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에 올린 유가사 글로 여기저기서 질타와 격려를 받았다. 깊이 없이, 천박하게 표현하였다고 용서를 구하며 순화,첨삭하여 사진과 함께 올린다. 그 이후 발길을 하지 않았는데 다시 찾은 유가사는 김봉렬 교수가 찬탄했던 건물배치도 사라질 운명이었다.
옛님방 거창 답사기에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우리 아이들이 초딩 때 참 많은 곳을 다녔었다.대구근교는 물론이고 전국을 헤매었으니 다녀온 곳이라고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가지 않을려고 했을 정도였었다. 교육목적이었는지 마누라도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답사와 멀어지고 늘 혼자 나섬에 익숙해져 있는데 친정 나들이 후에 유가사를 가고 싶다는 마누라의 낮은 음성이 왠지 전신을 휘감으며 십여년 전 아이들과 함께한 그길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산길만 포장된 것이 아니라 없었던 일주문의 위세(?)에 눌려 신성한 사찰공간에서 삼겹살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의 후안무치한 피서문화를 제지할 힘마져 없다.
찬 포산 이성 관기 도성
相過踏月弄雲泉
포장된 산길을 올라가면 유가사 진입로의 백미인 자연 암반이 노출되어 박석 같은 느낌의 진입공간이 예전의 맛을 살려주지만, 좌우에 탄탄대로(?)의 포장길을 조성하여 절집 옆구리로 중정으로 객과 승이 드나들고 있으니,미련한 나를 욕해야 되는건지, 세련된 그들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박석의 촉감을 간직한 채 계단을 올라서면 천왕문에 들어설 맘을 송두리체 앗아가버린 간주석에 용이 휘감고 용트림을 하고 있는 두 기의 석등을 볼 수 있다. 무슨 연유로 천왕문 앞에 석등을 조성하였는지 유례가 없는 불사에 심사가 편치 않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천왕문 안에는 일반적인 사천왕과 지물이 불일치 하지만,답사객의 기를 다시한 번 죽이는 시방루를 피해 멀치감치 자리하고 있는 문에 卍자를 새긴 단칸 전각에 다가서니 조사당 현판을 달고 가람을 맞보고 있다. 이런 경우도 있는가? 조사당은 주불전 보다 높은 곳에 위치함이 옳지 않은가? 송광사의 척주각,세월각,표충사의 가람각,통도사 가람각 처럼 망자의 혼이 잠시 머무르는 공간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어찌했던 시방루 누하진입을 하지 않고 불사중인 해우소를 지나 중정에 들어서서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위에서 열거한 대웅전의 맞은 편에 삼세불을 측면에,아미타불을 전면에 모신 시방루는 "세상의 방향을 새롭게 만든다"라는 의미라지만 루대에 부처를 모신 예는 본적이 없어, 후세사람의 평가는 차치하고 금빛 찬란한 기와가 대웅전 부처를 장님으로 만들지 않을른지 모르겠다.
시방루 삼존불
옛님카페 눈꼽채기 방에 올렸던(101 번) 유가사의 가람배치를 보면 -- "대웅전의 서쪽, 나한전→ 용화전→ 산신각으로 연결되는 건물들 간의 관계다. 진입한 다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대웅전→ 나한전→ 용화전→ 산신각의 순으로 따라가며, 신도들의 동선 역시 그렇게 움직인다. 이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몇 가지 치밀한 건축적 조작을 통해서 얻어진다.
내 기억으로는 대웅전 정면에 탑이 있었는데,상륜에 찰주,벽사, 비보인지 용도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사지창을 설치한 탑이 언제부터인지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탑에 조금만 관심을 가진 사람이면 쉽게 고려탑으로 인식되는 석탑은 유가사 인근 원각사지에 흩어진 부재를 수습 1920년에 중정에 조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시방루 불사를 하면서 탑을 중정에서 옆으로 치우치게 한 것이(내 기억이다.사진도 없다) 기막히게도 좁은 중정에 쌍탑을 조성하기 위해 그랬던 모양이다.
물론 유가사 사적에 쌍탑의 기록이 보인다면 나의 답사는 죄송스러운 건방진 글이 되겠지만... 불사를 하는 것은 좋지만 종교를 초월하여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세세년년 물려 줄 불교문화유산인데, 대구시도, 문화재청도 업무 영역이 아니라고 뒷짐지고 있는 동안 불사라는 미명으로 문화유산의 고유성, 시대적 정체성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석등은 빈자일등 설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이제는 모든 가람에 쌍석등으로 조성한다지만 유가사는 천왕문 앞에 두 기, 좁은 대웅전 중정에 두 기,아니 정확히 4기가 있다..즉 기존의 하복련이 곱게 돋을새김 된 두 기의 석등 하기단이 있으며, 바로 옆에 고복형 석등 2기가 새로히 조성되어 있으니 유가사에는 6기의 석등이 있는 셈이다.
