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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豊 柳 마 을 원문보기 글쓴이: 南齋
2015년 실학훼밀리 추계 역사기행-2) 김성일 종택 / 경북독립기념관 / 내앞김씨
2015년 실학훼밀리 추계 역사기행-2)
2015. 12. 4~5. 안동
학봉 김성일 종택 / 경북독립기념관 / 내앞 김씨
학봉 김성일 종택
김성일 (金誠一, 1538년~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순절하였다. 1590년 일본에 통신사 부사로 갔다와서 일본이 침략을 하지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여 보고함으로써 임진왜란 발발 이후 큰 비판을 받았다.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특히 학봉 문중에서는 학봉이 남긴 "3년동안 금부도사가 찾아오지 않으면 선비 집안이 아니다.라는 말을 가훈으로 여겨 왕에게 직언을 하는 문중으로 영남 유림의 중심 문중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었을 때 그는 광국원종공신 1등의 한 사람으로 특별히 책록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진주성 전투에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전사한 공로로 사후에는 선무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다.
어린 시절[편집]
할아버지는 김예범이고, 아버지는 김진(金璡)이며 어머니는 민세경(閔世卿)의 딸 여흥민씨이며, 그는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 망계(望溪) 김만근(金萬謹)이 안동으로 이사와 정착했으며, 할아버지 김예범은 병절교위를 지내고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지만 아버지 김진은 관직이 없었다. 아버지 김진은 1592년(선조 25) 김성일이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면서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1562년승려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진사시, 1567년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관료 생활 초반[편집]
이후 정자·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종계변무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1579년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1579년 함경도순무어사가 되어 영흥·함흥·삼수·길주·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나주목사가 되어 도내의 민폐를 해결하였다. 당시 김여물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임진왜란 직후[편집]
1592년 임진왜란 직후의 음력 6월 28일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김성일을 비꼬며, 그 정도(징후 운운) 이상의 말을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김성일은 통신사로서 일본에 갔다가 막 돌아와서,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지혜가 미치지 못한 바가 있어서 그러했던 것인가. 동시에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黃允吉) · 허성(許筬) 같은 사람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렵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김성일만이 유독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괴이하다."[3]
일본에서의 통신사 이야기도 여기에서는 자세히 쓰고 있지 않으나,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기 전 몇개월 동안이나 기다리면서도 정사인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이 두려움이 앞서 말을 꺼내지 못할 때도 부사 김성일 만이 만남을 독촉하였고, 최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만한 답서에 대해서는 부사 김성일 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한다. 지금도 통신사가 묵었던 곳에 부사를 기리는 비석이 남아있다
임진왜란과 죽음[편집]
전란 초기[편집]
김성일은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 일대가 일본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 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었다. 퇴계 이황의 학문적 적통을 이어받은 수제자로서 왕실의 권력이나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백성을 위한 직언을 하기로 유명하여 경상도의 흩어진 민심을 모으기에는 가장 적합하다는 류성룡 등의 천거에 의해 선조의 사형 명령이 철회되고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된 것이다.
이후 즉시 경상도로 내려가 격문을 지어 흩어진 백성을 불러모으는 한편, 이미 어지러워진 군율을 바로 세우는 데에 몰두한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뿌리고 군량으로 쓸 양곡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 조정에서 곽재우를 처벌하려는 기색이 있자, 양자를 화해시켜 이를 원만히 수습하기도 하였다.
진주성 전투와 사망[편집]
김성일은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김시민 장군은 당시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서, 진주 목사와 산에 숨어 있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의 명으로 목사직을 대리하여 진주성을 지키게 되었다. 초유사는 당시 곡창지대였던 호남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왜군이 반드시 경상도에서 호남으로 넘어가기 위해 진주성을 침략할 것임을 내다보고 진주성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관군과 의병이 함께 진주성을 지키도록 해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1차 진주성 전투)을 진두지휘했다. 이후 1593년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병사했다. 병사하는 순간까지도 나라의 운명과 붕당의 폐단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사후[편집]
사후 1604년(선조 34) 선무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다. 그에 따라 1592년 이조참판 겸 동지에 추증되었던 아버지 김진은 다시 증자헌대부이조판서 겸 의금부지사에 가증되었다.
