 정찰기가 캐터펄트 고장으로 발진이 30분 늦어졌고, 이게 나중에 일본군이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혀 왔었다.
새벽 5시 30분, 초계에 나선 미군 정찰기가 미드웨이로 날아가는 일본 해군 항공대를 발견했고, 그 25분 후에는 다른 정찰기가 일본 제1항공함대 제2항공전대(소류, 히류가 포함된)를 발견하여 보고를 올렸다. 이 당시 미국의 항모기동부대는 제1항공함대의 동북쪽 320km 지점에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총지휘관이던 플레처 제독은 일본의 항공모함이 다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꿔서 자신이 이끄는 CV-5 요크타운은 나머지 2척의 항공모함에 대한 예비대로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CV-6 엔터프라이즈와 CV-8 호넷을 동원하여 남서쪽의 일본 함대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스프루언스 제독은 약 250km 거리까지 접근한 후에 공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함대를 이동시켰다.
6시가 되자 미드웨이의 레이더에서도 일본군 대편대가 탐지되었고, 미드웨이의 모든 폭격기, 공격기 전력들은 일본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곧바로 출격했다. 15분 후 일본군 편대가 미드웨이 인근 상공에 모습을 드러내자 미리 상공에서 대기중이던 F2A 버팔로와 와일드캣들이 기습적인 공격을 가하여 히류 함상 공격기 2기와 소류 97식 함상 공격기 1기를 격추시켰지만 곧이어 제로센들이 반격에 나섰다. 결국, 미드웨이의 전투기 부대는 편대장 팍스 소령을 비롯한 많은 조종사들이 희생당했고 살아남은 조종사들의 전투기도 엄청난 손상을 입는 등 완전히 박살났다.
별다른 손실을 입지 않은 토모나가 대위의 부대는 미드웨이 섬을 폭격했고 수도관, 디젤유 저장소, 중대 본부, 수상기 격납고, 탄약고 등이 완전히 박살났다. 하지만 활주로는 의외로 멀쩡했고 이미 수비대 전원은 콘크리트 방공호로 대피한 상태였다. 미군 수비대의 피해는 전사 11명, 중경상 18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일본 공격대의 피해는 이미 섬에 떡칠해 놓은 대공포 탓에 상당히 심했다. 히류의 경우 호위 전투기 9기 모두 귀환 했으나 2기는 재투입 불가 수준으로 손상되었고 함공대의 경우 2기 미군 전투기에 의해 격추, 1기 대공포에 의해 격추, 1대 실종, 5기 재투입 불가 수준 손상을 입었다. 소류는 1대가 대공포에 의해 격추 되었고 1기 중파, 함상공격기 4기 재투입 불가 수준 손상을 입었다. 아카기는 대공포에 제로센 1기가 격추되었고 3기의 제로센이 전손 판정을 받았으며 5기의 함상 폭격기 역시 전손 판정을 받았다. 카가의 경우 1대의 제로센과 함폭기 1대가 대공포에 의해 격추되었다. 미드웨이 공습에서 일본군은 총 11기 손실, 14기 중파, 29기 손상을 입었고 20명의 조종사가 사망 실종하며 22.4%의 손실을 입었다.
7시를 전후로 마무리된 공격의 성과를 관찰한 결과 미군의 저항이 심해 2차 공격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토모나가 대위는 함대에 2차 공격이 필요하다고 타전했다. 나구모를 비롯한 일본 함대 수뇌부도 70기의 단발 폭격기/공격기로 한 번에 미드웨이의 지상 기지를 무력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았기에 후속 공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기습을 절대 모를것이라고 생각한 나구모는 기존에 대함용 어뢰/철갑탄으로 무장된 폭격기들의 무장을 지상 공격용 폭탄으로 바꾸라고 명령하는데(이렇게 재무장 하는것은 타노스마냥 손가락 튕기면 되는게 아니라 90~12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미군의 함대를 발견했다는 정찰기의 보고를 들은 나구모는 다시 무장을 대함용으로 바꾸라고 지시하였고, 이 결과 일본 항공모함의 격납고 상황은 개판이 되어버린다(폭탄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하고 그냥 구석에 밀어놓고 재무장을 하는 둥 난리였다고 한다).
