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전 날은 항상 집에 있으면 뭔가 부담이 되는 것 같다.
뭐 별시리 할 일도 없으면서 부엌을 한 번씩 쳐다 보아야 하고...
그래서 어제 먹은 숙취도 깰 겸 해서 나는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서울에 계시는 제수씨도 일찍 와 있고 하니 마음 푸근히 나섰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생각한 대로 앞 정류소에서 86번 버스를 탔다.
항상 술이 반 술이 되면 타고 그냥 꾸벅꾸벅 졸면서 아니면 돌아오는 나의 여행코스.
별로 사람이 많지 않아서 나는 차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차를 타고 가면서 지나가는 사람, 풍경, 간판, 그리고 또...
오늘은 낮이니 볼거리가 아주 많다.
분주히 오고가는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내일에 있을 설을 준비하는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왜 이렇게 한가롭게 차를 타고 하염없이 거리를 나섰을까?
그 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종점에서 종점으로 돌아오는 시내 구경을 하는 버릇 때문이다.
나는 그 여행을 한 달에 한 벌 꼴로 하는 편이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86번, 87번의 종점이 있어서 즐겨하는 편이다.
오늘도 86번 버스는 연산교차로를 지나 양정 하야리아 부대를 지날 때
미군,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왜 우리는?
이 넓은 요지의 땅을 우리가 아닌 그들에게 내 주어야 하였는가?
생각을 하다보니 버스는 서면을 거쳐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다.
좌천동, 수정동, 골목골목을 돌아 돌아 산복도로 산기슭을 끼고 돌아서...
멀리 내다보이는 부산 앞바다와 영도, 부두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다닥다닥 붙은 층층 계단으로 이어지는 집들이 보인다.
대청동을 돌아 남포동을 지나서 구덕운동장.
또 다시 오르막길을 지나서 해광고등학교를 지나서 민주공원에 종점에 내렸다.
비오는 오전 시간은 한적하고 고즈녘하다.
오름길을 올라 묵념도 하고 내려다보이는 조망을 하면서 혼자의 시간을 가졌다.
건너편에는 조각공원도 있고, 도서관도 있고, 바다도 보이고, 4.19 충혼탑도
그리고 민주공원답게 근현대사의 일들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 보였다.
휘둘러 보고 걸어서 계단길을 내려오는데, 할머니 한 분이 어렵게 오름길을 오르고 계신다.
연방 휴우 소리를 내면서 삶의 지친 모습을 계단처럼 지나온 날들을 이야기 해 주는 것 같았다.
보수동 책방 골목을 돌아서 국제시장을 돌아보니 한산한 골목이었다.
대각사 대웅전에서 엎드려 삼배를 올리면서 옛날 청년회 활동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자리를 깔고 가만히 앉아서 나를 찾아 보았다.
그러나 나는 보이지 않고 나를 굽어보고 계시는 부처님이 나를 빙그레 웃으며 내려다 보신다.
다시 돌아서 부평시장에서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살아 있음을 느끼면서
이리저리 쏘다니다 점심으로 호박죽 한 그릇을 먹는다.
우산을 받쳐든 나는 걸리적거리는 것을 피해서 광복동 거리를 지나
PIFF 거리를 걸으면서 또 다시 생각을 멈추어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밀리는 사람들에 의해 자갈치 시장을 휘둘러 본 후
나는 집으로 오는 87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한 번씩 떠나는 시내버스 여행은 오늘도 이렇게 비를 맞으며,
또 걸으며 특히 계단길을 걸으면서 나는 생각을 많이 하여 보았다.
언젠가 다시 같은 여행을 할런지는 모르지만,
멈춰지지 않는 나의 여행은 또 다시 이루어질 것이다.
섣달 그믐날 낮에 비오는 거리를 거닐면서
선들메/박홍재.
첫댓글 비오는 날, 특히 봄비오는 날 한분위기하죠_종점에서 종점으로 그런 시내버스 나들이도 괜찮네요,난 그날 오전에는 큰집에서 찌짐굽고,돌아 오면서 우산쓰고 쇠미산 한바퀴 휘 둘러서 왔는데... 두시간 소요
오늘은 백양산 공룡을 돌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종점에서 종점으로 가는 여행은 고딩시절부터 나의 특허 여행이었답니다. 비오는 날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려면 길을 걸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들쑤시며,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이 역마살이여.^^
산으로 그리고 사람이 사는 마을로 돌아다니는 것은 아마 나의 전생의 인연이 깊은가 봅니다.
형님 좋은 드라이브를 즐기시는군요.저도 가끔은 이용합니다.창 밖으로 스치는 삶의 모습들...부촌과 빈촌의 사람의 모습....900원의 드라이브 괞찮더군요.ㅎㅎ
정말 맛을 들이면 놓을 수 없는 좋은 여행감이야.
반쯤 취한 눈으로 글을 보니 반밖에 안 보여 잘 모르겠지만, 로맨티스트 같은데요. 방금 졸업식을 마쳤는데, 학교장 회고사 쓸 때 좀 더 낭만적으로 쓸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양산 한 바퀴하고서 서면을 거치는 동안 오늘이 졸업식이라는 것을 알았어. 젊음이 넘치더구먼. 잘 있자?
부처님께 삼배... 나를 찾아가는 길... 삶은 끝없이 나를 찾아가는 길일까요... 부처님 손바닦안에서 울고 웃고 끝없이 헤맵니다.
그래도 나는 몸부림을 쳐야만 하는 것을... 삶을 살찌우기 위하여...
좋은 여행을 하셨네요... 새해도 건강한 한해가 이어지길 대구에서 빕니다.
얼굴 보기도 힘드네. 새해에 새로움에 힘찬 전진이 있길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