괘불대. 괘불대가 엄연히 있음에도 스테인레스 괘불대를 흉물스럽게 설치하여 안그래도 좁은 중정에 게양대처럼 하늘을 향해 있다.
석등부재. 아마추어인 내눈에도 두기의 하기단 간주석 홈으로 미루어 짐작컨테 분명 팔각원당형의 석등의 흔적이기에 기왕이면 기존 하대석을 활용하여 팔각원당형의 석등을 조성했더라면, 대웅전 앞에 유례가 없는 석등 4개 모습은 없었을텐데, 누구의 안목인지 존경(?)스럽기 그지 없다.
1979년 중창된 유가사 대웅전은 맞배지붕에 다포계 양식의 공포를 지녔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외벽에는 산수도가 그려져 있다. 후면에는 1996년에 봉안한 영산회상도가 있고 좌우로 칠성탱과 신중탱이 봉안돼 있다. 칠성탱은 1966년 우송(友松)스님이 그렸으며 신중탱은 조성연대를 알 수 없으나 칠성탱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화봉(華峰) 등 5명의 스님과 사미 2명이 참여해 조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영산회상도와 지장탱, 괘불 등이 대웅전에 있었으나 1993년 모두 도난 당했다. 그 중 괘불은 영험이 있어 인근 마을 주민들이 가뭄이나, 질병, 병란 등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봉안하고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대웅전 기단
중앙의 불단에는 석가모니불을 위시해 좌우로 문수, 보현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모두 목조로 조성했다.
용화전과 담장 너머 산신각. 예전에 용화전에는 석조여래좌상이 있었다. 이 부처님이 아래 사진의 전각으로 옮겨가면 유가사 가람배치의 멋은 사라지지 않을지. 뒤에 있는 산신각은 이미 불사가 되어 절묘한 배치의 맛은 사라졌다.
출처...문화재청
불상은 미륵불로 불상과 대좌가 모두 같은 석질의 화강암으로 조성됐으며 얼굴 전면과 양 무릎을 시멘트로 보수하였으나 그 외의 부분은 비교적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인 육계가 높이 솟아 있다. 얼굴 모양은 갸름한 달걀형으로 목에 있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뚜렷하지 않다. 어깨는 각이 지고 힘이 들어가 있으며, 가슴은 양감있게 돌출되었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을 감싼 편단우견으로 상반신은 그 유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을 크게 열었다.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였는데 왼손은 길상좌를 하고 있는 오른발 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결가부좌한 다리에는 법의 주름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형태 면에서 석굴암 본존상과 같은 계열의 불상으로 볼 수 있으나, 불상의 어깨가 좁아지고 가슴의 탄력이 감소되는 등의 변화를 볼 수 있으며 대좌도 방형으로서 10세기 이후의 유행을 반영한 것으로 이 불상의 연대를 추정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대좌 밑 하대석에는 여러 가지 수인을 하고 있는 불보살이 양각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다.
용화전? 산신각 부도
김지대는 고려 고종 때의 문신으로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이다. 영헌공 김지대는 고려시대 10대 시인에 꼽히는 문장가로, 조선 성종 때 대학자인 서거정(徐巨正)이 저술한 ‘동문선(東文選)’에도 시가 여러 편 실려있을 정도로 문학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중 현재 유가사 시방루에 시문 현액을 만들어 걸어놓은 ‘유가사’란 시가 있는데 그가 한때 유가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달밤에 차를 마시고 다음과 시를 읊은 것이다.
瑜伽寺...김지대
寺在煙霞無事中:절은 경치가 한가한 가운데 있는데 亂山滴翠秋光濃:어지러운 산 푸른 물방울 가을빛이 짙었네 雲間絶磴六七里:구름 사이로 가파른 돌 비탈길 예닐곱 리요 天末遙岑千萬重:하늘 끝 먼 멧부리 천만 겹이어라 茶罷松畯掛微月:차 마시기 그치니 솔 처마에는 초승달 걸렸고 講蘭風榻搖殘鍾:강론 끝난 바람 부는 탑에 쇠잔한 종소리 울려오네 溪流應笑玉腰客:흐르는 시냇물 응당 허리에 옥띠 띈 손을 웃으리 欲洗未洗紅塵蹤:씻으려도 씻기지 않는 속세의 발자취라네
2010.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