1606년(선조 38)에는 학봉 본인에게 증가선대부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에 추증되었고, 1607년(선조 39)에는 임하현에 그를 모신 임천향사가 세워졌다. 임천향사는 1618년(광해군 10) 사액을 받고 임천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를 모신 사당은 존현사(尊賢祠)라는 현판을 받았다. 1676년(숙종 2) 증자헌대부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에 가증되었고, 1679년(숙종 5) 문충(文忠)의 증시가 추서되었다.
1619(광해군 11년) 묘비석이 세워졌으며 한강 정구가 찬하였다. 1664년(현종 5)에는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가 신도비문을 지었다.
종손 김종길
서후면 금계리에 있는 학봉 김성일 종손가 소장 고문서이다. 고문서에는 학봉의 교지(敎旨)·교서(敎書)·유서(諭書)·소지(所志)·분재기(分財記) 등 10,0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임금에 직언하는 강직한 성품
넷째 아들인 학봉 김성일의 강직한 일화가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진다. 1573년 9월 학봉이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선조가 경연장에서 “경들은 나를 전대(前代)의 어느 임금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정언 정이주가 “요순 같은 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더니, 학봉이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桀紂)도 될 수 있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임금이 “요순과 걸주가 이와 같이 비슷한가?”라고 물으니 학봉이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타고난 자품이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으시니 이것은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주상이 얼굴빛을 바꾸고 고쳐 앉았으며 경연에 있던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서애 유성룡이 나아가 아뢰기를 “두 사람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이라고 응답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이니,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도 얼굴빛을 고치고 신하들에게 술을 내게 하고서 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잘 공개하지 않는 사당을 종손이 공개하면서 불천위와 사대 봉사하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다
종손 종부와의 간담회에서는 귀한 다과와 찰떡 등 많은 정성어린 대접을 받다
다산 선생 종부 박영자 여사와 딸 정우진양을 소개하다.
雄府의 府와 貞淑의 淑자를 따서 ‘부숙’이라는 식당명을 땃다는 식당의 음식은 깔끔하여
경상도 음식이 맛이 없다는 개념을 완전히 깨는 맛집 그 자체였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좌측이 내앞(川前)마을
1000인의 독립투사 이름이 소개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안동인들이 참가한 서간도 길림성에서 전개된 삼원포 만세운동의 재연 세트
어디서나 이익을 좇아 뛰는 무리가 줄을 잇게 마련이지만, 안동에서는 그보다 어느 길이 바른가를 묻고 찾는 목소리가 더 큽니다.눈앞의 이익에 매달리는 현상이 보편적인 세상이지만, 안동에서는 무엇이 옳고, 또 더불어 가는 길인지를 따지는 주장이 더 선명합니다.안동이 그 어느 곳보다 정신문화가 충만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사실 평소에는 그러한 성격을 알아채기 힘듭니다. 그런데 겨레가 나라를 잃었을 때 안동사람들이 보여준 항일투쟁, 독립운동을 들여다보면, 그러한 특성을 얼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안동사람이 펼친 독립운동은 한국의 자랑만이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도 우뚝합니다. 이런 사실을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리려고2007년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세웠졌습니다.대개 기념관이라면 지역이나 조상, 문중을 자랑하려고 드는 데서 출발합니다.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적절한 선이면 다행인데, 분에 넘치는 경우도 쉽게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조상 자랑에 목매다가, 심하다 못해 조상을 욕보이는 경우도 흔합니다. 하지만 우리 기념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기념관은 조상 자랑에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조상들의 뜻과 삶을 제대로 알고,이를 계승해 나갈 사람을 키워낸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상을 자랑하는 데 시간을 보낼 만큼 여유롭지 못합니다.나라사랑이야말로 바로 우리 차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정신으로 열심히 여러분야의 사업을 추진하여 온 지 8여년이 지난 2014년1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확대승격 되었습니다.지금까지 해왔던 나라사랑 역사체험학습, 독립운동유적해설사 양성, 독립운동가 후손 상담과 지원 등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사 발굴과 연구, 출판과 전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경상북도 지역으로 확대하여 전개 합니다.지금까지 보내주신 격려에 감사드리면서, 앞으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 펼치는 사업에도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감사합니다.