5.2.2. 미군 기지 비행대의 반격과 잠수함 노틸러스의 공격
비슷한 시간 미드웨이에서 발진한 미군 공격대들이 7시 5분 일본 함대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랭던 파벨링 대위가 이끄는 VT-8(제 8뇌격비행대)소속 TBF 어벤저 6대와 제임스 콜린스 대위가 이끄는 육군 항공대 소속 B-26 4대로 모두 뇌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우연히 동시에 일본 함대 상공에 만났기 때문에 연계작전이 불가능했던데다, 어뢰의 신뢰성도 떨어졌기 때문에 피해만 입은채 공격에 실패한다.
4대의 B-26중 2대가 격추당했고, 제임스 무리 중위의 기체가 일본 전투기에게 쫓기다가 아카기 함교에 들이박을 뻔 했다. 다만 들이박기 직전 무리 중위가 급히 기수를 들어올려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마터면 나구모 주이치를 비롯한 일본군 수뇌부들이 전멸할 뻔했던 이 사건이 이후 나구모의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어밴저의 상황은 더욱 나빠서 파벨링 대위를 비롯한 6기중 5기가 격추 되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앨버트 어니스트 소위의 기체도 피격되어 18살의 후방사수 바실 린치가 전사했으며, 당시 17살이었던 무전수 해리 페리어는 기절했다.
한참 B-26과 VT-8의 공격이 진행되고 있던 7시 10분 월리엄 H. 브로크먼 주니어 소령이 이끄는 나왈급 잠수함 USS 노틸러스는 북서쪽 수평선 너머 폭연과 대공포화를 발견하고 일본군 기동함대로 접근하기 시작했고 8시경 일본군 기동부대의 한복판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이 잠수함 하나로 인해 일본군은 큰 손해를 보게 된다.
노틸러스가 기동함대 한복판으로 접근하고 있던 7시 55분경 로프톤 헨더슨 소령이 이끄는 SBD 돈틀리스 16대가 일본 제1항공함대 상공에 도착하였다. 헨더슨 소령은 비행대를 8대씩 2개의 비행중대로 나누어 각각 히류와 소류를 공격하기도록 했고 엘머 글리던 대위에게 1개의 비행중대의 지휘를 맡겼다. 하지만 일본 함대 상공을 초계하던 제로센에 걸려서 6대의 돈틀리스가 공격을 시도하기도 전에 격추당하고 말았다. 헨더슨 소령도 제로센에 격추당해 전사했다. 이때 헨더슨은 이왕 죽는 거 동귀어진의 심정으로 카가에 충돌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해수면에 추락했다. 이후 글리던 대위가 지휘권을 이어받아 남은 10대의 돈틀리스를 이끌고 히류를 공격했다. 그러나 돈틀리스가 떨어뜨린 폭탄은 모두 히류에서 빗나갔다. 히류 또한 대공포와 대공기관포로 돈틀리스를 공격했지만 한대도 격추시키지 못했다. 폭격을 마친 돈틀리스는 철수 도중 제로센에게 두대 더 격추당하여 8기가 미드웨이로 귀환했으나 이중에서 6기는 다시 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파된 상황이었다.
핸더슨 소령의 공격이 한참 진행 중이던 8시 10분, 17분 노틸러스는 기동함대의 선두 부대에 공격을 가하기 위해 자세를 잡던 도중 나가라에 의해 폭뢰공격을 받고 잠항을 했다. 25분 노틸러스는 기리시마를 향해 어뢰2발을 발사했으나 한발은 불발되었고 한발은 키리사마가 여유롭게 피하는데 성공했고 30분 다시 폭뢰공격을 받아 잠항으로 서쪽 외곽으로 피하였다.
