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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가는 길
사도행전 21:1~16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다시 일행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항해를 시작하여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여행 도중에 사도 바울 일행이 들른 초대 교회 성도들과의 만남은 우리의 마음을 찡하게 해주는 사랑의 교제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교제 속에서 사도 바울이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겠다는 그의 굳은 결의를 굽히지 않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서, 저 하늘의 예루살렘 성, 천성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우리가 어떠한 신앙적 자세를 갖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되새김질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밀레도에서 두로 항까지 가는 바울 일행의 노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로부터 3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사도 바울 일행은 지금의 튀르키예 서남부 지역에 있는 밀레도 항구에서 배를 타고 고스 섬과 로도 섬을 들르고 연안 항구들인 바다라 항구를 들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튀르키예 남부 연안 항구를 하나 하나 들르다가는 너무 늦어질 것 같아서 바라다 항에서는 직접 지중해를 가로질러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바로 가는 배를 만나 갈아탑니다. 그 배는 지금의 이스라엘 북쪽 레바논 연안에 있는 페니키아 항구로 직행하는 노선을 항해하는 배였습니다. 며칠 걸리는 이 항해가 끝나고 베니게 곧 페니키아의 항구인 두로에 배가 도착하자 사도 바울 일행은 그곳에서 내립니다. 왜냐하면 그 배가 배의 짐들을 먼저 풀고 다음 항해를 이어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배의 짐을 항구에 내리는 하역 작업은 이레 정도가 소요되었기 때문에 그 배를 계속 타고 남쪽으로 더 항해할 사도 바울 일행은 두로에서 며칠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 일행이 그 두로 항구에서 일주일 동안의 기간을 어디서 어떻게 지냈을까요? 4절에 보면 두로에서 사도 바울 일행이 믿음의 형제들을 찾아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두로 항에서 머물게 된 사도 바울 일행은 여관 집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두로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찾았습니다.
두로라는 도시는 과거 지중해를 주름잡던 해양왕국의 본거지로서 로마와 자웅을 겨루던 저 아프리카 북부의 카르타고 도시 국가의 실질적인 주인이었습니다. 에스겔서 28장에서는 두로 왕국의 멸망에 대한 슬픈 노래가 나오는데, 그 해상 교역을 통하여 많은 부를 축적한 두로 왕과 그 왕국의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두로의 영광을 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그 예언대로 그 영화로웠던 두로 왕국 곧 페니키아 제국은 바벨론 제국과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차례로 정복당하고, 페니키아의 식민도시였던 카르카고의 영광도 역시 1차, 2차, 3차에 걸친 로마 제국과의 100년간의 전쟁 곧 포에니 전쟁에서의 완전한 패배로써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일행이 도착했을 당시의 두로 시는 한 때 바다의 제왕으로 불렸던 영광은 사라지고 이제 그 영광이 창기의 슬픈 노랫가락에나 간신히 남아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쇠락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도 은혜를 주셔서 복음이 증거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겨나 성안에 복된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그 교회에 연락이 되어 갔을 때 그들은 사도 바울 일행을 전적으로 환영하여 쉴 수 있도록 숙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처럼 얼굴을 처음 뵙는 경우일지라도 기꺼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확인만 있다면 기꺼이 맞아 들여서 사랑으로 교제하며 머물며 돕고 교제하는 한 가족들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이름은 이방인 교회에서 크게 드러나 있었기도 하였기에 그들은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을 가까이 섬기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과 일행이 두로의 형제들과 함께 지내는 교제의 과정에서 두로의 성도들 중에 예언의 은사를 받은 형제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언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크나큰 시련과 환난을 만날 것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사도 바울을 아끼는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 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중에 이레가 순식간에 지났습니다. 배가 출발할 기한이 차자 사도 바울 일행은 두로 형제들과 작별해야 할 시간을 맞았습니다. 