관장 김희곤
내앞김씨 종손: 김창균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년)을 중시조로 모시는 의성김씨 내앞(川前) 종택이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내앞 종택은 조선 선비의 강렬한 정신이 어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강렬함이란 권력의 부조리를 정면에서 고발하는 직언(直言) 정신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기백을 가리킨다.
내앞 종택은 그 기백과 의리 때문에 조선시대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직접 체포영장을 들고 찾아와 종택 뜰에 말을 매는 일대 사건을 세 번이나 겪어야 했다. 안동지역 인근에서 회자되는 ‘유가(儒家)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속담은, 자신의 신념과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금부도사의 체포영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으로 받아들였던 조선 선비들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내앞 종택은 조선 선비의 기개가 전해오는 집이다.
오룡지가(五龍之家)의 명문
내앞 의성김씨들이 명문가로 알려진 계기는 중시조인 청계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면서부터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다. 일제 강점기에 촌산지순(村山智順)이 지은 ‘조선(朝鮮)의 풍수(風水)’에도 명택의 사례로 완사명월형에 자리잡은 오자등과택이 소개되고 있다. 다섯 아들을 오룡(五龍)에 비유해서 오룡지가(五龍之家)라 칭하기도 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보면 아들 다섯 명이 과거에 합격하면 국가가 혜택을 주었다. ‘아들 다섯이 과거에 오른 부모에게는 임금한테 보고하여 해마다 쌀을 보내 주었으며, 부모가 죽으면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지내준다’는 예전(禮典)의 조항이 그것이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그 다섯 아들 모두가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서 각각 일가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더 중요하다.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1522∼1585년), 구암(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년), 운암(雲岩) 김명일(金明一, 1534∼1570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1541∼1591년)이 바로 그들이다. 장남인 약봉은 내앞의 대종택에서 살았지만, 나머지 네 아들은 안동 인근으로 분가하여 각기 소종택을 형성하였다. 이 소종택들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버지인 청계의 교육방법이다. 어떻게 교육했기에 아들 다섯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강직한 선비로 키울 수 있었을까? 그 교육철학은 무엇이었는가?
내앞 집안의 독립투사들
의성김씨는 조선시대 대·소과 합격자가 무려 100여 명에 달하고 문집을 남긴 인물이 9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문명(文名)이 높은 집안이다. 그러나 이들의 벼슬은 그리 높지 않았다. 청계가 후손들에게 ‘벼슬은 정2품 이상 하지 말고 재산은 300석 이상 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기 때문이다.
높은 벼슬에 집착하기보다는 향리의 서당과 서원에서 글을 읽으며 자족하는 처사(處士)의 삶을 보낸 사람도 많다. 벼슬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면세계를 다지는 내공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의리정신은 구한말 의병운동과 만주 독립운동에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내앞 사람들의 의병과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별도의 책 한 권이 나올 정도로 방대하다. 청계공 탄생 500주년(2001년 2월)을 기념하는 학술논문집에 수록된 조동걸 교수의 논문 ‘안동(安東) 천전문중(川前門中)의 독립운동’이란 내용 중에 인상적인 부분을 발췌하면 이렇다.
