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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디오니시오(10.9) , 아브라함(10.9)
요한 레오나르디(10.9), 존 헨리 뉴먼(10.9)
디오니시오(10.9)
성인명 디오니시오 (Dionysius)
축일 10월 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선교사,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파리(Paris)
활동연도 +258년?
같은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역사가인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오(Gregorius, 11월 17일) 주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이탈리아 태생의 주교로 3세기 중엽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로 무너진 갈리아 지방의 재복음화를 위해 성 파비아노(Fabianus, 1월 20일) 교황에 의해 파견된 7명의 선교사 주교인 ‘갈리아의 사도들’ 중 한 명이라고 한다. 로마에서 파견된 7명의 갈리아의 사도는 파리에 정착해 그곳의 초대 주교가 된 성 디오니시오 외에 나르본의 성 바오로(Paulus, 3월 22일), 투르(Tours)의 성 가티아노(Gatianus, 12월 18일), 툴루즈(Toulouse)의 성 사투르니노(Saturninus, 11월 29일), 아를(Arles)의 성 트로피모(Trophimus, 12월 29일), 클레르몽(Clermont)의 성 아우스트레모니오(Austremonius, 11월 1일), 리모주(Limoges)의 성 마르티알리스(Martialis, 6월 30일)가 있다. 그중에서 툴루즈의 성 사투르니노와 파리의 성 디오니시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 디오니시오는 파리의 초대 주교로서 자신과 동행한 성 루스티코(Rusticus) 신부와 성 엘레우테리오(Eleutherius) 부제와 함께 몇 년 동안 활발히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 모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파리 근교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 디오니시오와 동료들의 수난과 순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전설적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 전설에 따르면, 파리 지역에서 선교 활동에 큰 성공을 거둔 성 디오니시오와 동료들이 체포된 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참수당해 그 시신이 센강(Seine R.)에 던져졌다는 것이다. 다른 전승으로는 성 디오니시오가 참수당한 후 직접 자신의 머리를 들고 파리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는 것도 있다. 520년경에 출간된 “성녀 제노베파의 생애”(Vie de Sainte Genevieve)에 따르면, 이미 그 당시에 성 디오니시오를 전례 안에서 공경하고 있었고, 성 디오니시오가 자신의 머리를 들고 파리 북쪽으로 걸어갔던 곳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무덤 자리로 알려주신 곳으로 오늘날 그를 기념해 대성당이 건립된 생드니(Saint-Denis) 지역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은 성 디오니시오와 동료들의 순교 장소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파리 북부에 메르쿠리우스(Mercurius, Mercury) 신을 경배하던 언덕에서 참수되었는데, 그곳은 해발 129m로 파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순교 이후 ‘순교자의 산(언덕)’(Mons Martyrum)이란 의미를 지닌 ‘몽마르트르(Montmartre)’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순교 후 센강에 던져진 그들의 시신은 곧 신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안장되었고, 12세기에 성 베네딕토 수녀회에서 그들의 무덤 위에 성당을 건립하면서 생드니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몽마르트르 정상에는 1875년에 착공하여 1914년에 완공된 예수 성심 대성당(Sacre-Cœur Basilica)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변 거리는 근대 미술가와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적 특성을 살려 예술의 거리로 조성되었다.
세 번째 전설은 파리의 주교였던 성 디오니시오의 신원에 대한 혼동과 관련된 것이다. 중세 때 일부 전승은 3세기 중엽에 순교한 파리의 성 디오니시오 주교와 1세기에 아테네에서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에 의해 개종하고 후에 아테네의 초대 주교가 된 아레오파고스(Areopagos)의 성 디오니시오(사도 17,34; 10월 3일) 그리고 성 바오로가 아테네로 여행할 때 개종한 익명의 신비주의적 저술가 등 세 사람을 서로 혼동하고 있었다. 17세기까지 이런 혼동이 있었으나 이들 간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중세 때에 이들 갈리아의 일곱 사도를 사도 시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사도적 전통과 연결하여 지역 교회의 전통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런 영향에서 시작된 오해로 보인다.