5절과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에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그들은 사도 바울과 선교단 일행이 두로에 머무는 그 한 주간 동안에 두로 형제들과 서로 깊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의를 나누게 되었으며, 그들은 헤어지는 것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더욱이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엄청난 고난이 그에게 닥칠 것이라고 성령께서 알려주셨기에 사도 바울에 대한 깊은 염려가 두로 형제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하여 두로의 형제들은 자기들의 아내와 자식들까지 전부 다 데리고 나와 사도 바울을 전송하려고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을 배웅하려고 배가 있는 항구의 바닷가까지 나와 헤어지기 전에 함께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고서 서로 작별한 후에 기다라던 배에 오르고 배가 출항하여 떠나는 것을 보고 나서 그들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두로 해변에서의 이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이자 친구인 의사 누가는 이 인상적인 모습을 직접 보면서 마음이 뭉클하였기 때문에 배에 함께 올라탄 후에 손을 흔들며 바닷가에 머물러 바울을 전송하다 돌아가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한 광경을 여기에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시절의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다시 한번 이 광경을 통하여 충분히 짐작하게 해줍니다. 성도의 만남과 헤어짐 속에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었고 그들은 바닷가의 모래바닥에 함께 무릎을 꿇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해주심을 함께 간구하며 깊은 형제애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거룩한 가족된 그리스도인들의 형제 됨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바로 그러한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아버지, 한 주님, 한 성령, 한 믿음, 한 사명, 한 구원, 한 천성을 향한 길을 함께 걷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하늘의 가나안에서 함께 모여서 거기서 영원히 살게 될 그 날까지 이 땅에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으로서 서로의 영혼을 아끼며 서로의 앞길을 위하여 기도해주면서 힘써 사랑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이제 사도 바울 일행이 탄 배의 다음 기항지는 돌레마이 항구입니다. 7절을 읽읍시다.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둘레마이는 두로에서 남쪽으로 하룻길인 항해 거리에 있는 항구였습니다. 엘리야의 영적 싸움터로 유명한 갈멜산에 가까운 항구로서 당시 그 이름이 과거 애굽의 황제 이름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이름인데 옛날에는 악고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던 곳입니다. 이 항구에 도착함으로 배를 타고 항해하는 모든 일정은 끝이 납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그 날 저녁쯤 도착하여 돌레마이의 형제들에게 연락을 취하여 안부를 묻습니다. 그들도 역시 두로의 형제들처럼 기쁘게 사도 바울 일행을 맞이하여 자기들의 집에서 그들을 모시고 대접하고 함께 하루를 보냅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여행을 할 때에 언제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들과 이러한 신앙 안에서의 교제를 나누면서 큰 위로를 얻곤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 안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에 다음 날 그들은 또 다시 육로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그 다음 그들이 도착지는 가이사랴입니다. 돌레마이로부터 가이사랴까지의 거리는 100리가 넘는 거리여서 꼬박 하루를 계속 걸어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사도 바울 일행은 자연스럽게 전도자 빌립의 집을 찾아갑니다. 8절과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누가는 빌립에 대하여 초대 예루살렘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서 현재 그의 영적 직분이 전도자라고 소개합니다. 아마도 12사도 중 한 분인 빌립 사도와 구별하고자 이렇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요 전도자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교회를 개척했던 분이요 성령의 감동으로 에디오피아 재무장관 격인 내시를 전도하였던 분이요 팔레스타인 서부 해변 도시를 다니면서 전도하다가 가이사랴 시에 거주하면서 복음 전도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 집사가 처음 복음 전도자로 나섰을 때에는 그의 딸들이 어린아이들에 불과했었는데 이제는 그 딸들이 장성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아 예언하는 처녀들이 되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기록에 의하면 빌립은 오래 장수하였고 후일에 소아시아의 골로새 곁의 히에라볼리로 옮겨와서 네 딸과 함께 전도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 전도자 빌립의 집에 사도 바울 일행이 머무는 동안인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옵니다. 