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지역에 동학이 전래된 것은 1890년이었다. 서산 지곡면에서 최초로 최형순은1890년 3월 16일에 동학 제2교조 최시형 선생을 방문하여 동학에 입도하였다. 최형순은 주로 서산·태안지역을 중심으로 충청도 전역을 무대로 동학교리를 선포하니, 뜻밖에도 호응이 좋았다. 1893년 12월 초순경에 상암 박희인이 그릇장수로 변장하여 방갈리(가시내)에 들어와서 조운삼을 입도시키고, 다시 갈머리 마을로 들어가서 문장준과 문장로, 문구석 부자를 입도 시켰다. 그리고 조석헌은 다음해 상암의 권유에 의하여 동학에 입도하고 그해 5월에 태안 접주로 피임되었다. 태안지역에 동학이 전래된 이래 교세가 급성장 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농민들이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림을 받아 동학에 입도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한 태안 지역의 동학 세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왕성했다. 특히 태안 지역에서도 원북면 방갈리와 이원면 포지리가 교세가 강했다. 그것은 지리적 조건과 신망 있는 지도자 등 여러 가지 여건이 좌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최형순에 의하여 입도한 동학 교도와 박희인에 의해 입도한 교도들이 합세하여 방갈리의 동학 세력은 날로 확산되어 갔다. 그리고 갈머리 문구석의 집과 가시내 조문필의 집에서 교도들이 비밀리에 모여 동학 교리를 상암으로부터 직접 강의를 받았다. 이렇게 교육을 실시함으로서 그 효과가 더욱 커져서 나날이 그 세력이 확대되어 태안군 전역으로 그 교세가 불과 2~3년 동안에 큰 세력으로 뿌리를 내렸다. 이 과정에서 조석헌, 문장준의 역할이 돋보였다.
태안 동학농민혁명의 불씨
태안지역 동학의 전파
1894년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2일) 화요일 날씨 맑음. 상오 9시 출발 동면 율도리 이용준 집에서 점심에 술을 마시고, 북이면 동해리 정재영, 고현으로 신곳리 신도휴 집에서 저녁에 일반교인 40여명과 대산교수 안재환도 와서 경암장과 본인의 교리를 설명하고 교세를 점거하여 조직을 하다.
음력 8월 28일(양력 9월 23일) 수요일 날씨 맑음. 상오 8시에 출발하여 관송방 축리 박윤화씨 집에서 일반교인 30여명이 모여 교리를 강연해 주고 교세를 점검하고 조직을 하다.
위 북접일지 기록과 같이 동학은 도처에서 전파되어 활동했으며 동학민들로부터 큰 호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라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자유 평등 사상이었다. 충청도 서부 특히 내포지역의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주된 기포지는 원북면 방갈리(현 태안화력발전소 부지)와 근흥면 수룡리에 있는 토성산 및 이원면 포지리 등이다. 이곳에서 작전계획을 세우고 근서면· 안흥면 및 원일면· 원이면 · 소근면 등지에서 출병한 600여 명이 모였다고 한다.
태안성점령
1894년 10월 1일 아침, 태안 관아를 에워싼 동학 농민군은 원북면, 방갈리, 이원면 포지리, 근흥면 수룡리, 남면, 안면도 등지에서 기포하여 군내 일원에서 수천 명의 교도가 모였다. 이때 태안 관아에 투옥된 동학 두목 30여 명을 처형 직전에 무사히 구출하고 태안 군수 신백희와 안무사 김경제를 즉석에서 처단하였다. 태안 읍성이 동학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급보를 접한 홍주목에서는 5백여 명의 병사를 급히 보내 태안 읍성을 수복하고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의 민심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태안의 동학 농민군은 군사 조직을 점검하고 동도 대진소를 설치하여 대오를 편성한 뒤, 1894년 10월 22일 태안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서산을 경유하면서 그곳 동학 농민군과 합류하여 해미와 신례원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첫댓글 어마어마하게 짓고있더니 벌써 개관~~
좋은 정보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