실제로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9일 목록에서 아레오파고스의 성 디오니시오가 사도 성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고 아테네의 초대 주교가 되었고, 로마로 가서 교황 클레멘스 1세(Clemens I, 11월 23일)의 축복을 받고 갈리아 지방 복음화를 위해 파견되었으며, 몇 년 동안 파리에서 맡겨진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후 성 루스티코 신부와 성 엘레우테리오 부제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 10월 9일에 파리의 성 디오니시오 주교와 동료들의 순교를, 그리고 10월 3일에 아레오파고스의 성 디오니시오 주교를 기념하도록 수정하여 기록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활동 시기 또한 3세기와 1세기로 명확히 했다. 교회미술에서 성 디오니시오는 전설적 순교 이야기에 근거해 주교 복장을 하고 자신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프랑스와 파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성 디오니시오는 데니스(Denis) 또는 드니(Denis)로 불리며, 14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널리 알려진 ‘14명의 구난 성인’(救難 聖人, Holy Helpers) 가운데 한 명으로 공경받고 있다.♣
아브라함(10.9)
성인명 아브라함 (Abraham)
축일 10월 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구약인물
활동지역
활동연도 +연대미상
같은이름 아브람, 에이브러햄
성조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대한 특별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유다인, 그리스도인, 무슬림 모두에게 믿음의 모범 또는 믿음의 조상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셈의 후손이며 테라의 아들이고 사라이(Sharai)의 남편이며, 이사악의 아버지로서 히브리 민족의 선조이다. 그리고 아들인 이스마엘을 통해 퍼지게 된 다른 셈족의 선조이기도 하다(창세 17,5; 25,12-18). 그의 삶에 관해서는 주로 창세기(11,26-25,10)에 소개되어 있고, 사도행전 7장 2-8절에 요약되어 있다.
구약성경은 그의 이름을 ‘아브람’과 ‘아브라함’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언급하고 있다. 즉 창세기 11,26-17,4에서는 ‘아브람’으로, 그리고 창세기 17,5과 1역대기 1,27과 느헤미야 9,7에서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었다며 함께 나오고, 나머지는 모두 ‘아브라함’으로 표기하고 있다. ‘아브람’은 ‘아브’(아버지)와 ‘룸’(높다, 존귀하다)에서 파생된 ‘람’의 합성어로, ‘존귀하신 아버지’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나의) 아버지는 존귀하시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어원론적 해석은 불투명하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었다(창세 17,4-5). 여기에서 하느님은 약속 성취의 징표로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라는 의미를 부여하신다. ‘아브’는 아버지를 의미하며 ‘라함’은 많은 민족을 의미하는데, 이 이름에 대한 성경의 해석은 유음 현상에 의해 만들어진 대중적인 해석에 근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칼데아의 우르에서 태어난 아브라함은 아버지 테라와 동생인 나호르와 하란, 아내인 사라이 조카 롯과 함께 하란으로 이주하였다(창세 11,26-32). 아버지 테라가 죽은 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 가나안 지역으로 이주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75세였다(12,1-5). 그가 스켐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고, 약속의 땅의 중심인 그곳에서 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였다(12,6-7). 그러자 그는 제단을 쌓아 주 하느님께 바친 뒤 그곳을 떠나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아브라함은 여기에서도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예배하였다. 그리고는 네겝 쪽으로 옮겨갔다(12,8-9). 그 후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 이집트로 갔고(12,10), 다시 이집트를 떠나 네겝을 지나 베텔 쪽으로 와서(13,3) 롯을 분가시킨 다음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이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살며 주님을 위해 제단을 쌓았다(13,1-18), 그 후에는 브에르 세바에 정착하였다(22,19).