아가보가 빌립 집사 집을 방문하고자 왔다가 우연히 사도 바울 일행과 마주친 것인지 아니면 성령께서 아가보 선지자를 감동하여 성령으로 이끌어서 전도자 빌립의 집으로 와서 사도 바울을 만나게 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두 번째 가능성이 큽니다. 그 때에 아가보 선지자는 사도 바울을 보고서 예언을 합니다. 10절과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 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아가보 선지자는 일찍이 사도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 교사로 있을 때에 안디옥 교회에 들러서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고 예언하여서 그대로 이루어졌고 안디옥 교회가 그 기근을 인하여 고생하는 유대 교회를 위하여 구제 헌금을 마련하여 전해준 바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아가보가 전도자 빌립의 집에 와서 또 다시 사도 바울을 보자 그의 허리띠를 가져가더니 자기의 손과 발을 묶고서 “성령께서 이르기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의 예언은 단순한 말로만 하는 예언이 아니라 행동을 수반한 인상적인 예언 형태를 취하였는데, 이것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이 종종 행하던 예언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솔로몬 왕 때에 아히야 선지자가 여로보암 청년을 들판으로 불러낸 후에 자기의 새 옷을 열두조각으로 찢고서 여로보암에게 열 조각 천을 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우상 숭배의 죄로 인하여 열두 지파 중에서 열 지파를 다윗 가문에서 취하여 여로보암에게 넘겨주겠다고 하신 예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라’고 하는 예언을 줍니다. 이는 장차 애굽과 구스의 백성들이 바벨론 군대에게 짓밟혀서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끌려갈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이사야 20:2). 또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날카로운 칼로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서 그 터락 중에 일부는 성안에서 불사르고 일부는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삼분의 일은 바람에 날려 보내라고 하였습니다(에스겔 5:1~2). 하나님께서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성이 멸망하되 이처럼 불사름과 칼로 죽고 사방으로 흩어질 때 칼이 뒤따라 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 예언은 말로만 하는 예언보다 더 강력한 시각적 효과가 있습니다. 아가보의 이 예언은 매우 강력하여 사도 바울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 결박되고 유대인들과 이방인 곧 로마 당국의 손에 의하여 고난을 당할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이로써 그 동안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오면서 여러번에 걸쳐 그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예고한 환난의 예언은 이제 너무나 명백하게 사도 바울 자신과 그 일행에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도의 일행들과 가이사랴의 빌립 집사님의 가족들과 제자들은 사도 바울에게 울면서 말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제발 올라가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사도 바울은 울면서 말리는 형제들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의 결연한 결심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번 예루살렘 방문이 그의 생애에 마지막 방문이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이방 교회의 대표로서 이방 교회 성도들이 그 동안 사랑과 기도로 모았던 유대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전달하여서 이방 교회와 유대 교회와의 화해를 도모하는 방문이기에 꼭 자신이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이 사도 바울의 중대한 교회론의 핵심이라는 것은 후일에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쓴 에베소서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만약 유대 교회와 이방 교회가 서로 하나가 되지 않고 서로 다른 교회로 나눠져 성장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몸을 찢는 행위이기에 사도 바울은 자기 한몸 희생해서라도 교회의 하나됨을 이루어야 하겠다는 간절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를 위하여 이번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을 것도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이 결연한 사도의 각오의 말을 듣자 울면서 매달리던 형제들도 더 이상 말리지 못합니다.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사도의 결연한 말을 듣는 순간 형제들의 마음도 숙연해졌으며 그들은 울음을 그치고 마음을 정돈한 다음에 이르기를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사도의 예루살렘행에 대하여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며칠 더 지난 후에 모두가 다시 여장을 꾸려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갈 때 동행합니다.
