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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문협 회원이기에 소중하다
한관식 (영천 문협 지부장)
어디로 튈지 몰랐던 어린 시절, 문득 연이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문방구에서 쉽게 재료를 구할 수 있지만 사십 오년 전만해도 몸소 뛰어다니며 재료를 구해 연 만들기에 매달렸다. 아버지나 형이 만들어 주는 연은 뭔가 짜임새가 있고 든든하게 느껴져, 바람 많은 들판으로 나가면서 위풍당당함을 앞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재료를 직접 구하고 눈썰미로 대충 모양을 갖추어 날린 연은 번번이 곤두박질치기 일쑤였다. 원인은 균형 감각이었다. 마디가 없는 대나무를 얇게 회초리처럼 만들어 창호지에 중심을 잡고 포물선 모양으로 구부려 쉽게 떨어지지 않게 붙이면 되었다. 방패연은 어렵기도 했지만 대나무도 많이 필요했으며 무엇보다 기술이 요하는 고난이도 작업이기에 방패연을 가지고 있는 또래를 볼 때면 경이의 눈으로 감탄했다. 그래서 쉽게 작업에 들어 간 연은 꼬리 연이었다. 꼬리 연을 만들 때마다 가장 고민하게 되는 것은 꼬리의 길이였다. 방패연에게는 꼬리를 감추지만 같은 꼬리 연에게는 꼬리의 길이로 우위를 결정하기에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음새 부분이라든지 몸통의 크기를 인정해 주면서 높고 우아한 몸짓으로 날 수 있느냐하는 관건이기도 했다. 시행착오도 무수히 겪으면서 곤두박질치는 연은 무게 중심을 뒤로 하고, 바람을 맞는 몸통의 크기도 타협해 가며 일단 날아 오르는 것이 연의 첫 번째 임무이기에 꼬리의 무게도 줄여가면서 점점 연 만드는 행복한 작업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정도 괘도에 오르면 얼레와 실과 연과 자신과 한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야만 연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패배를 모르는 연으로 거듭나게 된다.
문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느 때이든 상관없다. 한번쯤 관심을 보였고 한번쯤 귀를 기울였고 뭔가 와 닿는 친숙한 감성으로 접근한 단어와 문장이 있었다면 더 나아가 시가 있고 수필이 있고 소설이 있었다면 그것은 꼬리 연을 만들기 위해 준비한 재료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 지나친 눈물을, 다른 사람이 외면한 일기를, 다른 사람이 버린 책을 가슴에 담아 하얗게 지샌 밤을 보냈다면 꼬리 연을 만들고 있는 과정이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난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다른 사람의 연과 비교하는 도전에 인색했기 때문에 자신의 꼬리 연 높이가, 얼마나 도도하게 하늘을 나는지 간과한 점도 생각해 보아야한다. 비판과 지적에 발끈하지 말고 겸허하게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기필코 만드는 치열함도 필요하다. 연싸움에도 이기길. 굴뚝에서 저녁연기가 오르면 집으로 들어가 저녁상 앞에 앉는다. 그 때 저녁상이 꿀맛이길 응원한다. 이제 우린 방패연을 날릴 때다. 언제까지 꼬리 연을 날리며 만족해야 하는가.
파도 /손영미
쉼 없이 씻어주는구나
어질러진 내 마음의 찌꺼기들을 말끔히
씻고 또 씻어주는구나
아득히 이어진 저 쪽빛 바다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내 어머니의 품, 나는
작은 모래알로 옹알거리며
당신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해맑아진다
쉼 없이 씻어주는구나
나날이 찌들어가는 내 마음의 갈피를
낱낱이 뒤적여가며 씻어주는 어머니의 손길로
오로지 밀려오기만 하는
저것,
당신의 젖비린내에 취한 나는
흑백사진처럼 빛바랜 추억을 뒤적이고 있다
그리움을 뒤적이고 있다 (전문)
바다는 늘 그 곳에 있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외갓집처럼 정감이 있는 모습으로 찾아 간 우리네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도 귀를 열고 들어주었다. 우리 이야기가 바닥나면 망설임 없이 먼 곳에서부터 먼저 도착한 파도를 바다는 보여주었다. 간혹 어린 날 띄워 보낸 종이배가 항구에 정박하며 무수한 항해를, 굴곡 많은 항로를 이야기할 것이다. 바다로 가자 누이여, 봄 햇살이 만져지는 대청마루 밑 디딤돌도 가져가자. 바다에 이르면 디딤돌위에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오로지 바다풍경에 잠겨보자.
