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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한 밀교 승려. 서기 700년 전후 출생,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서 밀교를 배웠다. 그후 인도의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 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했다. 그가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연구. 740년 금강지가 이 경을 번역할 때 필수(筆受)를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 가을 금강지가 죽어 이 사업은 중단되었으며, 금강지 유언에 따라 이 경 원문은 742년 다시 인도로 보내졌다. 773년경 금강지 제자 불공(不空)으로부터 이 경의 강의를 들었다. 불공은 6대 제자 가운데 2번째로 혜초를 꼽았다. 불공이 죽은 후 동료들과 함께 황제에게 글을 올려, 스승이 세웠던 사찰을 존속시켜달라고 황제에게 청원. 그뒤 수년 동안 중국 장안에 머물다가, 780년 불공이 활동했던 오대산으로 갔다. 그뒤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머물면서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 한역과 한자음사(漢字音寫)를 시도하여 채록.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로 귀국하지도 않았던 듯. .........................................
신라 호국불교의 요람.,지리산 당나라 현장(玄)도 찾았던 녹야원. 근심할 것 없었는데 다만 멀고 험한 길이 근심이 되나 여러 차례의 탑을 보기 어려움은 여러 차례의 큰 불에 타버렸음이라. 이 중천축국의 영토는 무척 넓고 백성이 많이 산다. |
막고굴
돈황석굴은 돈황 시내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절벽 벽면에 남북으로 1.8km에 걸쳐 만든 석굴사원
여러 층으로 뚫린 석굴은 현재 확인된 것만도 492개
2천여 개 불상과, 총 면적이 4500㎡에 이르는.,벽화.
사막(莫)의 높은 곳(高) 석굴(窟)이라 하여 막고굴(莫高窟)
전성기에는 석굴 수가 천 개가 넘어 천불동(千佛洞)이란 별명
천년을 이어진 상인과 순례자의 불심
전진시대 낙준스님은 수행 장소를 구하기 위해 돈황에 들렀다가
절벽 앞의 장엄한 일출이 마치 천불을 보는 것 같아 굴을 뚫기 시작
이때부터 13세기 원대까지 천 년에 걸쳐 굴이 더 만들어져 동굴 사원
승려들이 승방으로 사용하면서 막고굴은
돈황주민과 대상들의 신앙의 성지로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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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고굴은 그 절벽에 남북으로 1.8km에 걸쳐 만들어진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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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이 신앙의 성지로 빠르게 유명해진 것은
당시의 불안정한 시대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굴들이 조성되었을 당시는 5호16국 중 하나인
전량(前凉)이 돈황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였다.
상인들과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힘든 여행길을 앞두고
부처님께 안전한 귀향을 빌며 돈과 불상을 시주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벽화가 그려진 새로운 석굴이 생겨났다.
석굴군은 남쪽지구 남굴과 북쪽지구 북굴로 나눠진다.
남굴은 벽화와 불상들로 내부 장식이 되어 있는 반면,
북굴군의 석굴들은 벽화가 내부에 장식되어 있지 않고
석굴 안에서 바깥으로 이어지는 굴뚝이 만들어져 있다.
승방과 수행도량의 선원으로 사용된.,막고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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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굴군의 석굴들은 벽화가 내부에 장식되어 있지 않고 바깥으로 이어지는 굴뚝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스님들이 기거한 승방과 수행도량의 선원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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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 제96굴의 누각. 높이 34.5m의 북대불. |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대불이 있는 <제96굴>
기록에 의하면 측천무후 원년(695년)
영은선사와 음거사가 만든 것이라 한다.
대불의 높이는 34.5m로 돈황석굴 중 최대 규모.
<제130굴>에는 두 번째로 큰 26m의 미륵불이 있다.
풍만한 얼굴에 온화한 표정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96굴 남쪽에 있어 북대불의 반대 의미인 남대불(南大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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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0굴> 섬세한 손이 아름다운 26m 높이의 남대불(南大佛) |
<제259굴>은 북위시대 석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2개의 불상이 있는데 화관 등 힌두교 양식이 섞여 있다.
아잔타의 석불과 매우 유사하다. 이것들은 모두 목심불.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진흙을 붙여 만든 것이다.
가사를 몸에 두른 다보여래상은 깨달음의 순간
미소를 띠는 모습이 아름다워 '동방의 모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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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59굴> 깨달음의 순간의 미소를 표현한 동방의 모나리자 |
벽이 깨지자 드러난 보물들
돈황이 토번의 지배에서 벗어난 당 선종 때(848년),
당시 돈황의 유력가인 장의조가 그를 도와준 고승
홍변의 자문을 받아 <제16굴>을 만들었다.
16굴의 입구 오른쪽에 있는 작은 동굴이 <제17굴>이다.
이 굴은 홍변의 영굴(影窟), 즉 그를 위한 기념굴이다.
굴의 정면에는 단정하게 앉은 94㎝의 홍변상이 있다.
17굴이 5만 여권의 희귀한 서적들을 발견했던 장경동(藏經洞).
1908년 16굴 입구 모래와 먼지를 제거하자 벽이 갈라지며 뚫린 구멍
벽을 깨뜨리자 길이와 너비가 각각 3미터인 작은 굴 안에는 경서와 문서,
자수, 회화, 탁본 등 5만여 점의 보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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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굴 입구 모래와 먼지를 제거하자 벽이 갈라지면서 구멍이 뚫렸다. <17굴>에는 경서와 문서, 자수, 회화, 탁본 등 5만여 점의 보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 중 하나인 <금강경>을 비롯한
이곳에 있던 7천여 권의 고서적을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갔다.
이어 프랑스의 펠리오가 나머지를 약탈해갔는데
주인을 잊은 채 프랑스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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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층으로 뚫린 석굴은 현재 확인된 것만 492개 이고, 2천여 개의 불상, 총 면적이 4,500㎡에 이르는 벽화가 있다.
덧 말.
혜초는 704~787년 경 출생 사망한 인물로 추정된다. 그는 장보고(? ~846) 보다 1세기 이상 앞선.,인물이다. 의상대사(625 ~702) 처럼 당나라로 유학 간., 밀교 승려.
의상은 당나라를 여행하고 중난산에서 공부 했고 그곳에서 화엄을 접하고, 신라로 돌아와 화엄종 창시. 신라는 661년(문무왕) ~719년(성덕왕).,경주 남산 성역화.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 군, 선도산 서악리 마애삼존불 등.
신라 역대 왕들은 전통적으로 호국불교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밀교 승려를 해외에 파견 유학보냈다.
'밀교 승려'들의 기행기를 통해 호국불교 불토정국을 조성한 신라. 사찰, 탑, 불상, 경전, 풍습, 정치.경제.
719년(성덕왕 18년) 불교문화 전성기였던.,통일신라. 그해 16 나이 혜초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듯 추정된다. 성덕왕(재위 702∼732) 때까지 극 배출한 화랑은 200 여명.
어린 청소년들을 화랑으로 양성 삼국통일 인재들을 배출했던.,신라. 혜초는 화랑 '밀교 승려'로 추정된다. 사령자(司靈者) 성격도 겸했던.,시기. 왕명을 받들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듯..
혜초가 '화랑' 신분이 아니라면 소화해 낼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목숨을 걸어야 하는 험난한 여행 일정.
'왕오천축국전' 기행기(紀行記)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물로 충분하다. 인도 5국을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수필, 일기, 편지 등의 형식을 빌려 쓴 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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