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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티울라@메르하바(인도터키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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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 “얼큰한 라면 元祖는 朴대통령” [펌]
큐라 추천 0 조회 65 08.06.22 20: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출처 :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9&articleId=4346

 

 

“얼큰한 라면 元祖는 朴대통령”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의 격정 토로③
고춧가루 뿌린 ‘해장라면’ 즐기던 박 前 대통령, “매운 라면 만들어주시오”
 

 

"골프 파동이 역설적으로 보면 삼양식품에는 득이 된 셈이오. 나는 세간에서 하는 얘기들을 반드시 다 믿지는 않는데, 항간에서는 교직원공제회가 삼양식품의 경영권을 노리다가 골프 파동으로 여론에 밀리니까 포기한 것처럼 얘기하두먼. 공제회 김평수 이사장을 만나서 얘기해보니까 교육자 인성이지 경영권을 노리고 지분을 탐내는 그런 위인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경영권 장악도 될 일이 아니에요.”

전중윤(87) 회장은 삼양식품에 대해 적대적 인수합병(M&A)이나 경영권을 노리는 어떤 도전도 이젠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한다. 행여 그런 음모를 모색하고 있는 세력들이 있다면 다른 일에 수고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하고 특별한 관계인 현대산업개발이 25%를 가지고 있고 내 지분을 합치면 50%가 넘어요. 거기다가 역경을 극복하니까 과거의 명성을 되찾는 삼양식품이 되라고 성원해주는 소비자들과 소액주주들이 있단 말이오. 든든한 재력을 가진 C그룹이나 경쟁회사들도 그래서 아예 지분 인수전에 참여를 안 했던 거 아니겠어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최근의 사회 이슈를 논의하는 것으로 흘렀다. 무엇보다 전 회장은 경제계의 원로로서 최근의 현대자동차 사태나 외환은행 문제 같은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요즘은 자주 만나지 않고 있는데, 원로들하고 만나면 아직 오해가 있는지 현대차 문제가 끝나도 4∼5개 기업이 더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냐, 혹시 삼성처럼 몇천억원 사회에 기부하라는 메시지로 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말을 하던데 이런 소리는 정치적인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지 옳은 눈빛으로 본다고 할 수 없어요. 나는 그런 시각이 아니에요. 그처럼 큰 그룹을 수사할 때는 원칙과 법 정신에 입각해서 하지 않겠소. 불법이나 비리가 없는데 엄청난 경제적 파장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을 수사하겠소? 그건 아니거든. 그렇지만 기업을 하는 입장에선 현대차 사태가 남의 일 같지 않아요. 업종은 달라도 대부분의 기업인이 비슷한 경험과 과정을 거치면서 기업을 일궈 왔잖아요. 그래서 나나 재계에서나 조속히 매듭이 지어지길 바라고 있어요.”

 

“한국 사회는 영양실조에 걸렸다”

 

양극화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기업 하는 사람들도 책임이 있지요. 가령 사원 모집을 할 때 아예 응시자격을 정해놓는 것부터 사실은 보이지 않게 사회를 갈라놓는 거요. 거기서부터 마음이 갈라지고 편이 갈라져요. 이것을 양극화라는 말로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빈부 격차가 생기는 원인의 하나요. 내가 볼 때 인간의 꿈은 건강장수를 바라는 건데, 건강장수는 고사하고 먹고 누울 자리도 없어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너무 잘 먹고 호화로운 환경을 누리다가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이 있어요. 누구의 탓이냐고 따지기 전에 아주 잘못된 결과지만 오늘날의 현실이고 그걸 나는 안타깝게 보고 있는데, 많이 가진 사람들이 베풀어야 한다는 건 원칙적으로 옳은 소리야. 그렇더라도 생활 수준을 놓고 격차나 불균형이라면 모를까 양극화라는 말은 적합지 않아요. 양극화는 극명하게 딱 나누어지는 상태 아니오. 그래서 내가 어디 가서 말할 때는 우리 사회가 영양실조에 걸렸다고 그래요.”

