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고도 허망한 그 뒷자리 / 정호경
어려서부터 붕어낚시를 많이 해서인지 노년에 이른 지금, 나는 괜한 살생의 죄의식에 사로잡혀 무언지 모르는 두려움에 은근히 떨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으니 일곱 살의 나이에 이웃집 대밭에서 몰래 꺾어 만든 대나무 끝에 어머니의 반짇고리에서 몰래 찾아낸 두툼한 무명실을 두세 발 매달아 시작한 낚시질이 팔십이 넘은 이 나이까지도 붕어를 걸었을 때의 팽팽한 그 떨림의 감동을 잊지 못 하는 때문인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찰랑찰랑 물소리가 나는 주전자 속에서 최후의 운명을 파닥거리는 붕어들의 그 마지막 발악이 지금 내 만년의 피곤한 잠자리에 새삼스럽게 파닥거리며 들려오기 때문인가.
나는 30대 후반부터 서울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내 직장인 동성東星고등학교는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 가에 있었지만, 그 근처에서는 셋집을 구하기가 어려워 수유리 쪽 훨씬 밖으로 벗어나야 했다. 그때만 해도 미아리고개에서부터 수유리까지는 아직 도로포장이 안 되어 있어서 흙먼지 펄펄 날리는 비포장도로에서 매일 아침의 출근길 버스에서 입구 창문에 매달려 있는 나에게 “자신 없으면 빨리 내려요!”하는 차장아가씨의 비수 같은 고함소리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당시 나는 서울의 변두리 정류장에서 내려서도 산 속의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야 하는, 조그마한 시골마을에서 꾸역꾸역 촌티를 내며 살아왔다. 그런 4년 뒤 나는 대학입시학원인 대성학원大成學院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집도 광화문에 있는, 직장 가까운 돈암동을 잠시 거친 뒤에 직장에 더 가까운, 신촌 이웃에 있는 연남동으로 옮겨갔다. 나의 서울에서의 낚시도 생활이 조금씩 안정이 되어가던 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내 직장에는 이상하게도 붕어낚시꾼이 많았다. 그래서 겨울을 제외한 봄, 여름, 가을이면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당일낚시 아니면 밤낚시 채비를 하고 충청도의 깊은 산골 저수지를 비롯해 멀리는 경북 안동호까지 원정을 가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거리도 가깝고 낚시 성과도 좋은 곳은 승용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경기도 평택의 널찍한 저수지였다. 큰 저수지가 세 개나 나란히 붙어 있는 낚시터여서 낮이나 밤이나 낚시꾼들로 붐볐다.
언제나 동행하는 직장 동료는 5명 내지 7명이어서 서로가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는, 즐거운 조행釣行이었다. 그 낚시터에는 휴일이나 평일이나 찾아오는 낚시꾼이 많아 식당도 언제나 북적거렸다. 그 식당에는 음식을 나르는 도우미도 없이 젊은 주인아줌마가 혼자서 그 많은 손님을 다 치러 내었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에 가는 꾼들이어서 그 낚시터 주인아줌마와는 얼굴이 익어 서로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 가다가는 생선구이 한 토막도 공짜로 더 얻어먹는 친구 사이가 되어버렸다. 이곳은 낮에 하는 낚시보다 깜깜한 밤에 파란불을 달고 한참동안 하늘로 솟아오르는 야광찌의 밤낚시에 더 매력을 느끼면서 우리는 한 주의 고된 수업의 피로를 깨끗이 날려 보내고 있었다. 직장 동료들과의 이런, 즐거웠던 낚시 동행도 한 10년이 지나고나니 각자의 갈 길은 따로 있었는지 한 사람 두 사람 가정 형편 따라 혹은 건강 따라 흩어지고 말아, 나도 그들 뒤를 이어 정년퇴직을 하자 푸른 바다가 보고 싶어 괴나리봇짐을 싸 불쑥 여수로 내려갔다. 눈만 뜨면 소원하던 그 푸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바닷물의 짭짤한 소금기 때문이었는지 눈알이 쓰려 손으로 문지르다가 나이에는 못 이겨 자식들이 살고 있는, 고향 아난 고향 분당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속언俗言에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어디 강산뿐인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옛날 그 시절 동행했던 낚시친구들의 소식을 알아보니 5,6명이 이미 이승을 떠났다는 소식이니 나 혼자만 남았다는 허전함에 나는 문득 괜한 외로움을 느낀다. 