15절,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여러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가이사랴의 빌립 집에 머물던 사도 일행은 이제 여행 채비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90킬로미터의 거리이니 이틀 내지 삼일을 걸려서야 올라갈 수 있는 먼 거리입니다. 그 길을 사도가 올라갈새 사도 바울 혼자만 가지 아니하고 가이사랴의 형제들 중에 몇 명 제자가 함께 따라나서주었습니다. 또한 그 가운데 구브로 태생의 나손이라는 나이든 제자 한 사람도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나손은 오랜 제자라 하였으니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 시절부터 예수님을 믿었던 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도 넓은 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나손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지낼 수 있도록 이번에 따라 나선 것입니다. 초신자도 귀하지만 오랫동안 변함없이 주님과 교회와 주의 종들을 섬기는 헌신적인 제자도 심히 귀함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여기서 말해주고자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대하여 성령께서 들르는 각 성마다 환난과 결박이 그를 기다린다고 하는 예언의 말씀을 그에게 들려 주신 바 있습니다. 그가 빌립보 교회에서도 그런 예언을 들었고 드로아 교회에서도 그런 경고를 들었으며 두로 성도들에게서도 그런 경고를 들었고 빌립 집사의 집에서 그의 네 딸들과 아가보 선지자까지도 예언하여 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난을 당할 것이고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이방인 로마 당국에게 넘겨질 것이라는 구체적인 예언까지 들었습니다. 이런 예언 중에 형제들은 절대로 올라가지 말라고 눈물로 탄원하며 말리는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사도 바울은 결연하게 굽히지 않고 예루살렘 행을 고집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성령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 고집으로 예루살렘 행을 고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도 바울의 고난과 환난을 예고하곤 있지만 사도의 예루살렘 행이 성령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이라고 하는 말씀을 성령께서 사도에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성령께서 여러번에 걸쳐 형제 공동체에게 사도의 예루살렘 방문에 큰 환난과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말씀을 주신 것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러한 고난과 시련에 대하여 마음의 준비를 계속 시켜주는 것이요 형제들에게도 사도 바울을 위하여 기도로 돕도록 하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과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장로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당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이라는 예언을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일러주셨는데, 그 때마다 제자들은 뜯어말리기도 하고 듣기를 싫어하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실 것을 홀로 준비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홀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밤새 기도하심으로써 준비하시어 체포되시고 고난당하고 불법 재판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일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미리 여러 차례 알려 주었으나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준비 없이 맞이하였기에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다들 예수님을 버려두고 제 살겠다고 도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번에 사도 바울도 홀로 자기의 갈 길을 알고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데, 성령께서 여러 차례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사도 바울의 앞길을 위하여 예언하므로써 사도 바울도 준비시키고 교회 형제들도 그 예언을 통하여 사도 바울의 고난을 알고 함께 눈물로 기도로 동참할 수 있게 해주심으로써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 고난을 너끈히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교회 공동체에도 이렇게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의 고난을 알려줌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사도의 고난을 알고 홀로 두지 않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동행해줌으로써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번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는 길이 외롭거나 두렵지 않도록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도 교회는 이렇게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 된 사랑과 격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에 함께 문제를 나누며 기도와 사랑으로 격려하며 힘을 나누어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교회와 성도들 모두에게 항상 있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사도 바울의 이번 예루살렘 방문에서 생각할 수 있는 점은 사도 바울이 주님을 섬기는 길에서 앞에 고난과 환난이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기까지도 각오하였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마음 속 깊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서 혹 우리 생명이 바쳐진다 해도 기꺼이 주님을 믿고 섬기는 길을 그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와 다짐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을 섬기고 그의 뜻을 이루는 길이 항상 평탄하고 형통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여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이 다 평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흔히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다가 일이 순조롭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길에는 때로 환난과 결박과 투옥도 기다리곤 합니다. 대적들이 일어나고 공연한 소란이 생기고 장애물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럴 경우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가 됩시다. 그렇게 고난 중에도 순종하며 나아갈 때에 주님께서 피할 길도 주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번 예루살렘 여행이 그 후에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 고난 중에 펼쳐져서 후일에 그로 하여금 전혀 뜻밖의 섭리의 방법으로 로마로 인도하는 길이 열리는 것처럼, 고난과 역경 중에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우리의 인생 길에도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주님의 보호와 성령의 위로와 놀라운 인도하심이 계속하여 뒤따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