 

우리 사회가 영양실조에 걸렸다고요?

 

“영양실조가 뭐요, 영양은 골고루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고기만 너무 먹는다든지 야채만 너무 먹는다든지 하면 영양의 조화가 깨지는 거 아니오. 조화가 되지 않고 있다는 소리니까 그게 영양실조야. 우리 사회가 지금 그래요.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당장 저기 있는 고기를 가져와서 야채만 먹는 곳에 주라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봐요. 그럼 야채도 가져와서 고기만 먹는 곳에 줘야지. 결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요는 열심히 노력하면 가난한 사람도 잘살 수 있다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사원모집 얘기를 듣고 보니 박정희 대통령과 삼양식품의 인연이 떠오릅니다. 언젠가 박정희 대통령이 심흥선 총무처 장관을 삼양식품에 보내서 삼양의 인사 방침을 들어보고 오라고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소? 그게 양극화하고는 다르지만 내가 지역 편중이 돼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해서 우리 삼양식품이 인사 정책을 독특하게 한 적이 있었어요. 지금도 거의 비슷하게 유지하고 있지만 핵심이 뭐냐 하면, 우리 직원이 3000여 명 있을 때, 신입사원 채용은 물론이고 중역들도 출신 도(道)별로 똑같이 골고루 입사시키고 승진시켰어요. 도마다 20%씩, 중역도 도별로 거의 균등하게 발령냈어요. 부서장도 가령 A부장이 경상도 출신이면 차장은 전라도, B부서장이 전라도면 차장은 경상도나 강원도, 아니면 충청도 출신으로 했지요. 그런 식으로 전부 고루 배치했어요. 식품회사에서 능력 차이는 크게 없거든. 그중에 뛰어난 직원은 수직 승진을 시켜도 직원들이 모두 인정을 하니까. 그랬더니 불평이 한마디도 없어요, 허허허.”

 

흥미로운 인사 방식입니다.

 

“그랬더니 그 소문을 듣고 박 대통령이 인사에 참고하라고 장관을 보내셨는데,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다른 뜻이 아니에요. 지역 편중도 잘못된 인사에서 시작됐지만 빈부 격차도 과거나 지금이나 나쁘게 결과가 나타났으면 원인을 생각해야 해요. 거기서부터 불균형의 문제도 해법이 보이는 거예요.”

 

라면공장 세우기 위해 JP 만나

 

라면 공장을 세우기 위해 1961년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김종필(JP)씨를 만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JP를 만나야 했습니까.

 

“그게 JP하고 우정을 이어오게 된 건데, 45년 전의 얘기구먼. 그땐 국가적으로 최대의 문제가 식량 기근이고 국민한테 무엇보다 급한 게 식량을 대용할 수 있는 음식이었거든. 그럴 때 ‘제2의 쌀’이 될 수 있는 라면을 만들자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라면 공장을 만들려면 기계를 들여와야 하고 기술도 있어야 되잖소. 그때는 일본하고 국교도 정상화 안 됐을 때지만 문제는 달러였어요. 그 당시 기계 견적을 받아보니까 라면을 생산하는 라인 하나에 6만 달러가 있어야 된다는 거요. 3∼4개월 정부하고 교섭했지만 정부에 달러가 없다는 거지. 그때 외환 보유액이 3800만 달러인가밖에 없어요.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지, 허허. 그러니 달러를 줍니까. 준다는 건 공짜가 아니고 내가 원화를 주고 정부가 가지고 있는 달러를 사는 거요. 그런 시절이야. 그런데도 없다고 하니 어떻게 해요. 그래서 JP를 만난 거예요.”

 

그러면 정부 부처를 찾아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왜 중정입니까.