술 2 /강준애
어릴 적 논둑길 위에서 맛본 막걸리를 시작으로
중학교 2학년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소풍날
교실에서 대충 김밥에 사이다 한잔
개어진 오후
황강변 우거진 나무 사이에 숨어들어
나누어 먹던 소주
여고시절
술을 사이에 두고
밤이 새도록 나누었던 무수한 얘기
스무살이 되던 해
술 잔에 빠져
목에 철심 박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던 그녀
그리고 끊은 술
마흔이 된 지금
맨 정신으로 살기 참 힘들다 (전문)
학창시절, 우리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금기사항을 어겨가며 짜릿한 유흥을 즐겼다. 지금 생각하면 어른들도 우리 나이 때 눈을 피해 구석구석에서 몰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것은 쉽게 가질 수 없고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경계선을 넘었다는 성취감이며, 또래보다 더 한층 성숙했다고 알리고 싶은 스피커용 접근이기도 했다. 일탈을 꿈꾸던 아이들은 자라 이제 마음대로 술 먹고 담배를 피울 수 있지만 문득 몰래한 그날이 그립다. 무엇일까.
아들아 3 /최지현
보름달처럼 훤한 네 얼굴에
입 꼬리가 내려오면
어미의 가슴은 푸섯돌이 되고
어깨가 내려앉은 너의 뒷모습이 보일 때면
어미의 심장에 물소리가 들린다
너와 함께 푸른 꿈들은 나래짓하며 비상하고
차오르는 설레임으로 어미는 몇 밤을 밝혔던가
수없이 외면해도 너는 나의 신이며
애간장 녹아나는 아들이라는 이름
축복이며 천형인 것을 (전문)
신은 너무 바빠서 대신 어머니를 내려 보냈다. 이제껏 해준 것은 기억나지 않고 앞으로 자식을 위해 해줄 것만 생각한다. 그러면서 세월 속에 나이가 들고 주름진 얼굴과 얇아진 어깨를 자식에게 들킬까봐 언제나 씩씩한 모습만을 보이길 소망한다. 조금이라도 연락이 되지 않으면 철렁 내려앉는 부모의 마음을 두고 자식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누비고 다닌다. 충전하지 못해 연락을 하지 못했다는 자식은 열흘 만에 집으로 들어온다. 그래도 들어온 것만으로 고마워 맨발로 뛰어가 자식을 손을 잡는다. 실은 부모가 되기 전, 자식이었을 적에 우리도 그랬다.
나는 지금 매산고택 앞이다 /박 미 경
중문을 열어 두셨네
담장을 따라 시간의 실타래가 이어지고
일곱 해 까지 뛰어 다니던 큰댁보다
축대가 더 높은 집, 쪽마루에 앉으니
매화 꽃 속 인줄 알겠네
멧새소리 개울물소리 앞 산 푸른빛
한데 엮어 시문에 걸고
사랑방으로 들어가 앉으면
안주인이 늦은 점심으로
술 한 상 차려준다면 일 년을 기다려도 좋겠네
취해
한가한 빈집에서 수 만 가지 상상으로
오록서당,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 머릿속을 돌아다니다
생각들은 옷자락을 적시고
매화 꽃피고 삼백 년이 흘렀네
나는 지금 매산고택 앞이다 (전문)
매산고택은 삼백년의 세월을 담았다. 얼마나 많은 계절이 지고 피었을까. 한 인간의 삶으로는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무수한 세월 안에서 꼿꼿하게 버텨 온, 저 매산고택에서 나는 걸음을 옮긴다. 매화나무는 앞산을 걸쳐두었다.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현악 3중주에서 나올법한 꿈의 소리를 연주하고 내가 닿는 곳은 그리움이다. 누군가 다녀갔을 옷깃의 인연과, 못다 한 말을 주저리주저리 쏟아냈을 구름 한 조각. 나는 지금 매산고택 앞이다.