내앞에 살던 66세의 백하(白河) 김대락(金大洛, 1845∼1914년)은 경술국치(1910년)로 조국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자 엄동설한인 12월24일 만주 서간도로 망명한다. 이 노선비는 서간도에 갈 때 혼자 간 것이 아니라 만삭 임신부인 손부와 손녀를 데리고 간다. 일본 식민지에서 증손자들이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일본신민이 되는데 이를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하일기’에 따르면 목적지 유하현으로 가는 도중인 1911년 2월2일과 23일에 손부와 손녀가 해산을 한다. 엄동설한의 눈밭에서 난산을 했다고 전해진다. 병원도 약도 구할 수 없어 버선과 신발이 얼어붙을 정도로 동분서주하고, 마을 성황당과 칠성님께 비느라 손발이 얼어터지는 참담한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 김대락은 증손자의 이름을 중국(唐)에서 태어나 통쾌하다는 뜻으로 쾌당(快唐), 외증손자는 고구려의 건국시조 고주몽(高朱蒙)의 고장에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기몽(麒蒙)이라고 지었다고 하니,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가 막힌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문중 원로가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더구나 만삭인 손부와 손녀가 뒤를 따르는 걸 보고 감명을 받은 내앞 사람 22가구 50여 명이 대거 만주로 건너갔다. 이런 걸 보면 양반은 그냥 양반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내앞 출신의 독립투사 중 대표적인 두 사람을 꼽는다면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과 월송(月松) 김형식(金衡植)이다. 일송은 1923년 상해에서 독립운동자 총회인 국민대표회가 열릴 때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표로 참가하여 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일송 김동삼
백하구려는 운천 김용선생 후손으로 안동에서 사람 천석, 글 천석, 식량 천석으로
삼천석댁이라 불릴정도로 가세가 좋았고 백하 김대락선생의 고택으로 1885년(42세)
지었다고 하며 김대락선생은 이 집을 개화기 근대학교인 협동학교 교사로 제공하고
애국게몽운동에 앞섰고 교사로 쓰던 별채 사랑은 없어지고 축대와 초석만 남아있다.
선생은 나라가 무너지자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 독립군기지를 이끌다 1914년 작고
여동생 김락과 집안조카 김만식.김정식.김규식.종손자 김성로가 선생의 뜻을 이어
항일투쟁을 하였고 이들의 공적을 기려 2009년 백하구려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김대락(1845~1915)은 만주에 들어가 백두산 기슭에 산다는 뜻에서 白下라 별호하고
도사를 지낸 우파 김진린의 7남매중 장남으로 출생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부 김현수와 족속 김흥락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손으로 유학적인 삶을 살아왔으며
1905년 안동에 대한협회를 조직해 항일주권수호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사재를 털어
구국운동 전개 1907년 협동학교를 설립 신문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1909년에
신교육이 時措之宜 時中之道라 인식하고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실로 제공하여
영남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1911년 66세의 몸으로 전가족을 이끌고 서간도 유하현으로
망명 이상룡,이동녕,이시영등과 신흥강습소를 설치 경학사 공리회등을 조직하고
자신의 집을 비롯한 전재산을 신흥무관하교 건림자금에 보탰으며 도와 덕이 중심된
유교적 이상사회이면서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시대관이 담긴 대동사회를 꿈꾸었다.
만주망명후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고 안정된 정착을 위해 노력하닥 1814년
삼원포 남산에서 사망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백하구려(白下舊廬)
백하의 후손 김시중씨가
국내를 통틀어서 첫 번째의 문중 단위 집단 망명이었다. 일행에는 백하의 손자며느리와 시집 간 손녀까지 있었는데, 둘 다 만삭이었다. 안동에서 추풍령까지 1주일을 걸었다. 거기서 기차를 타고 서울 거쳐 신의주까지 간 다음 다시 걸어서 압록강 너머 최종 목적지인 유하현 삼원포에 닿은 것이 1911년 4월 10일. 손부와 손녀는 유하현으로 가는 도중 2월에 해산을 했다. 엄동설한에 일제의 눈을 피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갔으니, 고생이 오죽했을까.
내앞마을은 백하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공자를 25명이나 배출한 마을이다. 전국 시ㆍ군 단위 독립운동 유공자 수가 평균 35명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숫자다. 내앞마을의 의성 김씨 망명객은 150여명에 이른다. 백하의 내앞 문중을 시작으로, 1911년 무렵 안동과 주변 지역에서 만주로 독립투쟁하러 간 사람은 100여 가구 약 1,000명에 이른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김동삼(1878~1937), 백하의 아들로 해방 직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을 맡았던 김형식(1877~1950)도 이 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내앞마을은 안동 시내에서 영덕 방향으로 15㎞ 지점, 임하댐 입구 보조댐 앞에 있다. 마을 앞으로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이 흘러 내앞(川前)마을로 불린다. 의성 김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안동에서 하회마을과 쌍벽을 이루던 곳이다. 하지만 하회 모르는 이는 없어도 내앞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마을이 거의 통째로 만주로 가서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만주로 간 일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느라 가세가 기울고 후손은 흩어진 탓이다.