 

“그때는 최고 결정을 남산(중앙정보부)에서 했어요. 상공부에서도 그쪽 결정을 따라야 하니까. 그런데 JP도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없다는 거요. 당장 6만 달러가 있어야 신용장을 열어 기계를 사올 텐데. 마지막으로 JP가 농림부에 알아보더니 마침 미국에서 농림부가 쓸 10만 달러가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걸 JP하고 내가 우격다짐을 하다시피 해서 겨우 5만 달러를 샀어요. 그거라도 감지덕지다 하고선 신용장 열고 일본에 간 겁니다.”

 

면(麵)의 원조는 중국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일본에서 라면으로 개발을 했으니 보안을 철저히 하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말할 것도 없지. 그 시절에 라면 기술 들여온다는 게 정말 군사비밀 얻어오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거요. 그러고 일본도 당시에는 하루 두 끼 먹는 사람이 태반일 정도였어요. 하여간 면 만드는 기계가 있는데 그걸 면기(麵機)라고 해요. 우선 수소문을 해서 면기 만드는 회사 우에다(上田) 사장을 만나 묘조(明星)식품 오쿠이(奧井) 사장을 소개받았어. 나보다 다섯 살이 아래요. 참 샤프한 신사였지. 당시에 제일 큰 회사는 오사카에 있는 닛신(日淸)식품인데 신한은행에서 우리 회사 지분 매각할 때 인수의향서를 냈다는 그 회사요. 회장이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라고 중국계 출신인데 독해요. 그러니깐 거긴 씨도 안 먹히고, 넘버 투가 묘조예요. 그래서 묘조 오쿠이 사장한테 우리나라 식량 사정을 얘기하고 내가 보험회사를 운영했다는 경력도 얘기하면서 도와 달라 했더니 내일 오라는 거요. 생각을 좀 해보겠다는 거겠지.”

 

그래서 다음날 만나셨습니까.

 

“다음날 가니까 자기도 은행원 출신이라면서 참 의미 있는 얘기를 합디다. ‘당신 얘기를 듣고 많이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 가본 일도 없고 아직 국교도 정상화 안 됐지만 한국전쟁이 패전한 일본 경제를 재건해준 셈이다. 당신들은 불행했지만 우리는 한국전쟁 덕분에 살아나고 있다. 내가 보답하는 의미에서 민간 베이스로 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시설도 좋게 싼 가격으로 해주려고 결심했다.’ 그러면서 벌써 시설하는 회사 사장을 두 명 불러놨어요. 나는 애초에 한 라인을 생각했는데 그래가지고는 생산성도 떨어지고 가격도 맞추기 어렵다고 두 라인에 대한 가격까지 받아놨어요. 나는 한 라인에 6만 달러로 견적을 받았는데 두 라인에 2만5000달러로 즉석에서 발주를 해주는 거요.”

 

아주 파격적인 조건으로 계약을 했네요.

 

“기가 막히지. 시설회사 사장도 오쿠이 사장이 보답을 하라고 말하니까 꼼짝 못해요. 대단해. 그러면서 일본 사람들한테도 구경을 안 시키는 공장을 나보고 한 달 동안 묵으면서 배우라는 거요. 라면 만드는 전 과정을 사장이 직접 알아야 한다고 말이지. 하여간 많은 얘기가 있지만 공장이 도쿄에서 전철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란사이라는 곳에 있는데 거길 가서 밀가루에서부터 면발이 되고 증식이 되고 튀겨지고 건조해서 포장하는 것까지 똑같은 코스를 하루에 몇십 번을 돌면서 시간을 재고 그때그때 어떻게 한다는 것을 노트에 적으면서 한 2주일 했어요. 그런데 배합기술은 절대 안 가르쳐 줘.”

 

그러면 배합기술은 회장님이 개발한 겁니까.

