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맞이하여 통영으로 갔다.
아들 친구의 부모와 우리 식구들이 모두 잘 알고 가끔씩 만나는 관계다.
통영으로 발령을 받아 관공서에 근무하고 있어서 내려오면 구경시켜 준다고 하여 간 것이다.
가는 길에 창녕의 영산휴게소에 들렀다.
영산현은 辛氏(신씨)들의 관향으로 영산신씨, 영월신씨 시조가 터를 잡았던 곳이다.
영산(영월) 신씨 인물을 살펴보면 고려 말 妖僧(요승) 신돈은 영산현 출신으로 옥천사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정확히 누군지 모른다.
대구 출신의 원로 정치인 신도환은 체육계의 거물이기도 하였으나 고인이 되었다.
울산 출신의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는 죽을 때까지 그룹 경영을 맡고 있다가 이복형제들인 아들들 신동주와 신동빈의 내분으로 곤욕을 치렀다.
통영에 도착하여 미륵도로 넘어가 점심을 먹었다.
미륵도는 행정구역상 통영시 산양읍이었다.
미륵산케이블카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관광객을 많이 실어 나르는 통영의 효자상품이다.
박경리기념관에 먼저 들렀다.
박경리는 1945년에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으나 남편이 6.25에 의용군에 끌려가서 죽을 때까지 과부 아닌 과부로 살았다.
아들은 사고를 당하여 일찍 죽고 딸은 저항시인 김지하와 결혼하였다.
이런 시련과 고난을 많이 겪었으니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 같은 큰 작품이 나오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미래사를 갔다.
미래사는 구산스님이 스승인 효봉스님과 석두스님을 모시기 위하여 근세에 지은 절이며 법정스님이 행자 시절에 여기서 살았었다.
절 옆길로 가면 편백나무 숲길이 있고 끝에는 바다를 조망하고 산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라 쉬기에 좋았다.
다음으로 洗兵館(세병관)을 찾았다.
입구에 “통제사이하개하마” 라는 下馬碑(하마비)가 있었다.
이 정도 되면 지방에서 관찰사 이외는 모두 다 말에서 내려야 한다.
바로 위에 望日樓(망일루)가 있는데 뜻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해를 바라보는 누각” 으로도 볼 수 있고 군사시설이다 보니 “일본 즉 왜군의 동태를 살피기 좋은 누각” 으로도 해석되기도 한다.
세병관은 조선의 3대 누각 중 제일 규모가 큰 영남루보다 더 넓었다.
조선시대 건축물 중 한양의 경회루, 여수의 진남관과 같이 바닥면적이 가장 넓은 건축물이라고 한다.
특이하게도 바닥 위에 좀 더 높은 단을 설치한 구조였다.
세병관은 "병사를 씻기는 곳 또는 병사들이 씻는 곳"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그런 뜻이 아니었다.
"병장기(무기)를 씻고 보관해 두는 곳"이다. 즉 병장기를 씻는다는 것은 전쟁이 종식되고 평화가 오고 태평성대를 맞이하고픈 열망을 담아 지은 집이다.
안에는 시인묵객이 지은 시나 문장은 전혀 없고 역대 통제사와 그 휘하의 장수와 군관의 명단을 적은 편액이 사방으로 가득했다.
역사에 이름이 있는 통제사로는 인조 임금의 외숙인 구굉의 이름이 있고, 이순신 장군의 직계후손인 이봉상의 이름도 있었다.
이봉상은 이인좌의 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청주에서 참살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충청도수군절도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전라우도수군절도사를 거느리는 지금으로 보면 해군참모총장이라고 보면 되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상설직으로 운영되었으며 도원수는 전란 시 임시직으로 지금의 합참의장 격으로 보면 되는데 그 당시 권율 장군이 도원수를 맡았다.
다음에는 동피랑을 올랐다.
동피랑은 경상도 말로 “비름빡에 그림을 그려놓은 곳”이다. 피랑이 벼랑의 사투리인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골목길 좌우 벽에 그림을 그려놓고 또 거기에는 카페 등 점방들이 즐비하게 들어 있었으며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중앙시장에서 회를 떠서 관사로 가서 에어컨 아래서 회를 먹고 잤으며 다음 날 연명항으로 가서 청솔산악회에서 간 적이 있는 연대도, 만지도 가는 배를 타고 연대도의 산꼭대기 바람이 부는 곳에서 쉬었다가 대구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