무거운 낚시가방을 등에 메고는 오늘의 조과釣果에 희망을 품고, 뒤뚱거리며 앞장 서 가던 그 친구들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부모나 친구나 가고 나면 말이 없다. 붕어비린내를 풍기며 그 희망에 부풀었던 평소의 정겨운 전화 한 번 없다. 낚시가방 안에 가득하던 두 칸, 두 칸 반 그리고 대물을 노리던 세 칸짜리 긴 낚싯대를 비롯한 여러 개의 그 튼튼한 받침대들은 다 짊어지고 저 세상으로 떠났는지. 아니면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난 5월, 미국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는, 정이 많은 한 고등학교 제자가 오랜만에 분당으로 찾아왔다. 전에는 가끔씩 여수로 나를 찾아왔는데, 그 제자도 내 집의 이사에 따라 찾아가는 곳도 달라졌다. 그도 스승을 닮아 붕어낚시를 좋아해 몇 달 전부터 약속한 낚시를 함께 가기로 했다. 이 경기도 근방에는 저수지며 유료낚시터가 많지만, 내가 서울 직장에 있을 때 십 년 동안이나 매주말이면 찾아다녔던 평택의 그 낚시터를 오랜만에 찾아가보고 싶었다. 돌이켜 보니 서울 시절의 10년과 퇴직 후의 여수 생활 20년을 합치고보면, 3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옛날의 그 낚시터가 감히 상상도 안 되는 ‘전설의 고향’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우리는 그곳을 아침부터 서둘러 승용차로 찾아갔다. 3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의 평택은 옛날과는 달리 인터체인지를 돌아들어서면서부터 벌써 고층건물이 꽉 들어서 있어 완전히 낯선 도시가 되어버려서 꼬불꼬불 길을 돌아 그 옛날의 낚시터를 찾아가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른 제자의 능숙한 운전솜씨로 거의 목적지에 도달하고 보니 이 길이나 저 길이나 모두 ‘통행금지’라는 표지판과 함께 길 가운데에 쇠말뚝을 박아놓아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여러 길을 시도한 끝에 결국에는 포기하고는 차에서 내려 서서히 물가로 걸어가 주변을 둘러보니 질펀한 강물 가운데 푸른 숲이 잠겨 있었다. 하도 의아해 주차해 놓은 민가 쪽으로 되돌아 나오니 60대로 보이는 어떤 부인이 서 있기에 혹시나 하고 옛날의 큰 저수지낚시터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 낚시터는 7년 전에 없어졌는데, 평택시에서 이곳을 대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구입해서 지금까지 방치해놓고 있다는 사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불시에 온 몸에 ‘무상감無常感이 엄습하여 별안간 돌덩어리처럼 몸이 굳어 길가에 멍하게 서 있었다. 이미 우리의 낌새를 알아차린 그 아주머니는 집에서 레몬주스를 쟁반에 받쳐 들고 와서 목마른데 목이나 축이라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어떻게 이 낚시터의 내용을 잘 아시느냐.”고 내가 물었더니 “그때 내가 그 낚시터에서 낚시꾼들의 밥을 해주던 식당 주인 부인이었으니 잘 알지요.” 그 말에 나는 30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그때의 식당 주인아줌마의 얼굴을 더듬어 올라가 기억해보았다. 나는 그때 다른 낚시꾼 동료들보다 그 아줌마와 조금 친근하게 지낸 편이어서 어렴풋이 얼굴의 한 면이 기억나 새삼스러운 감회로 그 아줌마의 손을 잡고는 반가운 악수를 청했다. 인생은 굽이굽이 돌아 이렇게 잊혀져가는 것인가. 옛날의 붕어낚시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바닷물이 밀려들어와 숲속을 돌아 이상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옛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고 했던가. 나는 인생무상을 절실히 느끼면서 그 식당 주인아주머니와 산비탈 길가에 나란히 서서 추억의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는 차에 올랐다. 아직도 일상의 옷에서 붕어비린내를 풍기는 그 식당 주인아주머니는 떠나는 우리 일행의 승용차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어주고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