 

“아니지. 도쿄에 오니까 그 사이에 나에 대한 신원조회를 했어요. 내가 했던 말이 전부 사실이더라고, 참 정직하다고, 그러면서도 안 가르쳐줘요. 별수 없이 서울로 돌아오려고 비행장에 나갔는데 비서실장을 시켜 봉투를 하나를 줍디다. 비행기 안에서 뜯어보라고. 거기에 제일 중요한 면 배합, 수프 배합 같은 핵심기술이 들어있는 겁니다. 자기 비서실장한테도 비밀로 하는 걸 가르쳐준 거예요. 서울 오니까 한국의 삼양이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정말 기술자를 보내서 시설에서부터 첫 생산이 될 때까지 전부 도와주는 거예요. 그 첫 출하가 9월 15일이야. 그래서 우리 삼양식품 창사일이 9월 15일이지, 허허허.”

 

오쿠이 사장 배려로 라면 기계 수입

 

처음부터 ‘삼양’이라는 상호가 있었습니까?

 

“당시 서울 월곡동에 조그마한 공장이 하나 있었는데 삼양공업주식회사라고, 기름을 짜는 공장이야. 그걸 하나 샀어요. 그런데 기름 장사는 내 사업 목적이 아니야. 그게 삼양식품이 됐지요.”

 

라면 공장을 만들어도 초창기에는 생산인력이 없었을 것 아닙니까.

 

"“도봉동에 공장 세울 때 얘기를 하지요. 그땐 강남으로도 얼마든지 갈 수 있었어요. 다 비어 있었으니까. 하여간 도봉동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가봤더니, 서울시에서 수재민, 이재민을 전부 데려다가 땅 5평씩 줘서 수백 호가 살아요. 주인은 서울역 주변에서 지게 지고 품팔이 하고. 그곳을 보면서 그때 내 생각이, 저 사람들한테 대통령, 장관이 무슨 소용이고 정부 혜택이 뭐가 있겠느냐 싶고, 기가 막혀요. 그래서 도봉동에 공장 만들자, 저 사람들 써줘야겠다, 그러면서 땅을 사기 시작했어요.”

전 회장이 도봉동에 공장을 지은 이유는 빈민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전 회장은 “처음에 500명을 채용하는데 가구당 한 명씩 지원하면 써준다는 원칙을 정했다”고 회고했다. 막상 사원을 뽑아놓고 보니 교육이 문제였다.

“그래서 중위 출신을 10명 뽑았어요. 우선 정신교육부터 시키는 거요. 기본 태도에서부터 청결까지. 전부 목욕탕으로 출근시키고 옷을 바꿔 입히고 신발 해주고. 그렇게 한 달쯤 되니까 좋아지더구먼. 하여간 도봉동에서만 그런 식으로 1000명을 채용했어요. 그러고 나서 생산하는 걸 가르치고 기술자로 만들어갔는데, 내가 깨달은 게 있어요. 한 1년 지나고 나니까 주변의 ‘하코방’ 집들이 점차 벽돌집이 되는 거요. 그래서 그때 느낀 게, 집집마다 평균 네다섯 식구가 되는데 그중에 고정보수를 한 사람만 받으면 먹고사는구나, 그때 터득했어요. 그걸 보면서 얼마나 좋은지 말이오. 양쪽 하천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우리 가족이 되는 거고, 전부 배고픈 게 해결되니까 직장을 하늘처럼 알고 퇴근시간이 따로 없을 정도예요. 그러고 동네가 조용해져요.”

 

시행착오도 많았겠습니다만 라면이 처음 나왔을 때 국민이 라면을 알아봤습니까?

 

“기막히지. 처음에는 라면을 팔기 위해 고생한 것이 아니라 라면을 알리느라고 고생하고 투자했어요. 관철동 사무실 위에 라면을 알리는 애드벌룬을 띄웠어요. 그랬더니 라면이 옷감입니까 실입니까 물어요. 서울역, 극장, 운동장, 부인들이 만든 단체 할 것 없이 냄비하고 솥하고 잔뜩 싣고 나가서 직접 보는 앞에서 끓여서 무료시식을 하는 거요. 그걸 1년 가까이 하니까 그때부터 맛있다는 소리가 들려와요.”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이번엔 경쟁자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조선일보가 마장동 쪽에 공장을 지었고 럭키·동방유량·농심(롯데) 등 4∼5군데 업체들이 라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1개에 10원… 5년 지나자 흑자

 

경쟁이 치열했겠군요.