동시에 헨더슨 소령의 부대에 이어서 8시 30분경에 벤자민 노리스 소령이 지휘하는 구형 SB2U 빈디케이터 급강하 폭격기 11기가 도착했으나 이들 역시 피해만 입은 채 공격에 실패했다. 핸더슨 공격대와 빈디케이터들이 박살나던 동안 이스턴 섬에서 발진한 윌터 스위니 대위가 이끄는 B-17 폭격기 15기가 수평 폭격을 가했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인해 실패했다. 종합하자면 첫 공격은 성과가 없었다. 노리스 소령이 지휘하는 SB2U 빈디케이터 편대는 2기가 격추되고 1기가 불시착했으며 스위니 대위가 지휘하는 B-17의 피해는 없었다. 공격이 한참 진행중이던 9시 서쪽으로 잠항하여 도주했던 노틸러스가 다시 접근 했고 대공포를 쏘아대는 소류를 발견하고 접근하였다. 9시 10분 마지막 어뢰를 소류에 조준하던 도중 호위역할을 맡고 있던 나가라와 아라시가 접근하여 폭뢰 공격으로 무산시켰고 계속해서 공격해 오는 이 잠수함을 잡기 위해서 아라시 함장 와타나배 야스마사 중좌는 노틸러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시간 가까이 3차례나 공격을 가해온 이 노틸러스호를 추격하기로한 이 결정은 10시 25분 단 5분만에 전세를 뒤집는 대공격을 불러오게 된다.
8시부터 9시 까지 한시간 넘게 진행된 미군의 공격으로 일본 함대는 대혼란에 빠지는데, 미군 조종사들의 공격에 맞서 일사불란한 회피기동을 할 때마다 함상 작업이 중지됐으므로 안 그래도 모자란 시간을 더 잡아먹는 판에, 함대 진형에 끼어들어 어뢰공격을 감행한 미군 잠수함 노틸러스를 잡으러 다니느라 항공모함, 호위함정 할 것 없이 함대 진형이 죄다 흐트러지고 말았다. 거기에다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의 공격과 이들을 막으려는 제로센들의 요격이 진행되는 와중에 1차 공격대가 함대 상공에 도착해서 착함을 기다리는 등 바다와 하늘 모두 그야말로 개판에다 난장판이었다. 미군처럼 무전기와 레이더가 충실하고 별도의 통제 시설까지 건실히 갖췄다면 아군 함정들과 항공기들을 적절히 통제하며 이런 상황에 대해 대응 가능했을지도 몰랐지만, 당시 일본 함대의 통제 수단은 수신호, 발광 신호, 조명탄, 연막이 전부였고 통제 시설이라곤 일본 항모 특유의 좁아터진 함교 뿐이었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은 제1기동함대 수뇌부들의 상황 파악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하나 주목할 점은 이 때 일본 함대가 거둔 전과는 모두 제로센에 의한 것이었고 대공포화에 의한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헨더슨 부대에서 격추된 돈틀리스는 전부 초계하던 제로센들이 대함 공격 전후에 격추시킨 것이며, 대공포는 한대도 격추시키지 못했다. 출격한 16기 중 헨더스 소령을 포함한 6기는 일본 함대 공격 전에 초계하던 제로센에 격추되었고, 남은 10대가 히류 공격을 시도했으며, 이후 퇴각 중 2기가 추가로 제로센에 격추되었다. 더군다나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미군 조종사들은 대부분 신참들이어서 대공포화를 제대로 회피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한 전 미군 파일럿 중에 가장 미숙한 대원들로 구성된 헨더슨 부대의 경우, 전투 경험은 커녕 미드웨이에 오기 전까지 돈틀리스 조종 경험도 없었다. 때문에, 일반적인 급강하 폭격을 하지 못하고 낮은 각도로 진입하여 폭격하는 전술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폭격 전술은 대공포화에 당하기 딱 좋은 전술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방공망이 수준 이하일 경우에나 통하는 전술이었다.