아브라함에게서 분가한 조카 롯이 소돔 근처에 살고 있을 때, 소돔 지역의 왕들과 북쪽 지역의 왕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롯이 북쪽 왕들에게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롯을 구하기 위하여 북쪽 왕들과 전쟁을 벌여 조카와 그의 재물과 잡혀간 사람 모두를 구해냈는데, 여기서 그는 이미 공인된 지도자로서 행동하였다(창세 14,1-16). 그리고 이집트와 그라르와 브에르 세바에서도 한 집단의 존경받는 지도자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들과 대등한 관계에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부자였고(13,2), 훈련받은 부하들도 많았다(14,14). 또 가나안족과 프리즈족과 함께 어울려 살았으며(12,6; 13,7), 오랫동안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에서도 나그네살이하였다(21,34).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히타이트 사람들과 거래를 해 막펠라의 동굴에 아내를 안장하였다(23장). 우르와 하란을 떠나기 전에 도시를 배경으로 살았던 아브라함은 하란에 사는 친척들이 천막생활을 한 것과는 달리 유랑하는 반유목민적 삶을 살았다(12,8-9; 13,18; 18,1). 그러나 그는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브에르 세바, 히타이트 사람들의 지역에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머물렀으며(13,18; 18,1; 22,19; 23,3-4), 그곳 정착민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23,10-18). 이 지역 왕들과도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였을 만큼 그는 상당한 세력을 가진 외국인 거류민이었던 것 같다(15,13; 23,4).
창세기 15장에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특별한 체험에 관해 언급되어 있다. 우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들만큼 큰 민족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는데(12,1-5), 이 약속은 이미 13장 16절에서도 확인된다(“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약속의 실현을 위한 첫 번째 과제는 그가 아들을 얻는 것이었다. 아직 그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것이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었다. 그러던 중 환시 중에 주님의 말씀이 내렸고(15,1), 이때 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15,4-5).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믿었고, 이로써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15,6) 그리고 하느님은 그와 계약을 맺으셨다(15,7-21).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15,18)라는 말씀을 들었다. 하느님께서는 반으로 자른 희생제물을 통해 계약을 보증해 주셨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후손이 400년 동안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살이하며 종살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15,13). 이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이것이 성취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초월적인 신앙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깊은 감정적 움직임이 동반된 것이었다. 이 순간 그는 분명히 하느님의 약속을 완전히 믿었고, 이러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이러한 믿음도 훗날 흔들리기도 했다.
그의 아내 사라이는 아직 아이가 없었으므로 당시 관습대로 남편에게 자기의 이집트인 여종인 하가르를 내어주어 아이를 갖게 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하가르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났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86세였다(16,1-16).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하셨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99세였다(창세 17,1), 이때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줄 것이며 후손을 번창하게 해줄 것을 약속하고(17,1-8), 이 새 계약의 표징으로 모든 남자의 할례를 지시하셨다(17,9-14). 이 계약과 함께 부인의 이름도 사라이에서 사라(Sara)로 바뀌었다(17,15). 이는 고대인들의 사고에 따르면 그의 운명이 바뀌는 것으로, 결국 사라가 하느님의 역사(役事)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의 약속은 사라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다시 확인되었다(18,1-19).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이사악이 태어났고, 이로써 약속 실현의 결정적인 조건이 갖추어졌다(21,1-7). 그러나 이사악을 통해 아브라함의 신앙이 시험대 위에 놓이게 되었다(22,1-14). 모리야 땅의 산에서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지시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내 사라가 127년을 살고 죽자 마므레 맞은쪽 막펠라에 있는 동굴에 안장(23,19)한 후 자기의 죽음도 가까이 왔음을 알고 집안의 모든 재산을 맡아보는 종에게 하란 지역에 사는 자신의 친척 중에서 이사악의 아내를 구해 주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사악의 아내로 브투엘의 딸 레베카를 맞이하였다(24장). 아브라함이 늦은 나이에 크투라를 아내로 맞아들여 얻은 자식들은 드단과 미디안 부족의 조상이 되었다(25,1-6). 아브라함은 장수를 누리다 175세에 죽어 막펠라 동굴에 안장되었다(25,7-11).
