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라는 이름의 우물"
성당 근처의 한 편의점에 음료수를 사러 들어갔더니, 족히 일흔은 넘어 보이는 손님과 젊은 직원이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알 수는 없었지만, 나이도 어린 사람이 예의가 없다면서 그 할아버지 손님이 호통을 치는 중이었다. 젊은이도
처음부터 태도가 좋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욕을 먹어니 기분이 상해서 그런 것인지 그리 공손하는 않은 말투로 맞대꾸를
하고 있었다. 보고 있기가 괴로운 상황이라 누군가 말리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잘 모르는 남의 일에 오지랖 넓게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만 슬그머니 나와 버렸다. 그 후 며칠 동안 그 일이 마음에 남아서 입맛이 썼다.
나날이 무례해지는 우리 인간들과 달리 창조주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존중하시고 친절하게 대하신다. 요한 복음에는 예수
님께서 어떤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시는 장면이 나온다.(4,1-42)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도 남편 아닌 남자와 살고 있는
이 여자는 절대로 행실이 조신한 여자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또박또박 말대답을 하고 슬그머니 대드는 것만 봐도 보통이 아닌
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여인아," 하고 당신 어머니께 쓰시는 존칭으로 부르시며 의젓하고 정중하게, 참을
성 있게 말씀하신다. 평생 남자가 많았던 이 여자도 아마 자기를 이렇게 점잖게 대해 주는 남자를 처음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보면 성모님께서도 루르드에 발현하셨을 때 시골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먼저 숙여 인사를 하셨다. 상대가 무례한데
내가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무례를 무례로 갚는 사회는 망하는 일만 남았을 뿐 가망이 없다.
예의는 상대를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마음의 태도이고 수고스럽더라도 그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지, 누가 더 높은
사람인지 겨루는 싸움 도구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무례하다고 해서 나도 똑같이 예의를 저버린다면 이왕 발생한 피해가 내
탓으로 곱빼기가 될 뿐이다. 물론 모두가 조금씩 수고를 나누어 상호 배려하는 사회를 이루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남이 무
책임하다고 해서 나까지 책임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
예의는 마을 사람이 함께 쓰는 우물과 같아서 다 같이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한두 사람이라도 우물가를 더렵히면 마을 전체가
고통을 받고, 너도나도 그 참뜻을 저버리게 되면 우물은 점점 오염되어 원래의 쓸모를 상실한 흉물, 예컨데 권위주의 같은 것으로
변하고 만다. 마을의 청소년들에게 그것이 귀한 보물이니 지켜야 한다고 설명해 준들, 냄새 나고 통행에 불편을 주는 진흙 구덩
이를 어째서 지켜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몰이해는 어린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며, 소중한 유산을 제대로 관리
하지 못한 어른들의 공동 책임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우물을 깨끗이 만들어야 한다. 착하신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좋은 일이 너무 늦는 법은 없다. 남에게
예의를 지키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내가 예의를 지켜야 한다. 모두를 위해 내가 먼저 지키는 것, 그것이 예의를 지켜야 한다.
모두를 위해 내가 먼저 지키는 것 그것이 예의의 본 모습이니까. 화답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꾸준히 인사를 하고, 존대를 하고,
자리를 비켜 주고, 문고리를 잡아 주고,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 하지 않는지 마음을 써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해서
맑은 물을 조금씩 다시 채우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적고 보니, 결국 예의의 제일 큰 적은 내 속에 들어 있는 교만이구나, 교만한
내가 무례한 세상을 만들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글. 정태우 아우구스티노 신부 / 이곡성당 주임
2024년 7월호 성모님의 군단 책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