당시 일본해군은 미, 영 해군이 도입했던 대공방어에 효율적인 윤형진을 도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레이더가 없었던 일본 해군은 호위함들을 가급적 최대한 함대 바깥쪽에 배치하여 원거리에서 내습하는 적기나 적함 탐지용으로 사용했는데 이렇게 되면 각 함들간의 거리가 지나치게 벌어져 효율적인 대공화망을 구성할 수가 없었다. 또한 개함 대공병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기함인 아카기는 구식인 10식 45구경 12cm 고사포를 장착하고 있었으며(미드웨이 작전 후 신형 고사포로 교체 예정이었음) 고사포좌의 위치가 너무 낮게 붙어있어 직상방이나 반대방향으로의 사격이 불가능했다. 카가의 경우 아카기보다 신형인 89식 40구경 12.7cm 고사포를 장착하고 있었으나 구식인 91식 고사기(사격통제기)를 사용하고 있었다(나머지 세 척은 94식 고사기 장착, 91식은 사격제원 입력과 계산, 추적이 수동으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94식은 반자동식이라 대응시간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아카기와 카가에 비해히류와 소류는 신형 대공포와 고사기를 장착하고 있어서 사정이 조금 나았다. 그러나 4함 모두에서 근거리 방공을 담당하는 96식 25mm 대공포는 사거리가 짧고 수동으로 포좌를 조종해야 하며 급탄이 탄창식이어서 지속사격이 불가능하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물론 사거리는 소구경 기관포의 한계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저 시절에 탄창식 기관포도 일반적으로 사용되기는 했다. 물론 미국의 기관포에 비해서 탄창을 자주 갈아줘야하니 불리한건 사실이지만 저 쓰레기같은 물건이 추축국 대공기관포 중 2위는 하는 물건이라는게 함정. 추축국 대공화력의 문제는 40mm급 기관포의 부재가 제일 큰 원인이다. 종합적으로 일본 주력함의 대공화기로는 유효한 개함방공이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고 실제 적의 공습을 피하는데는 대공사격보다 상공엄호기나 회피기동에 크게 의지했다. 이 날 일본 항공모함이 이 날 자함의 고사포로 확실하게 격추시킨 미군기는 카가가 격추한 돈틀레스 1기 뿐이라는 것만 보아도 일본함선의 개함 대공방어 능력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토록 빈약하고 비효율적인 대공포화는 얼마 안가 일본함대에게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다.
5.3. 미군 항공모함의 행방
한편 나구모 제독은 2차 공격을 위해 당시 대기 중이던 공격대에서 함선 공격용 무기들을 탈거하고 육상 공격용 폭탄을 장착하라고 지시한 상황이었다. 이는 명백한 나구모의 독단이었는데, 야마모토는 반드시 함상공격기의 절반은 대함용으로 무장한채 대기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독단이라고는 해도 야마구치 다몬이 2차 공격대의 발함을 요청하기도 했고, 1차 공격대장도 2차 공습이 필요하다고 진언한 상황이라 나구모만 탓하기도 어렵기는 하다. 미드웨이에서 날아든 미군 항공기들의 공격도 나구모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앞서 언급한 아카기의 함교에 거의 들이받을 뻔한 B-26이 나구모의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도 한다. 죽음의 위기를 겪은 나구모가 미드웨이 비행장의 역량을 실제 역량 이상으로 고평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겁먹게 만든 셈이다.
이런 와중에 아까 토네에서 뒤늦게 발진했던 정찰기가 플레처 제독이 지휘하던 17기동부대를 발견하고 보고를 올렸지만, 함종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다가 무전기 고장으로 그 보고조차 늦게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나구모 제독은 15분 가량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다 일단 제1항공전대(아카기, 카가가 포함된)에는 무장 전환 작업을 중지하고 적의 함종을 파악할 것을 지시했다.