신약성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언급되고 있다(사도 13,26). 아브라함은 사제직을 맡은 레위 지파의 선조로 언급되며(히브 7,5),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라고 선포된다(마태 1,1). 그러나 신약에서는 아브라함의 혈통과 관련하여 새로운 이해가 선포되었다. 세례자 요한과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하느님의 복을 받는 조건이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중적 믿음을 부인하였다(마태 3,9; 로마 9,7).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가 새로 선택된 겨레, 임금의 사제단, 거룩한 민족,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 곧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것이다(1베드 2,9-10).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계약의 맹세(루카 1,73)와 약속하신 축복(갈라 3,14)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10월 9일 목록에서 모든 믿는 이들의 아버지인 성조 아브라함에 대해 기록하였다.♣
요한 레오나르디(10.9)
성인명 요한 레오나르디 (John Leonardi)
축일 10월 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541-1609년
같은이름 레오나르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성 요한네스 레오나르디(Joannes Leonardi, 또는 요한 레오나르디)는 1541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 루카(Lucca) 근방의 디에치모(Diecimo)라는 마을에서 가난한 소작농이자 지주였던 부모의 일곱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근면하고 신심 깊은 가정 분위기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가 17살이 되었을 때 성 요한 레오나르디의 아버지는 그를 루카로 보내 약제사의 조수로 일하며 약학을 공부하도록 했다. 약 10년 정도 교육 과정을 수료한 후 루카 공화국의 법에 따라 자신의 약국을 열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그는 약국 보조원으로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을 자주 만나 그들을 도우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는 뜻을 굳혔다. 그리고 그러한 영성으로 모인 이들의 단체인 ‘콜롬비니’(Colombini)에도 자주 참여하였다. 그는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의 영적 지도를 받으면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사제직의 소명을 실행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약국을 나와 영적 지도자인 도미니코 수도회의 파올리노 베르나르디노(Paolino Bernardino) 신부의 지도를 받아 인문학과 철학, 신학을 공부한 후 1572년 12월 22일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성 요한 레오나르디는 산 조반니 델라 마조레(San Giovanni della Maggiore) 성당에 부임하여 어린이와 어른들의 교리교육에 헌신했다. 그는 트렌토 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년)의 결정에 따라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응하여 가톨릭 교리를 더 명료하게 가르치고자 노력하며 교회의 개혁 정신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교리를 가르치는 평신도와 사제들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교리 교사회’(Compagnia della Dottrina Cristiana)를 결성하고, 1574년에는 “그리스도교 교리”(Dottrina Cristiana)와 교리 교사회의 규칙서를 발간하였다. 그는 또한 병원과 감옥의 사목활동에도 정열을 쏟아 수많은 사람의 모범이 되면서 많은 후원자와 협력자들이 생겼다. 그는 그들과 함께 트렌토 공의회의 개혁 정신을 실천하는 새로운 교구 사제회를 구성해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1574년 9월 1일 ‘복되신 동정녀의 개혁 사제회’(Preti Riformati della Beata Vergine)를 결성하였다. 이 수도회는 교구의 승인을 거쳐 1595년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1619년 8월 14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천주의 모친 성직 수도회’(Ordo Clericorum Regularium Matris Dei, OMD)라는 이름으로 개칭하는 수정 회헌을 승인받았다.
성 요한 레오나르디가 설립한 수도회는 그의 이름을 따서 ‘레오나르디니’(Leonardini)로도 불린다. 이들은 초기에 루카 지방에서 활동하던 도미니코 수도회 회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는 루카 지방에서 발생한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강력한 반격을 가했다. 그런 그의 사도적 열정 때문에 프로테스탄트와 지방 권력으로부터 반감을 사서 심한 박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 정신은 교황의 도움으로 더 구체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1584년에 그는 로마(Roma)에 있는 친구인 성 필립보 네리(Philippus Neri, 5월 26일)를 방문하여 그의 소개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Gregorius XIII)를 알현하였다. 하지만 그가 루카를 떠나 있는 동안 반대자들의 중상모략과 선동으로 루카 공화국에서 그를 추방하는 칙령이 발표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몇 년 정도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박해자들에게 관용과 자비를 베풀었다. 그리고 수도회의 모원을 루카에서 로마로 옮겼다.