마을에는 백하의 고택 '백하구려(白下舊廬)'와 김동삼의 생가가 있다. 백하구려에 살고 있는 후손 김시중(73)씨는 방 안 벽에 선조들의 독립투쟁 훈장증과 이 집을 임시교사 겸 기숙사로 썼던 협동학교 관련 기사가 실린 일제강점기의 황성신문 복사본을 붙여놨다. 백하 집안의 독립 유공자는 백하를 비롯해 막내 여동생 김락, 조카 만식 정식 규식, 규식의 아들 성로 등 6명이다.
1907년 내앞마을에서 문을 연 협동학교는 경북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다. 류인식 등 혁신 유림이 설립했다. 의성 김씨 문중 서당인 가산서당에서 출발한 이 학교는 1919년 3ㆍ1운동 이후 강제 폐교될 때까지 독립 투사의 산실이었다. 초기에는 지역 유림의 반대가 극심했다. 위정척사를 외치며 개화에 반대하던 보수 유림으로서는 신학문도, 학생들의 단발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10년 7월에는 의병이 협동학교를 기습해 교직원 3명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백하구려 마당의 큰 바위가 그들이 피를 뿌린 곳이다. 김시중씨는 "귀신 나오는 바위라고 해서 어릴 때 밤에는 무서워 마당에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백하도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의병 투쟁이 곳곳에서 일제에 패하고 망국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1909년 초 그는 혁신 유림으로 다시 태어난다. 육십 평생 보수 유림으로 살아온 선비가 세계관의 대전환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백하구려의 사랑채를 협동학교 교사로 내주고 지원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변화는 안동 지역 뿐 아니자 전국에 영향을 끼칠 만한 큰 사건이어서, 황성신문은 '교남 교육계에 새로운 붉은 기치'라는 제목의 논설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백하의 변모는 그 무렵 독립운동 단체 '대한협회보'를 읽고 쓴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드러난다. "늙은이 눈 어두워 죽은 듯이 누웠다가 창문에 기대어 대한서를 읽는다. 폐부를 찌르는 말 마디마디 간절하니 두 눈에 흐르는 눈물 옷깃을 적시네." 뼈저린 대오각성이었다.
만주에서 백하는 매부인 이상룡(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과 함께 한인 자치조직 경학사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세워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매진하다 1914년 삼원포에서 세상을 떠난다.
'돈 천 석, 사람 천 석, 글 천 석'의 '삼천 석 댁'으로 불리던 백하 집안도 독립운동으로 쇠락했다. 김시중씨는 "사람과 돈이 모두 없어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안이 엉망진창이었다"고 말한다. "선조들의 독립투쟁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몸서리 나도록 들으며 자랐죠. 독립운동 이야기, 양반 이야기가 제일 듣기 싫었어요. 만날 굶고 경찰에 불려 다니는데 좋겠어요? 瀏굘?나이가 드니 집안 할매, 아지매들이 해준 그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생각 나요. 백하 할배만 해도 그래요. 망명 당시 65세였는데, 요즘으로 치면 구십 노인 아녜요? 죽으러 간 거지."
백하의 묘는 찾을 길이 없다. 일제가 훼손할까 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가 위치를 알 수 없게 됐다. 2002년 안동의 의성 김씨 선산에 가묘를 쓰면서 역사학자 조동걸이 비문을 지었다. "백하는 유학자, 선비, 계몽주의 민족운동가,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독립운동 선구자다… 세상에 외치노니 지사연 하는 학자가 의리를 찾는다면 여기 와서 물어보라. 애국자연 하는 위정자가 구국의 길을 묻는다면 여기 와서 배우라, 저승으로 가는 늙은이가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지혜를 구한다면 여기 와서 묻고 배우라고 하자."