그 사이 미드웨이에서 발진한 미군 공격대의 습격이 이어졌지만 역시 기량 부족이었던 까닭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단 폭탄은 날아오니 회피 기동을 해야 했으므로, 이번에도 무장 전환 작업이 중단되는 등 난장판이 또 벌어졌다. 핸더슨 공격대의 공격이 끝났을 무렵 아까 그 정찰기가 추가로 "항공모함은 없었다"라는 보고를 올린 덕분에 나구모 제독은 안심할 수 있었으며, 무장 전환 작업 재개를 지시했다. 그런데 그 정찰기에서 다시 "항공모함 1척을 봤던 것 같다"고 보고를 번복하는 바람에 나구모 제독과 참모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미드웨이에서 파견한 공격 편대(SB2U 빈디케이터, B-17)가 또 함대 상공에 나타나면서 대응할 시간을 더 빼앗겼다.
당시 일본 해군의 교리를 그대로 따를 경우, 함재기의 발진 과정에 필요한 절차들(무장, 급유, 이동, 엔진 예열, 기타 등등)을 아무리 서둘러도 당시 일본의 항공모함과 함재기와 항모 승조원들로서는 1차 공격대의 귀환 이전에 함재기들을 출격시킬 수 없었다. 정찰기의 보고를 접수한 직후 바로 출격 지시를 내렸어도, 함재기들의 출격이 완료될 때까지 토모나가 공격대는 최소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도 귀환하는 기체들이 멀쩡하고, 적의 공격이나 기타 지연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실제로는 1차 공격대의 함재기 중 다수가 심한 피해를 입어서 한시바삐 착함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미군의 추가공격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함대 방공을 위해 전투기들을 수시로 띄워야 했다. 또한, 적기가 전투기들의 방어를 뚫고 공격하면 이를 회피하기 위해 항공모함이 회피기동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 동안 함재기가 뜨고 내리지 못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비행 갑판 위에 계류되지 않은 비행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된다. 더군다나 함종, 규모, 위치 모든 게 불확실했으므로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함재기들을 보냈다가는 허를 찔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들이 맞물린 탓에 그 시점에서는 공격대를 발진시킬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것 저런 것 다 무시하고 함재기를 날려보냈다 한들 그 시점에서는 이미 늦었다. 정찰기의 보고가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미군 함재기들은 일본 함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6시 30분 경에 치쿠마의 5번 정찰기가 미 항모전단 머리 위를 통과했지만, 악천후 때문에 미 항모전단을 못 보고 지나갔다. 미군 항모전단에서 공격대를 발진시킨 시간이 7시니까, 치쿠마의 5번 정찰기가 일을 제대로 했다면 일본군은 대책을 짜낼 시간을 얻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후 미군 급강하 폭격기들이 들이닥쳤을 때, 비행 갑판 아래의 격납고 안에는 연료와 무장을 가득 채운 함재기들이 가득하고 각종 무장들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격납고 여기저기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명중률은 높으나 뇌격에 비해 낮은 파괴력을 가진 급강하 폭격임에도 불구하고 이 함재기들과 폭탄들이 유폭해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만약 이러한 유폭이 없었다면 일본의 항공모함 중 절반 정도는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미일 기동부대 공방전
정찰기와 미드웨이 기지의 보고를 통해 일본 항모기동부대의 상황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던 미국 항모기동부대 수뇌부는 일본군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도착하자 공격 타이밍을 저울질하다가 마침내 공격 명령을 내린다.
오전 7시, 미국 항모기동부대는 즉시 공격 부대를 발진시켰다. 이에 3개의 항공모함으로부터 도합 152기의 항공기가 출격했다.