1592년 9월에 그는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의 요청으로 나폴리(Napoli)에 있는 ‘마돈나 델 아르코’(Madonna del’Arco) 성역을 관할하는 교황청 행정관으로 임명되어 성역의 헌금 관리 권한을 조정하였다. 이듬해에 교황은 그에게 나폴리 공화국 안에 있는 베네딕토회의 몬테베르지네(Montevergine) 수도원의 개혁을 맡겼다. 이는 이미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성 요한 레오나르디는 이 또한 슬기롭게 잘 해결하였다. 그 뒤로도 여러 수도원과 교구의 개혁 작업을 도왔다. 이런 다양한 개혁 활동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1602~1603년에 후안 바우티스타 비베스(Juan Bautista Vives) 몬시뇰과 예수회의 마르티노 데 푸네스(Martino de Funes) 신부와 함께 선교지역 출신 사제들의 교육을 위한 교황청의 특별 조직인 ‘포교성성 신학원’(Collegium Urbanum de Propaganda Fide)을 설립하였다. 이 신학원은 1627년 8월 1일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공식 승인을 받았고, 수 세기 동안 수천 명의 사제를 배출했는데, 그중 다수는 순교자였다.
1609년 로마에 독감이 퍼지자 성 요한 레오나르디는 독감에 걸린 14명의 동료 수도자들을 간호하던 중 감염되어 그해 10월 9일 로마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먼저 산타 마리아 인 포르티코(Santa Maria in Portico)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1662년에 산타 마리아 인 캄피텔리(Santa Maria in Campitelli)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그는 1861년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8년 4월 17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요한 레오나르디는 가톨릭 개혁 운동의 모범이며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교회의 개혁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교황 바오로 5세에게 보낸 청원서에서, 우선 개혁자 스스로 ‘모든 덕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등잔 받침 위에 밝혀 놓은 빛’이 되어야 하며, ‘완전한 삶과 빛나는 도덕적 기풍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종교적 · 도덕적 개혁을 이루려면 먼저 훌륭한 의사처럼 교회를 괴롭히는 악에 대해 주의 깊게 진단하고 그 악에 가장 적합한 치료법을 처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온화한 성품과 탁월한 식별력 그리고 순명의 정신으로 살았던 그는 동정 마리아를 닮으려는 마음으로 교회에 봉사했고, 40시간 신심을 장려하며 잦은 성찬례 참여를 강조했다. 1574년에 발간된 설교집 외에도 다양한 신학 주제에 관한 저서와 자녀와 부모의 의무에 관한 소책자를 상당수 집필했으나 출판된 것은 거의 없다.
2006년 8월 8일에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는 경신성사성을 통해 성 요한 레오나르디를 약사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 목록에서 로마에 천주의 모친 성직 수도회 설립자인 ‘복자’ 요한 레오나르디 신부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수고와 기적을 통해 빛을 발했으며 선교 활동을 위한 조직을 설립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그가 선종한 날인 10월 9일 목록에서 성 요한 레오나르디가 루카에서 약사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사제가 되었으며, 그 후에 성모 마리아 수도회로 알려진 천주의 모친 성직 수도회를 설립하여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치고, 성직자들의 사도적 삶을 쇄신하며, 전 세계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로마에 포교성성 신학원을 설립하여 헌신하다가 과업의 무게에 지쳐 로마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였다.♣
존 헨리 뉴먼(10.9)
성인명 존 헨리 뉴먼 (John Henry Newman)
축일 10월 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추기경, 교회학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801-1890년
같은이름 앙리, 얀, 요안네스, 요한,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헨리 뉴먼, 죤, 지오반니, 하인리히, 한스, 헨리꼬, 헨리꾸스, 헨리코, 헨리쿠스, 후안
성 요한네스 헨리쿠스 뉴먼(Joannes Henricus Newman, 또는 요한 헨리코 뉴먼/존 헨리 뉴먼)은 1801년 2월 21일 영국 잉글랜드의 런던(London)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성공회 신자인 부모의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나 할머니의 영향으로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는 유년기와 청년기에 여러 번 열병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동시에 영적인 위기와 회심도 경험하였다. 그는 7살 때 런던의 사립학교인 얼링(Ealing) 학교에 입학했고, 15살이 된 1816년 금융업자인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려움으로 겪던 중 열병이 발병해 5개월 정도 큰 고생을 하였다. 그때 그는 복음주의 성직자인 월터 마이어스(Walter Mayers)의 도움으로 여러 신앙 서적을 읽으며 당시 영국 사상계를 지배하던 무신론으로 이끄는 회의주의나 과학주의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1817년 성 존 헨리 뉴먼은 옥스퍼드대학교를 구성하는 트리니티대학(Trinity College)에 입학해 수학하고, 1822년 오리엘대학(Oriel College)에서 평의회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1824년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5월 29일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아 성공회 신부가 되었다. 