어머니의 기도 /이형태
자고새면 군에 간 아들 생각에
안방 구들 목에 밥 한 그릇 담아 두시던 어머니
객지로 돈 벌러 떠난 자식이나
공부하러 도시로 간 자식이나
혹시라도 끼는 굶지 말라고 한 결 같은 마음으로
밥 한 그릇 소복이 담아 두었다
행여 식을까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솜 이불속에 묻어 두었다
품 안에 자식이나 시집 장가간 자식이나
모두 하나 같이 무탈 하라고
첫 닭 우는 새벽 먼동이면 장독대위에
맑은 정화수 한 사발 고이 올려놓고
지극 정성으로 공들이시던 어머니
이슬 젖은 흰 무명적삼 작은 어깨위로
고이 모은 두 손 끝으로
아침 자장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누가 볼세라 달 빛 아래 별 빛 아래에서
십자가 앞에서 불상 앞에서 오로지 한 마음
하늘에 닿고 땅에 닿았던 그 정성 그 기도
그것은 끝없이 가득한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전문)
첫새벽, 어머니는 늘 일찍 눈을 떴다. 참빗으로 공들여 머리를 단장하고 거울 속에서 어머니만의 세계를 향해 옷깃을 여몄다. 어쩌다가 거울 안에서 어머니의 눈과 마주칠 때면 더 자라고 눈을 껌뻑였다. 거짓말처럼 이내 잠들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궁금해졌다. 잠든 척 어머니 뒤를 따랐다. 올올히 적셔지는 달빛도 있었다. 달빛 아래 첨벙첨벙 새벽 향기가 내 종아리를 적셨다. 어머니는 우물가에서 찌꺼기가 밤새 가라앉은 맑은 물을 길러 장독대에서 정화수로 올려놓은 뒤 빌고 또 빌었다. 어머니의 기도는 계속 되었지만 응답은 없었다. 바람만 덜컹 거렸다.
탈춤 /정용식
結局은 조용한 함성이다.
누각저편
반쯤 꿇어앉은 달빛에
얼굴을 씻는 탈춤소리
아침이 보이고
간간이 쏟아져 내리는
당신의 헛기침이 동구 밖을 맴돌아도
탈춤을 추는 발자국조차 소리 없이
낙엽 지는 곳으로 떠나고 있다.
오색의 신선한 가래를 내뱉는
어제 저녁 숲속으로 속속 달아나는
가을이 보이고
새벽같이 쫒아오는 목탁소리
여미는 노래에
밤이 깊어도 깊어도
서럽지가 않다
어느새 바알갛게 질린 방울소리
역사속의 말발굽 아래 떨어져 나가고
숨소리조차 탈춤을 추며
이 자리를 비우고 있다.
누각(저편)
엎어진 물 조각들은 추스린 옷가지에도
더덕더덕 올라타는 오후가 보였다. (전문)
방울을 울린다. 그 소리 듣는가. 가장 깊은 곳에서 밀어내고 당겨진 삶으로 통하는 문 앞에서 덩더쿵이다. 어깨 짓으로 추임새하고 모난 돌 깎아 둥근 돌로 꽈리를 만들고 나는 멈추지 않을 요량으로 또 다시 덩더쿵이다. 귀를 닫고 눈을 닫고 세상을 닫을 때 비로소 구겨진 삶이 보인다. 엉망이면 어떠하리. 엉망진창이면 어떠하리. 내 멋에 여기까지 왔다. 어차피 인생은 정답이 없구나. 모든 것이 춤이고 모든 것이 탈인데 그래서 탈춤을 추는데.
