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를 책망한 바울
갈라디아서 2 : 11 – 21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맨 나중에’(고전15:8) 사도 된 바울이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초대교회의 ‘기둥같이 여기는 게바(베드로)를 책망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9,11)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최고의 지도자인 사도 베드로가 맨 나중에 사도 된 바울로부터 대면하여 책망을 받았다는 말씀은 구속사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오늘의 교회와 성도인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스테반의 죽음으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흩어져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은 헬라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와서 세운 안디옥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최초 이방인들 중심으로 세운 교회이며 이방 선교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로서 역할을 한 모범적인 교회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보내었고,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사울(바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가르쳐서 큰 무리가 모였고,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행11:19-26)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거짓 형제들’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하지 않은 자들이 가만히 안디옥에 와서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므로 바울과 바나바를 종으로 삼고자 했습니다.(4)
그래서 바울은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한 이방사람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계시를 따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는 복음을 예루살렘 총회에 말했습니다.(1,2)
이러한 말씀들을 보면 거짓 형제들이 가만히 들어와서 이방인들의 구원문제로 안디옥 교회가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습니다. 베드로가 와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바울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 가매”(12)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고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환상을 본 후로부터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의 초청을 받고 이방인들도 다 같이 성령을 부어주심을 받고 세례도 베풀고 식사도 함께 했습니다.(행10:9-28)
그리고 예루살렘 총회에서도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교회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발의하였고, 감독인 야고보가 옳다고 결의하였습니다.(행15:7-21)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와서도 자연스럽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게바(베드로)가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곳에 이르자 식사 자리를 슬며시 피한 것입니다.(11)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게 된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고 있는 모습을 그들이 봄으로써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어떤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것을 염려해서 피한 것입니다.
환상을 보고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며칠을 머물렀던 것과 예루살렘 총회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변론을 했던 모습과 전혀 다른 베드로의 행동이었습니다.
함께 식사하던 남은 유대인들이 갑자기 베드로가 떠난 것을 보고 그들도 베드로를 따라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외식하는 것을 보고 남은 유대인들도 외식하므로 심지어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을 받고 떠났다고 말했습니다.(13)
‘외식’이란 말은 속과 겉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베드로가 겉으로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지만 속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교회에도 외식하는 지도자와 성도들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예배도 잘 드리지만 어려운 상황일 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행하는 것은 외식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와 같은 지도자가 외식하는 믿음은 많은 사람들이 유혹되어 넘어지게 하는 매우 위험한 믿음입니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행동은 그 식사 자리에 함께 있던 유대인들과 바나바까지도 혼란케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뿐만 아니라 올바른 길을 가던 여러 사람들까지도 유혹을 받아 넘어지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11)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외식은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훼손시킬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대면하여 책망하였고,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을 듣고 대항하지 못하고 굴복했다는 것은 베드로의 잘못이 명백하였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당시 이러한 사건은 안디옥교회 뿐 아니라 초대교회의 존립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제일 먼저 안디옥을 중심으로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에게 베드로의 잘못을 책망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해서 기록해서 보낸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이 말씀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중요한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가 책망을 들어야 했던 것은 바울이 안디옥에 가르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의’의 복음 진리를 무시할 뿐 아니라 복음을 율법 아래 종속시키고자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잘못을 개인적인 관계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인 모임에서 베드로를 대면하여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14)고 무섭게 책망했습니다.
맨 나중 된 사도 바울이 대 선배인 사도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대면하여 책망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유대인이 두려워서 살며시 피한 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예루살렘 총회의 그 어떠한 권세자도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행하면 책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카톨릭에서는 베드로가 초대 교황으로 무오설(교황은 그 어떤 오류로부터 온전하다)을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베드로의 잘못을 책망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경위를 먼저 말한 것은 자신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뽑아 세운 사도들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부활하신 주께서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고 말씀하셔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세움받은 사도라는 사실을 먼저 말했습니다.(갈1:1)
그리고 바울은 14년 전에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가서 총회 앞에서 이방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로 하며,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짓 형제들의 가르치는 잘못을 말했다고 했습니다.(1,3)
바울이 안디옥에서 가르친 말씀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고 분명히 밝혀 말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가르친 ‘이신득의’, 즉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신앙 신조입니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고, 할례를 받지 않은 자와는 함께 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바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그들이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났다는 것은 바울이 가르친 것과 정 반대가 될 뿐 아니라 율법주의자들을 따르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떠남으로 안디옥 교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즉시 베드로를 대면하여 책망을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사도 바울의 책망을 받아 들인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만일 베드로가 변명을 하고 바울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때부터 베드로는 사도로서의 자격의 실격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칭찬을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칭찬은 교만하게 만드는 악한 요소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즉시 예수님을 붙들고 향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하시며 무섭게 책망을 하셨습니다.(마16:23)
베드로는 책망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칭찬은 듣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책망하면 듣기 싫어할 뿐 아니라 변명하며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인들도 칭찬하는 설교는 은혜 받았다고 좋아하지만 책망하는 설교를 듣기 좋아하는 것은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는 성도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바르게 하는 말씀이라야 합니다. 성도들의 잘못된 것을 알고도 책망하지 않는 것은 성도의 영혼을 병들어 멸망케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바울이 베드로의 잘못을 알고 책망하지 않았다면 안디옥 교회는 큰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까지도 상당한 어려움을 당했을 것입니다. 당시 모든 초대교회에도 상당한 혼란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는 책망받을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남들까지도 넘어지게 하는 외식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책망받을 성도는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책망받을 일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책망받을 일도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책망하여 바르게 하시고 의에 이르도록 말씀하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책망받을 만한 잘못도 없어야 하지만, 책망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영혼이 건강한 믿음이 됩니다. 책망을 듣고 잘못을 바르게 고치고 구원이 이르는 지혜자가 됩시다. 우리 모두 주님 오시는 날 주님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영생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