그는 1826년에 오리엘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1828년에는 오리엘대학 안에 있는 성 마리아 성당의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다. 1829년 성공회 고교회파에 속한 리처드 허렐 프루드(Richard Hurrell Froude) 신부와 친구가 되면서 저교회파 배경에서 성장한 그는 가톨릭 신앙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9세기 영국 성공회에는 고교회파(高敎會派, High Church)와 저교회파(低敎會派, Low Church)가 있었는데, 고교회파는 고대 그리스도교로부터 내려오는 사도 전승을 따르며 교회의 권위 및 전례와 성사를 강조하면서 가톨릭교회와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반면에 저교회파는 교회의 권위와 성사성(聖事性)을 낮게 평가하면서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하는 개신교에 더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1832년 성 존 헨리 뉴먼은 친구인 리처드 허렐 프루드가 요양을 위해 아버지인 로버트 허렐 프루드(Robert Hurrell Froude) 대주교와 함께 지중해로 떠날 때 동행하였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영국 땅을 벗어나 이탈리아 로마(Roma)를 포함해 실제로 가톨릭교회의 전통과 문화가 살아있는 도시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리처드 프루드 신부 일행이 영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지방을 여행하면서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열병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후에 가톨릭교회에 대한 이해를 더욱 넓히고 호의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1833년부터 성공회의 쇄신과 부흥을 주장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 1833~1841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816년 성공회 사제가 된 고교회파 소속 존 키블(John Keble, 1792~1866년) 신부는 옥스퍼드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 정부가 교회 활동과 교회의 재산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정치 · 사회적 운동을 전개했는데, 초대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연구하면서 신학적 · 사목적 관점으로 점차 전환하였다. 그는 1833년부터 성 존 헨리 뉴먼과 함께 영국 성공회의 쇄신과 탈국교화(脫國敎化)를 주장하며 고대와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과 전례를 연구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꾸준히 소책자를 발간했다. 그로 인해 ‘옥스퍼드 운동’은 ‘소책자 운동’(Tractarianism)으로도 불렸고,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은 ‘소책자 운동가들’(Tractarians)로 불렸다. 소논문집인 이 소책자는 90호까지 이어졌고, 1841년에 발간된 90호에서 성 존 헨리 뉴먼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에서 결정했던 사항들이 영국 국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와 일치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성공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교와 성공회 주교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고, 1842년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리틀모어(Littlemore)라는 작은 마을로 물러나 준(準)수도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했다.
1845년 10월 6일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에 관한 논고”의 집필을 끝낸 후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결심하고, 3일 후에 리틀모어에서 공동생활을 하던 동료들과 함께 예수 고난회의 복자 도미니코 바르베리(Dominicus Barberi, 8월 27일) 신부의 도움으로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였다. 개종 후 그는 1846년 리틀모어를 떠나 교황 감목대리가 있던 버밍엄(Birmingham)으로 갔다. 그곳에서 아일랜드 출신 니콜라스 와이즈먼(Nicholas Wiseman, 1802-1865) 신부의 권유로 가톨릭교회의 사제가 되기로 한 그는, 그해 10월 로마로 가서 포교성성(布敎聖省, 현 복음화부) 대학 기숙사에 머물며 신학 강의를 청강하고, 성 필립보 네리(Philippus Neri, 5월 26일)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한 후 1847년 5월 30일 사제품을 받았다. 영국으로 돌아온 성 존 헨리 뉴먼 신부는 성 필립보 네리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1848년 버밍엄에서 영국 오라토리오회(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850년 비로소 영국에서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가 복원되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영국 성공회 신자들의 가톨릭교회와 교황에 대한 반감도 더욱 거세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니콜라스 와이즈먼이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영국 언론은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 복원을 교황청의 침략이라고 비난했고, 성공회 신자들도 교황과 추기경의 형상을 만들어 불태우는 등 혼란이 지속되었다. 성 존 헨리 뉴먼은 신문지면 등을 통해 그러한 주장에 대한 반박과 변론을 기고하면서 가톨릭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그는 1854년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에 신설된 가톨릭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대학 설립 허가가 나오지 않아 아일랜드 주교단에 사의를 표명하고 1858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출판물을 통해 가톨릭 신자들에게 유익한 글과 작품을 많이 남겼다.