내 자리 /벽산 한다혜
꽃이 예쁜 것은
때맞추어 풍기는 향기 때문
나무가 좋은 것은
불평 없는 점잖은 뿌리 때문이다.
점잖은 사람은 분수를 알고
분수는 꼭 맞는 자리를 만들어
그 자리로 그 사람을 지켜낸다.
그 곳은 수수하고 덤덤하여
가까이 가면 은은한 향기로 정신이 맑아지고
오래 고은 듯 수수한 맛은 입안에 가득 찬다.
흰 눈이 세상을 덮어도
때를 기다리는 봄처럼
해묵은 내 자리가
향기롭고 점잖기를 염원해본다
이 소망이
세상의 자리가 되어
자리마다 스스로 사람을 길러내길 꿈꾸어본다.(전문)
마흔이면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 어디 얼굴뿐이랴. 행동과 마음도 해당사항이 있으리라. 겸손도 언행도 가급적 상대를 배려하는 넉넉한 마음으로, 세월 속에 깃들여져 불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지 않을까. 사람들에겐 향기가 있다. 어쩌면 자신은 끝내 맡지 못하는 꽃향기 같은 눈물의 찰랑거림이. 자신은 비록 맡지 못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코가 맑아지도록 촉촉한 향기를 준비하자. 그것에 평가는 사랑하나 꽃봉오리 맺힐 것이고 찾아오는 벌과 나비가 마지막 외등 켜진 골목까지 물어 나를 것이다. 그때 슬며시 휘파람을 불면 내 자리가 빛날 것이다.
더위 나기 /김영희
삼각 모양으로 자른 수박을
잘 익은 과육만 다 먹고
남은 부분 우리 집 개 까미에게 던져 주었더니
어느새 싸 악, 다 긁어 먹었는데
한참 뒤 왕개미가 떼를 지어 와서
그 나머지를 또 갉아 먹는게 아닌가
에라, 흰 부분이 고혈압에 좋다던대
다음부터는 내가 먹어치워야겠다 (전문)
어느 계절이 내게 왔나. 수박 하나 두고 빙 둘러 앉으면 여름이 비실거린다. 줄무늬 수박이 여름 쫒는 특효다. 칼만 닿으면 스스로 쩍 갈라지는 경쾌함, 씨를 머금은 속살이 보이고 몇 등분으로 나뉘어졌을 때 둘러앉은 누구는, 눈으로 찜해놓은 색깔 좋은 놈을 골라 한입문다. 붉다. 그것은 처음의 소리이고 달콤하다. 그것은 두 번째 소리이고 시원하다. 그것은 포만감이 얹혀 진 최상의 찬사다. 수박 하나로 행복이 소쿠리에 가득이다. 소쿠리에 담긴 행복을 들고 오늘, 내 걸음은 빨라진다.
봄비 /이준필
봄비가
스쳐간 저 산야
연두 빛 물결이 일렁인다
봄비가
스쳐간 송림지엔
작은 일렁임으로
아침을 알려주네
봄비가
스쳐간 꽃밭엔
새순들이 다투어 솟아 오른다
봄비가
스쳐간 내 맘 속엔
봄의 환희가
행복의 미소로 피어나네. (전문)
겨울은 내일을 염두에 두고 하늘보다 더 먼 곳 창고에 무엇인가 남겨둔다.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은 사람아. 내내 겨울일줄 알고 자물쇠를 채운 열쇠를 버린 사람아. 보는가. 창고에 문을 열면 밑단에 발이 걸리지 않게 조심스레 나오는 봄비를 본 적이 있는지. 햇살 닫고 어깨 짓으로 총총히 걸어 나오는 봄비의 볼은 빨갛다. 사뿐히 내려앉는 저 추임새 좀 보소. 어찌나 고급스럽게 감겨드는지 도무지 혼미해지는 그리움 한 조각.
