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소확행의 의미2
기실 하루키의 ‘소확행’이 나온 배경을 살펴보면 좀 우울하다. 그는 일본의 1980년대 경제 붕괴로 인한 경제 침체시기에 힘들게 보냈던 경험을 토대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얻고자 하는 심리를 담아 이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심리는 일종의 ‘방어기제’ 로 경제 불황 스트레스와 취업 불안 등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양식이 이 ‘소확행’인 셈이다. 나 역시도 큰 병을 앓고 의욕 떨어지고 퇴직을 앞두고 오라는 데 없는 처지로서 스스로 알아서 챙겨 소연히 걷는 길이 어찌 하루키의 ‘소확행’과 공교롭게도 그대로 들어맞은 꼴이다.
나는 그렇다 쳐도 젊은이들이 ‘소확행’에 열중이라는 데는 마음 짠한 구석이 있다. 일본이 그 시대 그러하였듯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우리사회의 구조적 현실이 너무 닮아 있다, ‘N포 세대’로 불리는 청년들의 애달픈 삶이 투영된 측면이 너무도 많다. 사전에는 N포세대란 어려운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취업이나 결혼 등 여러(N)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세대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런 N포세대는 기존의 3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 5포세대(3포세대+내 집 마련, 인간관계 포기), 7포세대(5포세대+꿈, 희망 포기), 9포세대(7포세대+건강, 외모 포기)로 포기 숫자가 내가 사회물정을 그리 하나 둘 덮듯이 갈수록 늘고 있다.
의욕상실을 말하는 포기란 말과 ‘젊은이여! 꿈을 가져라.’는 지극히 대치되는 말이다. 우리 때만 해도 뭣 모르지만 'Boys, Be Ambitious! 란 말을 숫하게 들었는데 요즘에는 이 말을 누구든 거들먹거리지 않는다. 여기서 내 생각은 양분된다. 분명 행복이 마음속에 상재한다 싶은 자아만족의 의미로서 소확행의 길은 맞지만 젊은이들에게 당당히 이를 권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감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소확행의 추구에서 내가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작은 세계에 대해서도 만족하는 것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관점이다.
뜻하자면 요즘 청년들이 워낙에 어렸을 때부터 경쟁을 하고 별 보고 집에 들어가고 각박하게 살다 보니까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에너지가 고갈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평생을 힘들게 산 부모 닮은 기성세대의 힘든 모습을 보자니 뭐 인생이 그렇게 허무하더냐 하여 그래서 더 이상 열정적으로 뭔가를 추구할 동기부여가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또 하게도 된다. 청년 세대는. 그래서 아 내가 평생 힘들게 살고 나서 그 모습이 저 정도란 말인가, 그럼 그냥 저렇게 살기 위해서 지금 희생을 하기보다 지금 편하게 사는 게 낫지 않나 이런 생각이 더 현명하게 자리할지도 모른다. 또 생각해 보자면 우리 사회가 사회초년병들한테 여러 가지 부조리한 처우, 을들에 대한 여러 가지 압박들, 이런 게 심하다 보니까 청년들이 꼰대들의 그런 습성을 참고 감내하느니 차라리 내키는 대로 나홀로 편하게 살고 말겠다. 이런 생각들도 할 수도 있겠다싶다.
그중에서도 아무래도 제일 찔리는 구석은 이거다. 솔직히 미래에 희망이 없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젊은 시절을 다 바쳐서 열심히 살아봐야 서울 시내에 아파트 한 채 살까 말까인데, 그 아파트 한 채 안 사고 뱃속 편하게 살고 말지, 그러다보니 외제 차부터 사서 싱싱 달리고 혼자의 행복을 찾겠다 것이고 그들 욕구를 채워줄 다른 방도도 없는 마당 그냥 지켜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느냐 싶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요즘 젊은 세대가 어렸을 때 배고픈 경험이 없어서 물질적 성공에 대한 강박이 없어 저러는 것 아닌가 싶어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벌써부터 그들은 세상 다 살아본 양 초탈한 느낌이 돼가지고 없으면 없는 대로 내 방식대로 편안히 살자 이런 것은 또 아닐까 싶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아무튼 의기소침에 자기 당착이 뒤범벅이니 기성세대로서는 가당치 않다 싶은 것은 사실이다. 과거 내 때는 뼈 빠지게 너무 일만하는 중노동으로 점철된 과로사회였다. 그래서 그 과로사회에서 삶의 질을 추구한다는 측면으로의 전개는 이미 때는 늦기는 했으나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하겠지만, 너무 젊은 나이 때부터 이렇게 내가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는 걸 안 하겠다. 그냥 평이하게 여유 있게 살겠다 이러면 우리 사회의 발전의 동력은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젊은이들이 열심히 땀 흘려 뛰어도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을까 말까인데 다 젊었을 때부터 여유가 생기면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발전을 못 하는 것은 당연하다싶어 걱정이 앞서기도 하는 노릇이다.
인생이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길 위의 여정과 같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불확실한 상태를 두려워하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존재다. 그렇기에 이 취약한 상태로 멈춰 서 있지 않으려면 투지를 불태우며 알 수 없는 미래에 도전하여 그 한계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게 논리상 더 맞다. 때론 실패를 겪으며 좌절하기도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때 얻게 되는 성취감과 보람이야말로 행복지수를 끌어 올리는 주된 요소가 아닐까.