1864년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가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 특히 성 존 헨리 뉴먼을 겨냥해 그의 도덕과 사상은 진리가 담겨 있지 않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공격했다. 그러자 성 존 헨리 뉴먼은 자기와 다른 성직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자신의 신앙적 변천 과정을 담은 “나의 생애를 위한 변론”(Apologia pro vita sua)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여기서 그는 솔직하고 공정한 내용으로 영국의 일부 가톨릭 신자들과 성공회 신자들이 자신에 대해 지니고 있던 의혹과 오해를 말끔히 씻어냈고, 영국의 종교 생활에 있어서 그의 중요한 위상이 다시금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1869년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 2월 7일)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300여 년 만에 열린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 성 존 헨리 뉴먼을 초대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성대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낯설어한 그는 이를 정중히 사양하고 버밍엄의 오라토리오회에 계속 머물렀다. 그는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이 신앙 교리로 선포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의회가 이를 선포하면 제일 먼저 승복하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1879년 성 존 헨리 뉴먼이 주교도 아니고 로마에 머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기경에 서임함으로써 그의 인품과 업적을 인정하였다. 78세의 성 존 헨리 뉴먼은 허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가서 추기경의 영예를 받고 버밍엄으로 돌아와 여생을 오라토리오회 수도원에서 보내다가 1890년 8월 11일 평화로이 선종하였다. 그는 2010년 9월 19일 영국을 방문한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잉글랜드 버밍엄에서 시복되었고, 2019년 10월 13일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라 종교개혁 이후 영국 출신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성인이 되었다. 그의 축일은 선종한 날이 아시시(Assisi)의 성녀 클라라(Clara) 축일과 중복되는 관계로 오라토리오회와 잉글랜드와 웨일즈 가톨릭 주교회의는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10월 9일을 축일로 정해 경축하고 있다. 영국 성공회는 그대로 8월 11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성 존 헨리 뉴먼은 영국 성공회와 가톨릭교회 사이의 가교역할을 담당하면서 두 교회가 소모적 논쟁을 하지 않고, 서로 조화롭게 양측 신자들이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이바지하였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찾고자 노력했던 그는 교회쇄신을 위한 개혁적 사상과 참된 교회일치운동의 모범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중요한 사상적 단초를 제공함으로써 공의회의 ‘숨겨진 교부’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렇듯 가톨릭교회의 교리 · 신학 · 영성 등에 미친 큰 공로를 인정하여 교황 레오 14세(Leo XIV)는 2025년 7월 31일 성 존 헨리 뉴먼을 교회 학자로 선포하려는 교황청 시성부의 의견을 승인하였고, 같은 해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미사 중에 그를 보편 교회의 교회 학자(박사)로 선포하였다. 아울러 교황은 같은 날 그를 1627년 선교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Pontifical Urban University)의 수호성인으로도 선포하였다. 이로써 성 존 헨리 뉴먼은 가톨릭교회에서 38번째 교회 학자가 되었고, 추기경으로서는 네 번째 교회 학자가 되었다. 또한 교황 레오 14세는 2026년 2월 3일 경신성사부 교령을 통해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축일을 로마 보편 전례력에 추가하고 매년 10월 9일을 선택 기념일로 지낼 수 있도록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