후술할 미군 뇌격기 부대의 참상은, 태평양 전쟁 개전당시 미군의 경험과 준비 부족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당시 미해군항공대의 경우 이러한 대규모 장거리 대함공격을 상정한 훈련을 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당시 미 항모비행부대의 공격은 전술 레벨에서 실수가 이어졌고, 전혀 의도치 않았던 축차공격으로 이어졌다. 반면 일본은 이미 수차례 대함공격을 성공했고, 전투 경험면에서 미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참고로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군 각 항공모함의 비행대는 각각 4개의 비행대대로 구성되어 있다. 구형인 TBD 데버스테이터로 구성된 뇌격기대대, F4F 와일드캣의 전투기대대, SBD 돈틀리스를 장비한 급강하폭격기대대와 정찰비행대대. 각 비행대대의 지휘관은 소령이며, 이 4개 대대로 구성된 각 항모 전체의 비행대 지휘관은 중령이다.
오전 7시, 비행대에 출격 명령을 내린 스프루언스 제독은 함대 상공에서 편대를 이룬 후에 공격하러 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대한 기록 및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혹자는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16기동부대가 항공모함간의 전투를 해보지 못한 탓이 컸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한편 플레처 제독은 요크타운의 비행대에게 날아가면서 편대를 형성하도록 지시를 해 둔 상황이었다.
한편 일본 항공모함에서 파견한 공격대에게 공격당할 것을 대비하여 미국 항공모함 기동 부대는 세 척이 각각 떨어져 활동했으며, 그 결과 일본 함대의 타격력 분산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었다.
함재기를 발진시키고 있던 엔터프라이즈에서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몇 대가 말썽을 부려 출격이 늦어지자 다급해진 스프루언스 제독은 7시 52분 그냥 기다리지 말고 공격에 나서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상공에서 대기 중이던 항공기들은 그 즉시 일본 함대를 찾아 비행을 시작했다. 엔터프라이즈, 호넷, 요크타운 3개의 항공모함에서 도합 152기의 항공기들이 발진하여 대규모 편대가 형성되었다.
한편, 앞서 제1항공함대를 노렸다가 호위함정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났던 미국의 나왈급 잠수함 SS-168 노틸러스는 기회를 엿보다가 일본의 구축함 아라시를 발견했는데, 그대로 가면 아라시에게 포착당할 상황이라 선제 공격을 했으나 유효타를 주지 못해 아라시의 폭뢰 공격을 피해 잠수해야 했다. 노틸러스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다시 살짝 부상했으나 아라시가 아직 남아 있어서 별수없이 다시 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계속 집적거리는 노틸러스에게 정신이 팔린 아라시는 본대에서 뒤쳐졌고, 황급히 본대를 따라 항해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아라시의 행적은 본 해전의 절정을 이끌어낸다.
한편 출격 후 날아가면서 호넷 비행대에서 심각한 분열이 발생했다.
호넷의 비행대에는 지휘 계통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호넷 비행대의 총지휘관인 스탠호프 링 중령은 부하들에게 권위주의적이고 강압적인 똥별적인 태도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과시욕과 내리갈굼이 강해 부하들의 큰 불만을 사고 있었다. 게다가 과거 조종경력에서 사건사고 기록 때문에 부하들에게 그 자질까지 의심받고 있었다. 때문에 링 중령에 대해 부하들의 불만이 상당했고 일부 부하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될 각오를 하고 지휘관을 교체해 달라고 요구하려 하는 등 거의 항명 직전의 폭발 상황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링은 상사들로부터는 꽤 총애를 받았고 미드웨이에서 한 삽질에도 불구하고 제독까지 승진했다.
결국 이날 출격한 호넷의 비행대에서 편대가 와해되는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전투가 끝난 후 호넷의 함장 미처 대령이 왜곡된 보고서를 올렸기 때문에 호넷의 비행대 내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이후에도 명확히 밝혀지지지 않았으나, 해당 부대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일 사건을 재구성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