강자의 법칙 /허 남 기
우리 마을
양계장 손자놈이
샘통을 부린다
눈깔사탕 한 봉지로
대장 노릇 할 때
장난감 나무총으로
동무들을 난사한다
동네 개구장이들이
나 뒹군다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한다
움직이는 놈은 사탕이 없다
무서운 강자의 법칙이다 (전문)
유년 시절, 우리의 놀이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단순했다. 가진 자와 가지지 않는 자가 극명으로 나뉘어져 우위에 군림하였다. 일례로 야구 방망이만 가지고 있어도 실력과는 상관없이 야구시합을 할 때면 항상 주전 자리를 꿰찼다. 누구하나 토를 달거나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심판도 스트라익인데 볼로, 약간 티는 났지만 서로 인정해버렸다. 하물며 나무총을 가졌다는 것은 모든 권력을 쥐고 있다는 말일게다. 수틀리면 마음껏 쏠 수 있는 특권을 쥐고 친구들 속에서 군림했을 게다. 세월이 흘러 사회라는 집단속에 들어와 보니 얼마나 많은 양계장 손자 놈이 득실거리는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굽실 거리는 것은 당연하고 사탕을 주지 않으면서 마구마구 나무총을 발사하는 저 정글의 법칙.
출사 / 김성희
자꾸만 나른해지는 게 가슴골에 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내 안에도 봄이 오는 줄 알았다가, 그랬다가
대구제일영상의학과와 경대병원을 전전했다
피었다 지는 안타까운 꽃 말고
피어서 안 될 꽃이 필까봐
세상에 항복한 포로가 되어
온몸 꽁꽁 묶인 채 삼십분 동안 사진을 찍었다
어린왕자가 쓰던 호기심 가득한 렌즈로
열길 보다 깊은 속을 퍼 올리는데
살아오면서 소화되지 못했던 것들이 끅끅 소리가 난다
힘들 때마다 얼마나 누르고 싶었던 비상벨소리인가
온 몸으로 삼켜가면서, 내가
다독이지 못했던 세월을 무작위로 복사하는 사진사는
내 안에 꽃이 필까 의심스럽다하였다
그 말에 내 가슴속엔 은사시나무가 심어지고
은사시나무는 붉은 몽우리가 꽃망울처럼 터질까봐
환희로 터져버릴까 봐
며칠 동안 시시때때로 흔들리면서 떨고 있다
이 봄날
저도 꽃 인양 발칙하게 피울까봐 (전문)
다만 삶은 무엇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는가. 그 길에서 내려서려고 할 때 길은 한없이 이어져 있다. 반환점을 돌아 왔는지 전봇대와 가로수가 달려온 길에서 만났는지 기억은 없다. 때로 육신 한 쪽이 삐꺽거리는 신호를 보내왔다. 정밀검사에 들어갔다. 세포 하나하나가 일제히 드러나고 만세삼창을 부르듯 일어섰다. 결과가 두렵다. 그다지 악하게 살아오지 않았다. 가족과 이웃과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진 않았지만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데 창밖은 이리도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을까. 관심을 끌지 못했던 풍경들이 다투어 내안으로 들어왔다. 이 봄날.
