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국가는 왜 '불굴의 우크라이나'로 표변할 수 있었을까? / 11/5(일) / 신초샤 포사이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 '우크라이나 다이어리 불굴의 백성 기록'의 저자 후루카와 에이지 씨는 우크라이나인 아내와 가족들과 함께 키우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전쟁 당사자로서 전하의 일상을 그린 이 책은 국제정치 무대에서 잊혀지기 쉬운 '곤충의 눈'에서 침략의 윤곽으로 다가간다.
헤매면서도 취재를 진행하는 저자를 친구로 바라봐온 경제 칼럼니스트 유튜버 타카이 히로아키 씨가 '우크라이나 다이어리'에서 떠오르는 '네이션(nation)'으로 깨어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모습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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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두 번째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교착 상태라고는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솔직히 이번 전쟁이 이런 식으로 2년차 중반을 넘길 줄은 몰랐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군이 국경을 넘은 시점에서 나는 단기간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편입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불분명함을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지만 당시 전문가 대부분도 비슷한 전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리더십을 발휘해 반전공세에 나선다면 몽상가로서 웃음거리가 됐을 것이다.
◎ 불식시키지 못한 '실패국가' 이미지
당시 나는 니혼게이자이신문사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개전 직후 타이밍에 뉴스 캐스터도 겸무하게 됐다. 매일의 미디어 체크에 가세해, 프로그램의 게스트 등 전문가와 접할 기회도 많아, 전황 자체는 꽤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보를 쫓아다녀도 안개가 걷히지 않는 기분은 계속됐다. 뿌리에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 품어온 '실패국가 우크라이나'의 이미지와 강대국 러시아를 물리치는 '불굴의 우크라이나' 사이의 너무 큰 간극이었다. 도저히 같은 나라 같지 않을 정도로 우크라이나는 전쟁을 사이에 두고 표변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개전 전의 나의 우크라이나 상은 일본인으로서는 평균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1972년생인 내가 우크라이나를 가장 먼저 의식한 것은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였다. 이후 냉전 종식 소련 붕괴 과정에서 '세계 제3의 핵보유국' 처우가 초점이 되기도 했고 우크라이나는 어렴풋이 '핵'과 겹치는 이미지의 나라였다.
근현대사의 관점에서는 러시아와 독일이라는 두 강대국에게 시달린 수난의 나라로 파악하고 있었다. 역사가 티모시 스나이더가 브래드랜드(지쿠마 학예문고)에서 보여주었듯이 우크라이나, 폴란드, 벨라루스 땅은 수많은 피를 빨아들였다.
21세기 이후의 인상은 '실패국가' 그 자체였다. 2004년 오렌지 혁명, 2014년 마이단 혁명과 개혁 조짐이 보여도 뿌리 깊은 부패로 제 기능을 하는 정부를 갖지 못하는 나라. 민주화 물결을 경계하는 러시아의 입김에서 언제까지나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 그런 이미지다. 천연가스 공급망의 핵심이자 흑해로 접근하는 세계 유수의 곡창지대라는 강점조차 블라디미르 푸틴의 야망을 끌어당기는 지정학적 족쇄처럼 비쳤다.
말을 가리지 않고 말한다면, 나는 우크라이나를 '저주받은 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남의 일처럼.
◎ 개전해서도 키우에 머문 그친 친구
2022년 2월 그 멀리 떨어진 실패국가의 명운이 갑자기 친근하고 절박하게 바뀌었다. 한 친구가 전화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침공이 임박했던 2월 초순, 불쾌한 예감이 들어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후루카와 에이지 씨에게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냈다.
"설마 키우에 있지는 않겠지?"
내 물음에 바로 빙고라고 답신이 왔다.
"이봐. 기자 근성은 좋지만 역시 도망가라. 적어도 서부로!"
"언론인이 아니야, 당사자야, 나. 아내가 움직이지 않는다니까."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후루카와(古川) 씨는 2009년에 우크라이나 여성과 결혼했다. 장모와 처제 가족도 함께해 키우에 머물 의지가 굳은 것으로 알려졌다.
화제의 논픽션 '우크라이나 다이어리 불굴의 국민의 기록'(KADOKAWA)의 저자 후루카와 씨는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옛 동료다. 후루카와 씨는 2021년, 나는 2023년 6월에 닛케이(日經)를 퇴사했다. 2016년 내가 유럽·중동·아프리카 지역 보도의 정리역으로 런던에 부임했을 때 후루카와 씨는 모스크바 지국장을 맡고 있었다. 일상적인 업무 연락을 하는 김에 한두 시간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종종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가져올 카오스, 시리아 내전과 푸틴 정권의 어둠, 영토 문제를 고집하는 아베 정권의 유화적인 대러 외교의 위태로움 등 국제정세를 둘러싼 화두에는 빠지지 않았다. 해외의 정부 관계자나 학식자에게 폭넓은 네트워크를 갖고있는 후루카와 씨와의 대화는, 미디어나 책에 의지하기 쉬운 나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런던 출장길에는 항상 우리 집에 들렀다. 일본 식재료점 아탈리아의 신선한 생선회를 접시 가득 담아 모스크바에서는 좀처럼 맛볼 수 없는 데마키 초밥을 대접했다. 친밀한 후루카와 씨는 곧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도 인기인이 되었다.