비록 사회 구조적 난제로 치인 꼴이지만 그렇다고 한창 때의 청년들이 변화 없는 일상에 그저 굴복해서야 될 것인가 싶은 것이다. 과거 기성세대에게 젊은 시절의 과제는 맨 손으로 절대적 빈곤과 무지를 때려잡는 것이었다면, 현재 젊은 세대는 이 불확실한 세태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오히려 다양한 미래상을 제시해 나갈 소명을 부여받았으며 이를 충실히 헤쳐나가야 할 것이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정말 나는 고마울 것이다.
노파심이라고 누구는 말하겠지만 따져보면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다 싶은데도 그럼에도 나는 잘 모르겠다. 이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어서다. 이 세상은 어떻게 행복할까?’에서 '왜 행복을 추구할까?‘라고 행복에 대한 담론과 질문이 변화하고 있다. 나로서는 어떻게 행복할까에 치우쳐 너무 먼 길을 돌았던 것 만 같다. 어쩌면 행복은 관념적이고 의식적인 피상체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 앞에 놓인 감정적 생리적 현상이 아닐까 싶다. 젊은이들은 꽤 그 방면에 발달해 있다. 행복의 기준이 미래에서 지금으로, 특별함에서 평범함으로, 진하거나 강하고 큰 것에서 작더라도 지금 자주 느낄 수 있는 실체추구로 변했다. 어떤 이는 ‘소확성’을 ‘소소하지만 확실한 성취 경험 또는 성실한 수행’이라고 정의하면서, 작은 성취 경험이 쌓이고 땀과 열정을 담은 성실한 수행은 개인에게 나타난 우연을 기회로 만드는 내공이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연한 기회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생각이 습관화 되면 사람의 운명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침에 내리는 커피 향에 행복감을 느껴 보거나, 편한 자세로 쇼파에 누워서 책을 읽거나 또는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던 드라마 시청을 해보면 어떨까? 또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거나, 좋아하는 화가의 미술품을 감상해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양하게 각자만의 소확행 거리를 확장한다면 그 삶도 괜찮지 싶기도 하다. 누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 오로지 나 혼자 편하게 누리는 소소한 행복감, 그런 것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또한 근사한 삶이라 생각한다.
때로는 집시맨도 되어보고, 또 때로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도 내보고 하면서 말이다.이런 현상들이 대중문화에까지 점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도 즐겨보지만 일상인데 보면 우선 편안해진다. 평안하고 소소한 일상을 담은 윤식당이라든가 효리네 민박, 나 혼자 산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다 그런 부류들이다. 특별한 존재가 되기보다 평범하게 살면서 아무나의 삶을 살겠다는 우려와 더불어 인간적인 자연스런 해방감도 같이 수반해 나로선 여러 가지로 소확행의 젊은이들의 승차가 어떠하다 말하기가 참 어렵다.
뭐 먼 데 가는 게 아니라 골목길의 작은 카페에서 햇살을 받으면서 시집을 읽는다, 그런 것에 나는 만족하고 행복을 느낀다고 하는 건데. 그래서 요즘에 여행 계획을 세우는 분들 중에서도 특이한 데가 아니라 그냥 일반 골목길 카페 투어를 가겠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고 요즘에 이른바 핫 플레이스라고 해가지고 도심의 평범한 골목길이 뜨는 그런 현상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 소확행이 이 나이에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맙고 흐뭇한 행보이지만 과연 젊은이들에게도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생각해 볼 일이다.
오늘도 나는 소확행의 한 행보다. 주말 오전, 알람 소리 없이 개운하게 일어났다. 밤사이 내려두었던 블라인드를 걷으며 따사로운 햇볕을 멍 때리며 그냥 쪼인다. 오늘은 내가 바로 디오게네스다. 그 누구를 탓하지 않을 것이라면 이 화창한 날 모든 것을 수수히 내려놓고 벌거벗은 그처럼 한가로이 볕을 쪼이는 것도 괜찮다. 그는 거칠게 먹고 험하게 입고 산 조의조식의 사람으로 유명하였다. 형편이 구차스러운 그는 값싼 푸성귀를 구해 깨끗하게 씻어 먹고는 했다. 그가 시냇가에서 푸성귀를 씻고 있는 것을 본 한 유복한 친구가 지나가다 안타깝다는 듯이 그에게 충고했다.
"고개 수그리는 법을 조금만 알아도 호의호식할 수 있는 것을…."유복한 친구를 돌아다보면서 디오게네스가 응수했다. "조의조식 하는 법을 조금만 알아도 고개를 수그리지 않아도 되는 것을…."마냥 천하고 가난하니 가릴 것 없고 숨길 것 없고 부러울 것이 없는 디오게네스의 봄볕도 소확행의 지극히 한 부분이다. 오후에는 좋아하는 동네 카페에서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다. 어떤가? 말만 들어도 행복하지 않은가? 스쳐 지날 법도 한 우리의 소소한 일상들이 ‘소확행’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요즘 나는 나붓한 수필이 그 전달체로서는 최적이다 싶다.
14. 내가 제일 아끼는 소확행 하나 사랑이 흐르는 피아노 연주곡
첫댓글 소확행이 유행되는 걸 보면서 공감 이상의 불편함이 생기는 것은 제가 기성세대여서일까요?
당시의 하루키 세대만큼 우리 청춘들도 불안하고 힘든 시절을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더 멀리 날개를 퍼득여야 할 이들이 전깃줄에 앉아서 햇살바라기나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화로 고정되는 거 아닐까 싶은 우려가 생기더라구요;;
공감합니다. 공무원 카페에 오른 글을 보니 이 수입으로 결혼할 수 없으니, 차라리 전셋집 살며 골프나 치고 혼자 살겠다는 남자들이 많더라구요. 포기도 포기지만 헌신을 하지 않겠다는 것으로도 보였습니다. 희생까진 아니어도 헌신을 할 생각이 없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