시아버지·남편·두 아들·사위까지 항일 투신3·1운동 참여했다가 고문당해 두 눈 잃어■ 독립운동 3代, 그 명가를 지켜낸 김락
여성 독립운동가는 무척 드물다. 그것도 신여성이 아니라 전통 양반 가문의 안주인이 항일투쟁에 나선 경우는 찾기 힘들다. 그런데 10년 전인 2000년 여름, 일제가 쓴 '고등경찰요사'를 읽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안동 양반 이중업의 아들 이동흠이 "내 어머니가 3ㆍ1운동 때 일제 수비대에 끌려가 두 눈을 잃고 11년 동안 고생하다 돌아가셨으니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결코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딱 넉 줄 적혀 있었다. 그 어머니는 누구인가. 추적에 나섰다.
족보에는 의성 김씨 김진린의 딸이라 적혀 있다. 그렇다면 안동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 김대락의 막내 여동생이다. 친정 제적등본에 적힌 형제자매의 이름은 모두 김대락처럼 김O락인데, 주인공인 막내만은 그냥 김락(1862~1929)이다. 하는 수 없이 그 이름으로 독립유공자로 신청하고 포상받게 되었다.
김락이 3·1운동에만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독립운동가 3대를 지켜낸 중심인물이다. 열다섯 살에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로 시집가서, 양산현령을 지낸 이만도의 맏며느리이자 이중업의 아내가 되었다. 새댁 시절 시어머니를 여읜 그는 시누이와 시동생을 돌보며 안방 주인으로서 집안을 도맡았다. 그런데 1895년 시아버지는 예안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고, 남편도 마땅히 함께 나섰다. 일제의 공격으로 이웃 퇴계 종가가 불타는 황망한 가운데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고 집안을 지켰다.
48세 되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시어른은 24일 단식 끝에 순국했다. 장례를 치르고 상복에 눈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아버지처럼 여기던 큰오빠 김대락과 김동삼 등 친정 집안이 대거 만주로 망명 길에 나섰다. 큰 형부 이상룡 집안도 함께 갔다.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떠난 고난의 길이었다.
남편과 두 아들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4년 남편 이중업은 안동과 봉화 장터에 격문을 돌렸다. 맏아들 이동흠은 대한광복회에 가담했다가 구속됐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남편은 '파리장서'라 불리는 독립청원서를 발의하고, 강원도와 경북 지방 유림 대표의 서명을 받는 일을 맡았다. 바로 이때 김락은 57세의 나이에 예안면 만세운동에 나섰다가 일본군 수비대에 붙잡혔고, 취조를 받다가 두 눈을 잃는 참극을 당했다.
앞을 못 보고 귀로만 듣고 살던 터에 다시 놀라운 일과 마주쳤다.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떠나던 남편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한숨 짓는 사이에 맏사위 김용환이 일제에 붙잡혔다. 학봉 김성일의 종손인 맏사위는 만주 독립군 기지를 지원하던 의용단에 가담했던 것이다. 김용환은 '조선 최대의 파락호' 소리를 들으며 노름꾼으로 위장해 독립자금을 댔다. 그 바람에 요즘으로 치면 100억원이 훌쩍 넘을 종가 재산이 거덜났다. 둘째 사위 류동저는 안동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둘째 아들 이종흠은 1925년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고, 그 바람에 두 아들이 모두 잡혀갔다. 이런 사이 두 번이나 자살하려다 가족들 손으로 살아난 그는 1929년 2월 67세로 눈을 감았다.
35년 동안 시가와 친가 모두 독립운동으로 해가 뜨고 졌다. 그 한가운데 김락이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현재 그의 사진 한 장 없다. 그가 시집 가서 살던 하계마을은 1970년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됐다. 쓸쓸하고 횡한 마을에 독립운동 내력을 전하는 기적비만 남아 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자취는 잊혀질 수 없다. 안동에서 그를 되살려 인형극을 공연하고, 뮤지컬을 준비하는 것은 '겨레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의 삶을 제대로 기리기 위해서이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ㆍ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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