신문기자로서, 혹은 한 사람으로서 나는 남들보다 더 세계에서 계속될 전화에 관심을 갖고 가슴 아파하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가 말려들어 있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의 자신은 어디까지나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통감했다.
개전 직후에는 수도 키우로 향하는 러시아의 진군 페이스가 궁금해 한밤중에 몇 번이나 일어나 뉴스를 체크했다. 미사일 공격에 일본 언론인이 연루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속이 쓰렸다.
이윽고 우크라이나는 반격으로 돌아섰고, 후루카와 씨는 「당사자」에서 저널리스트로 돌아와 우크라이나 전체를 날아다니며 취재를 재개했다. 이따금 연락을 취해 전쟁터의 참상과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들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칙칙한 '왜 우크라이나는 표변할 수 있었을까' 라는 빅 퀘스천을 파고들지는 않았다. 후루카와 씨가 2022년 가을 일시 귀국했을 때는 런던 시절처럼 자택으로 초대해 데마키 초밥 파티를 열었다. 그때도 '왜'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며 전쟁의 향방에 우리의 관심이 집중됐기 때문일 것이다. 「우크라이나·다이어리」를 읽으면, 이 시점에서는 후루카와 씨 안에도 아직 답은 확실히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써서 전해야 할 불굴의 국민의 모습
'원고 읽어봐'
개전 1년여 만인 2023년 2월 초. 후루카와 씨로부터 「우크라이나·다이어리」의 초고가 보내져 왔다. 거기에는 나의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불굴의 국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러시아의 불합리한 만행에 대한 분노.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코사크의 전통.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국토·향토에 대한 애착
용기와 유머
우크라이나 국민이란 이런 사람들이었는가. 고이즈미 유우지의 우크라이나 전쟁(지쿠마 신서) 등 '새의 눈'으로 이번 전쟁을 포착한 호저와 '곤충의 눈'으로 사람들을 그리는 '우크라이나 다이어리'가 서로 보완해 퍼즐이 한꺼번에 채워질 것처럼 의문이 빙해되는 듯했다.
"나는 그들에게 빚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든 알려야 해요."
초고를 읽은 나에게 후루카와 씨가 이런 말을 했다. '그들'은 취재한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가리킨다.
나는 이 말을 뜻밖의 생각으로 들었다. 다섯 살 연상의 후루카와 씨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때, 나는 「돌격 취재 작은 스님입니다」라고 설명하는 일이 있다. 이 별명에는 취재가 되면 어디까지나 파고들지만 그걸로 만족해 좀처럼 원고를 쓰지 않는다는 함의도 있다. 런던 시절에는 상사로서 원고를 쓰게 하느라고 고생하곤 했다.
그런 남자가 쓰지 않으면, 전하지 않으면, 이라고 절박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나는 굳이 대폭적인 가필을 제안했다. 후루카와 씨의 개인적인 생각과 가족 에피소드를 더 읽고 싶고, 특히 소련 시절부터 우크라이나 현대사를 살아온 엄마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었다.
저널리스틱한 기술만으로도 일급 다큐멘터리는 된다. 거기에 후루카와 씨 자신과 가족의 기구한 만남이 더해지면, 강한 호소력을 가진 훌륭한 읽을거리가 태어난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나의 무책임한 기대는 '우크라이나 다이어리'라는 희귀한 한 권으로 결실을 맺었다.
◎ "빨리 키우로 돌아가고 싶어"
올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일시 귀국한 후루카와 씨를 자택으로 초청했다. 닛케이신문 현역 기자를 섞어 원하는 데마키 초밥을 둘러싼 3시간가량 책 이야기도, 우크라이나 이야기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 거의 잊어버렸지만 계속 웃기만 하던 하룻밤이었다.
기억나는 것은 '빨리 키우로 돌아가고 싶다'는 후루카와 씨의 말이다. 안전하고 쾌적한 일본보다 우크라이나가 더 아늑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네이션으로 눈을 뜬 우크라이나의 모습을 현장에서 취재하고 싶을 것이다.
곧 우크라이나는 전시하의 두 번째 겨울을 맞는다. 러시아의 인프라 공격으로 전력 부족이 계속되는 가운데 영하권까지 얼어붙는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다이어리를 몇 번 다시 읽은 지금, 그의 땅의 매서운 겨울 경치 속에는 한 친구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친구들, 전쟁터에서 불합리한 침략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언젠가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불굴의 백성과 그들이 지켜낸 대지를 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경제 칼럼니스트 유튜버 타카이 히로아키
https://news.yahoo.co.jp/articles/e0a44adc0a3854088e34757dcf49c47207f79b43?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