 

“솔직히 나는 경쟁사들 의식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많이 만들어 기아에 허덕이는 국민이 없도록 하자고 했어. 그런데 내가 10원을 받으니 다른 업체들이 더 비싸게 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군에 납품한다던 조선일보도 2년쯤 운영하다가 문을 닫고 나머지 회사들도 그 사이에 전부 적자 보고 문을 닫아요. 나도 1년반쯤 됐을 때부터 적자야. 2년이 넘어갈 때는 가지고 있던 보험회사 주식을 다 팔아 3억원 전부를 집어넣었어요. 그래도 포기를 할 수 없어 한일은행 찾아가서 운영자금을 빌려왔지. 먹지 못하는 사람들한테 애정이 없으면 절대 그렇게 못해요. 그래서 한 4년쯤 되니까 그때서야 소비자들한테서 삼양이라는 말이 붙어다녀요. 삼양이 라면의 대명사가 돼요. 그때부터 이익도 나고 흑자가 나더군. 자리도 잡히고.”

 

라면이 일본에서 기술을 가져왔으니까 처음엔 얼큰하거나 매운맛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맞아. 일본 사람들이 수프에 고춧가루를 안 넣으니까 처음에는 배합 비율에 고춧가루도 없고 우리도 고춧가루를 안 넣어서 조금 싱겁고 상당히 부드러운 맛이었어요. 근데 고춧가루를 넣은 게 박 대통령이에요, 허허.”

 

어떤 숨은 사연이 있습니까.

 

“그때가 66년도인데 하루는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박 대통령께서 직접 전화를 하신 거예요. ‘나 대통령인데 고춧가루 좀 라면에 넣으시오.’ 허허허. 그 어른이 술을 잘 잡숫잖아요. 나중에 알았는데 술만 드시면 꼭 라면을 드시니까 그때마다 고춧가루를 풀어서 드시는 게 불편하셨던지 아예 수프에다 고춧가루를 넣으라는 거지요. 그때부터 고춧가루를 넣었는데 그게 또 우리 국민 식성에 맞고 히트예요. 그리고 라면은 종류에 따라서 농수산물이 엄청 들어가기 때문에 농어촌 수익에도 많은 기여를 한다고 자부하는데 고추도 그래서 우리가 계약 재배를 많이 하기 시작했어요.”

 

창업에 성공한 기업인들은 돈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합니다만 요즘은 어떤 구상을 하고 있으십니까.

 

“허허허. 나를 성공한 기업인이라고 평가해주면 겸손하게 받아들이겠지만 내 스스로는 성공한 인생이 되기 위해 열심히 해왔어요. 그래서 지금은 잘 떠나기 위해 열심히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볼수록 잘 떠난다는 것이 참 쉬운 일이 아니야. 늙은 욕심은 염라대왕도 못 말린다고 하는데 마음을 비워야 하고…. 인생사에서 원한을 산 일은 없었는지, 나도 자식을 두고 있으니 화해하고 용서하고 보은해야 할 일은 없는지 그런 정리도 해야 하고…. 사후에 내 뜻을 명확히 전하기 위해선 유언도 작성해야 하고…. 기업을 했으니 현업에서 언제 물러나는 것이 가장 좋은지 그 타이밍도 짚어야 하고…. 정말 잘 떠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구나 싶어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진실 되고 올바르게 잘 살아가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내가 그렇게 살아왔어야 되거든. 그렇지 못하면서 일장연설을 해봐야 결점 많은 인사가 젊은이 앞에 서서 주례하는 것이나 뭐가 다르겠어요. 위선이지. 그래서 사업적인 구상이 아니라 잘 떠나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오. 허허허.” <끝>

 

이 호 객원기자·작가 (leeho5233@hanmail. net)  [834호] 2006.04.1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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