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하고자
어떤 독일어 단어를 선험적이라고 번역한 학자가 있지만 같은 단어를 초월적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번역이란 그만큼 융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험적인 것이란 인간의 관리의 영역을 초월한 즉 벗어난 것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겠죠.
인간이 태어나서 좋은 경험만을 한다면 초월하려 하거나 초월자가 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 이유에서 인간들이 벗어나고 싶은 상황들이 있는 것이지요.
판타지 소설에서는 많이 등장합니다. 중력을 초월해서 권두운을 타고 하늘을 나르는 것이죠. 나르는 양탄자도 있죠.
사실 인간들은 선험적인 것,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조건들에서 벗어나고자 무진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상상적이라도 자신을 그러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어떤 초월적인 능력이 있는 것으로 사람들을 속여온 경우도 많았죠. 사람들도 초능력자를 갈망한 나마지 그가 실제 그러한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구차하고 구속적인 우환적 현실에서 그에게 도움을 받았으면 하고요.
한 미국인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초능력임이 증명되는 경우 100만 불의 상금을 걸었다는 데 도전한 사람은 많았지만 그걸 받아간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죠. 속임수나 과학적 현상이었다는 것이죠.
과학은 과거에는 초능력으로 보이는 일들을 이루어왔죠. 그것도 많이. 신의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 납득이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편안한 좌석에 앉아서 구름 위를 비행할 수 있게 해 주죠.
성서에도 인간이 초능력을 보인 경우가 많이 있죠. 특히 예수가 그랬죠.
그러나 모든 초능력들이 실제로 창조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죠.
과학도 초능력으로서는 당연히 한계에 봉착하죠. 실제로 환자들을 시원스럽게 치료해 준다든지 병이 생기지 않게 하지 못하죠.
그리고 어떤 법칙으로 우주를 창조하고 운영하는 창조주가 무슨 차질이 생겼다고 해서 스스로 법칙을 깨트리는 그런 모순된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창조의 법칙은 절대적이라는 개념도 일종의 선험적 즉 초월적인 것이니까요.
그리고 인간이 초월하고 싶을 정도의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들은 창조의 차질이나 실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유의지, 의식을 가진 존재들이나 그들의 사회는 특정하게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며 그것은 실패라고 말할 수 성격의 것이 전혀 아닙니다.
개는 날지도 못하고 나무 위에 잘 오르지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물속에 오래 있지도 못하죠. 개는 처참한 실패작인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모든 동물들은 죽게끔 되어 있습니다. 죽음마저도 실패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도 무수한 한계가 있습니다. 실패는 아닌 것이죠.
인간에게 절대적인 자유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섭리이며 창조의 성공입니다.
인간은 천사 같은 신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나름의 생각으로 그들이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초월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약간의 차이라고 합니다. 그들도 대개는 하느님의 종으로 절대적으로 겸손을 나타내죠. 자신의 이름조차 알리지 않기도 합니다.
그들 중 반역하여 비천하게 된 존재들도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하는 짓을 보면 알 수 있죠.
이상적인 상태라면 인간이 초월적이 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체의 모든 것이 아프지 않고 즐거움만 느낀다면 그 신체에서 벗어니기를 원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이 물질적으로 인적으로 낙원과 같다면 그 세계에서 왜 이탈하고자 하겠습니까?
또 어떤 면에서 그것을 초월적인 것이라고 하고 그 초월적인 상태를 누려보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도 있습니다. 하늘을 날거나 인공아가미를 달고 물속에 오래 있을 수도 있는 것이죠. 다른 행성에 여행을 가거나 개척할 수도 있는 것이죠. 유튜브 영상으로 원하는 가수의 노래를 언제든 부담 없이 듣는 것 자체도 초월적인 것을 현실로, 생각보다 더 쉽고 편리하게 이룬 것이라 할 수 있죠.
원래로 돌아가서 원리적으로 생각을 정리해 보죠.
선험적인 것은 무수하고 그 가운데 정서적 기능, 그 가운데 음악적 기능이 있죠. 음악을 감상하거나 부를 수 있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작곡할 수 있는 능력들이죠.
그런데 이러한 것들에서 초월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여 그런 기능들이 없어지기를 원한다는 것이 오히려 괴이한 것이죠. 인간이 잘못 바라는 초월의 본질이 그러한 것입니다.
모든 욕심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욕심이 되죠. 그러나 노래를 잘 부르고자 하는 욕심, 음악을 들으면서 더 깊은 이해를 하고 싶다는 욕심, 악기를 더 잘 다루었으면 하는 욕심에서 왜 그렇게 초월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인간들에게는 그릇된 욕심, 악한 욕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굳이 해탈이라고까지 과장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달콤한 잠을 아무런 방해받지 않고 잘 수 있고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 왜 잠자지 않고 먹지도 않는 그런 상태를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까? 오히려 그렇게 못하게 하는 것이 구속 아닙니까?
결코 실패가 아닌 선험적인 것, 인간이 원리적으로 초월할 수 없는 것 그것을 실패라고 규정하고 초월하는 것을 하나의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사상은 괴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삶이 의미 있고 즐겁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인간은 헛되이 초월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생명에 감사하면서 말씀에 기꺼이 순종할 때 초월이라면 진정한 초월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 질병, 노쇠, 죽음 등등 비정상적인 것으로부터의 초월이죠.
모든 거짓과 악에서 스스로 초월하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