청문회 / 이희경
서울에 있는 명문대 소위 말하는
일류대학을 나와서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그 친구 그때 잘나간다고
다들 부러워하던 친구
차관본가 제법 높은데서 설쳐댔는데
어느덧 새 정부 들어서고
장관 물망에 오르고 후보 선정 돼서
청문회 거치면 나리 되신다고
그의 고향에선 개천에 용 났다고
난리가 났다
나도 전화를 넣었다
촌놈출세 했구나 축하한다
출세하거든 아는 척이나 좀하라고
조롱조롱 농담도 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선 엉뚱한
대답이 나온다
형! 내가 미쳤나 그거하게
국횐가 뭔가에 불려가서
그들에게 갖은 수모 당하고
자손대대 뒷조사하고
자손 기집까지 까고 제끼고
조선위사 다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본문 중에서)
썰매며 연날리기며, 멱 감기며 서리까지 한 몸처럼 동네방네 붙어 다녔다. 서로의 갈림길은 중학교 들어가면서 부터다. 읍내로 나온다거나 더 큰 도시로 가면서 서로의 격차가 벌어졌다. 그러나 친구의 소식은 여전했다. 높은 곳에 오르면 밑에 소식은 궁금하지 않다. 쳐다보는 밑에 사람들만 위에 소식이 궁금해서 이것도 귀동냥하고 저것도 물어보는 정도. 친구 근황이 비로소 어느 정도 모아졌을 때 안부 겸 근황을 묻는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것은 가진 자의 엄살일 수 있고 살갑지 않는 친구이 음성일 수 있다. 이미 친구는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영역안과 영역 밖을 구분해 버린다. 세상 이치가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도 어쩌면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지경이다.
슬픈 용마의 전설 / 이원석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화살과의 스피드 싸움
어느 순간 먼저 사위를 떠난 화살을 넘어섰다.
주인님이 기뻐하시겠지
구경나온 백성들도 나의 위용에 놀라겠지
드디어 결승점에 도착했다.
근데 뭐지? 주인님이 노하셨네
화살을 못 찾아서 내가 졌다고 생각하시는구나
칼날이 번쩍, 내목이 떨어졌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쓰러진 용마의 운명
사태를 파악한 성주가 탄식하네
아~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다음 세대를 기약하자 (전문)
고려 말 최영장군은 화살보다 빠른 말이라고 믿고 무술을 연마할 때였다. 말은 금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랑하는 말과 화살의 시합을 염두에 두고 철마산에 올랐다. 화살을 쏘고 단숨에 달려 온 말이었지만 화살은 보이지 않아 최영은 격분했다. 내가 이렇게 느려터진 말을 금마라고 불렀는가. 약속대로 단숨에 말의 목을 베었다. 곧이어 말보다 느린 화살이 그제야 꽂혔다. 뒤늦은 후회를 한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최영의 기개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판단은 졸속이었다. 울분도 분노도 결정도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더 큰 그림이 보이지 않을까. 시인도 한걸음 물러서서 보면 자신의 시詩가 눈부시게 피어오른다.
나무 /최은하
화평당 약국 앞
고무함지박에 뿌리가 갖혀
초췌한 낯빛으로 여름을 맞는
나무 한 그루
스스로 흔들리며 일으킨
조촐한 바람으로
보건소 진료 받고
약 타러 화평당 약국 들어서는
버석한 노파의 머리칼
작게 쓸어주고
때로 다리 아픈 약사에게
드문드문 돋은 잎사귀 모아
초라한 그늘 드리워주며
마냥 행복해 하는
금호 화훼단지 모종하우스가 제 고향인
저리도 가지 허약한
나무 한 그루 (전문)
나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과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속에 나무가 거기 있다.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지면 나무는 자신의 고향을 생각한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어느 찰나에 나무는 뿌리를 두고 한걸음에 고향을 찾는다. 작은 씨앗하나가 비롯된 곳. 발아되고 소생하여 빛을 본 그곳에 다녀온다. 뿌리를 두고 가는 이유는 곧 돌아 올 것이란 약속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인간으로 눈으로 가늠할 수 없는 빠르고 빠른 복귀復歸. 어둠이 한 곳에 모여 꼭짓점을 만드는 시간. 나무가 고향에 다녀오는 시간엔 깨어있지 마라.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나무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이곳에 올려 놓는 것이 맞나요?^^잘못 올려졌으면 적합한 자리에 부탁합니다~
잘 감상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밖은 지금 비가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