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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정법원은 11월7일 삼성반도체 노동자였던 유명화님의 재생불량성 빈혈과 고 이윤정님의 뇌종양이 모두 직업병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두 노동자가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보상 신청을 한 지 4년 5개월여 만에 내려진 판결이다.
유명화·이윤정님은 삼성반도체 온양공장 내 검사 공정에서 일했다. 검사 공정은 생산된 반도체 칩이 고온·전압 등의 스트레스를 견뎌 내는지 검사하는 곳이다. 공정 특성상 화학물질을 직접 취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러 세부공정을 거치며 반도체 칩에 누적된 다양한 유해물질이 반도체 칩 표면이나 공기 중으로 복합 노출될 위험이 있다. 고온 테스트 설비 안에서 반도체 칩이 일정시간 동안 섭씨 120도로 가열되기 때문이다. 유명화·이윤정님과 동료들은 고온 테스트를 마친 직후 반도체 칩 표면에 검댕이 묻어났고 설비에서 고무 타는 듯한 냄새가 났다고 했다. 냄새와 검댕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두 노동자가 근무했던 온양공장은 2009년 서울대 산학협력단의 조사에 의해 부실한 안전관리 실태가 드러났던 곳이다. 대표적으로 지적된 문제가 공장에서 취급하는 단일 화학물질 중 22.2%에 대해서만 작업환경 측정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노출가능한 약 78%의 화학물질에 관해서는 전혀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다. 3종의 물질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성분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2010년 5월 두 노동자에 대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가 시작되자 회사는 업무 관련 자료를 제출했다. 총 9페이지에 불과한 자료의 대부분은 작업내용에 대한 기술적인 설명과 인사카드, 인사발령 내용 등이었다. 업무환경에 대해서는 “투입물질이 전혀 없어 작업환경 측정대상은 소음뿐”이라며 소음 측정 결과만을 제출했다. 산보연도 유명화님에 대한 역학조사를 실시하며 벤젠 등 10가지 화학물질에 대해서만 노출수준을 측정했다. 검사 공정에서 노출가능한 포름알데히드·에틸렌옥사이드·다핵방향족탄화수소에 대해서는 측정하지 않았다. 측정하지 않은 물질에 대해 구체적인 근거 없이 “그 노출수준 역시 매우 낮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힐 뿐이었다. 재해노동자들이 질병을 유발한 유해물질로 지목한 ‘고무 타는 듯한 냄새’와 ‘검댕’에 대해서도 조사하지 않았다. 이윤정님이 경우 화학물질에 관해 따로 조사하지 않은 채 유명화님에 대한 조사 결과를 그대로 차용했다.
역학조사평가위원회에서는 일부 심의위원이 조사가 부실하다며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산보연은 그대로 조사를 종결했고, 근로복지공단은 조사 결과에 근거해 산재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요컨대 회사의 안전보건관리 수준은 엉망이었고 산보연의 업무환경 조사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회사는 노동자의 건강에 별 관심이 없었고 근로복지공단은 재해노동자의 업무환경이 실제 어떠했는지 밝힐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LCD 등 첨단 전자산업 현장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노동자들이 각종 유해물질을 취급하며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데도 회사는 취급물질의 유해성과 유해인자 노출수준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다. 일하면서 잦은 두통과 구토 증상·피부 이상·생리불순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급기야 백혈병·뇌종양 같은 중증질환에 걸려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하면, 공단은 “질병과 업무 간에 상당인과관계가 없다”며 불승인 처분을 내린다. 업무환경이 유해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유해성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유해성을 알 수 없게 된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회사가 업무환경에 대한 자료를 제대로 구비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그나마 있는 자료조차 영업비밀이라며 은폐하기 때문이고, 고용노동부가 그것을 방치하기 때문이며, 근로복지공단조차 유해성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문제가 제기된 지 7년이 흘렀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서울행법은 위와 같은 문제 상황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이러한 사정은 상당인과관계를 추단함에 있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참작함이 마땅하다.”
재판부는 나아가 “특정 화학물질과 질병 사이의 관련성이 아직 연구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을 관련성이 없다 또는 낮다는 판단의 근거로 삼아서는 아니 된다”는 이유도 붙였다.
판결의 표현대로 직업병 인정 소송에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사정은 노동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참작함이 ‘마땅’하다. 그러한 사정이 만들어진 데에는 기업과 정부의 책임이 있을지언정 재해노동자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질병의 업무관련성을 따질 때 (역시 이번 판결의 표현대로) 작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상의 위험을 사업주나 근로자 어느 일방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보험을 통해 산업과 사회 전체가 이를 분담하도록 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목적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
이제라도 법원이 근로복지공단의 과오를 바로잡은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너무 늦은 감이 있다. 두 명의 재해노동자는 생사를 오가는 투병 중에 그들의 질병이 업무와 무관하다는 공단의 처분을 받고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윤정님은 소송이 진행되던 중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만일 산보연이 역학조사를 제대로 했더라면, 근로복지공단이 ‘업무관련성’이라는 직업병 인정기준을 제도의 취지에 맞게 규범적으로 잘 판단했더라면, 재해노동자들과 가족의 고통이 크게 줄었을 것이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은 지금 항소 여부를 고민 중이라고 한다. 바로 떠오르는 이가 있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처음 세상에 알린 황상기님이다. 그 역시 삼성전자의 부실한 안전관리로 딸을 잃었고 산보연의 부실한 역학조사에 의해 산재불승인 처분을 받았다. 공단의 최종 처분이 내려지기까지 2년5개월이 걸렸고, 그 처분의 위법성을 소송으로 밝혀내는데 1년6개월이 걸렸다. 다행히 1심에서 산재인정 판결을 받았지만 공단의 항소로 인해 다시 3년여의 법정 투쟁을 벌여야 했다. 올해 8월에 나온 고등법원의 판결은 원심의 결과를 그대로 인정한 채 확정됐다. 딸 유미씨의 백혈병을 직업병으로 인정받기까지 무려 7년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공단이 처분을 잘못한 데다, 반성 없이 항소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재해노동자들은 산재보상제도의 존재 이유를 묻게 된다. 나아가 근로복지공단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기관인지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묻고 있다.
공단은 지금 항소 여부를 고민할 때가 아니다. 부실한 역학조사의 원인이 무엇이고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업무상질병의 인정기준이라는 것이 결국 무엇을 판단하는 기준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당장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가 왜 존재하고 있는지부터 진지하게 따져 봐야 한다. 노동자들의 산재인정 투쟁은 사측의 과도한 결벽증과 국가기관의 본분을 망각한 보신주의 등이 덧씌워져 복잡하고 힘든 싸움이 돼 버렸지만, 그 본질은 아프고 병든 노동자와 가족에게 치료비와 생계비를 어떻게 보장해 줄 것인가의 문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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