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경기도 거친 들판의 물로 둘러싸인 제물포
인기멤버
hanjy9713
2023.12.30. 20:32조회 2
댓글 0URL 복사
거친 들판의 물로 둘러싸인 제물포
1884년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개항한 제물포는 서해안에 있는 작은 포구였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조수가 11미터나 오르내리는 제물포의 정박지는 낮 동안에 질퍽거리는 진흙 펄이나 다름이 없다. 모래톱에 있는 좁은 도랑인 정박지는 현대식 용량의 배 다섯 척을 수용할 수 있다. 진흙만이 현저히 눈에 띄고 마을 뒤편의 낮은 언덕은 칙칙한 고동색이었으며 부슬비까지 뿌리고 있었지만, 제물포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나는 곧 제물포에 익숙해졌다. 그 후 4년 동안 여러 계절과 다양한 상황 속에서 제물포를 찾을 때마다 나는 고향을 다시 찾은 듯한 그런 다정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정박지에서 바라보면 제물포는 바닷가의 한 모서리를 따라 뿔뿔이 흩어져 있는 초라한 집들의 덩어리였다. 희게 칠해지고 대부분 나무로 된 집들이 드문드문 불모의 언덕에 서 있었다.
제물포의 지명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나 옛 지명인 ‘미추’나 ‘매소’가 ‘거친 들판(맷골)의 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는 뜻이라고 추정한다. 제물포는 원래 고구려의 미추홀군이었는데, 백제가 점령한 뒤 372년부터 475년까지 백여 년간 중국의 동진, 송, 북위와 내왕하는 근거지였다. 고려시대에는 서남해안과 개성을 잇는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는 제물포진이 설치되어 수군만호가 주둔하였으나 효종 때 강화도로 옮겼다. 그 뒤 효종이 북벌계획을 수립하면서 제물포에서 강화도로 가는 수로를 개척하였고, 유사시 임금이 머무를 수 있는 행궁을 월미도에 지었으며, 제물량(濟物梁)에는 수륙 양군을 배치하고 두 척의 배를 대기시켰다. 또한 이곳은 서울과 연결되는 중림도(重林道)의 종착역이기도 하였다. 영종도를 연결하는 뱃길이 개설되었고, 특히 삼남지역의 조선(漕船)이 한강에 진입하기 전의 정박지였으므로 원(院)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곳 제물포에서 임오군란으로 발생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1882년(고종 19) 8월 30일 조선과 일본이 맺은 조약이 제물포조약이다. 임오군란 때 일본의 조선 침투에 분노한 군인과 시민들은 일본 공사관을 불태우고 별기군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掘本禮造)를 비롯한 여러 명의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그러자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는 난을 피하여 귀국하였다. 이후 청ㆍ일 양군의 출병과 청의 대원군 납치로 임오군란이 수습되고 조선에서 청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은 청을 견제하면서 다시 조선에 침투하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일시 귀국했던 하나부사 공사는 결국 군함 4척, 수송선 3척에 1개 대대 병력을 인솔하고 8월 12일 제물포에 상륙하여 조선에 대해 피해보상과 거류민 보호를 내세워 협상을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8월 27일 봉조하(奉朝賀) 이유원을 전권대신으로, 공조참판 김홍집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제물포에서 일본과 회담하게 하였다. 회담은 8월 28일 오후부터 인천 앞바다에 정박 중인 일본 군함 히에이 함상에서 진행되었다. 8월 30일 일부가 수정된 채로 일본 측 요구안이 타결되었고, 본조약과 수호조규속약을 조인하였다. 6개조로 된 조약의 내용은 임오군란과 직접 관계되는 일의 뒤처리를 위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지금으로부터 20일 안에 조선은 흉도를 체포하고 주모자를 색출하여 엄히 처벌할 것.
② 일본 관리로 피해를 본 자는 조선국이 융숭하게 장사지낼 것.
③ 조선은 일본 관리로 피해를 본 자의 유족 및 부상자에게 5만 원을 지급하여 위로할 것.
④ 일본이 입은 손해 및 공사를 호위한 군비 중에서 50만 원은 조선이 매년 10만 원씩 5년 내에 지급할 것.
⑤ 일본 공사관에 병사 약간을 두어 경비하게 하며, 병영의 설치ㆍ수선은 조선이 책임질 것.
⑥ 조선은 대관(大官)을 파견하고 국서를 보내 일본에 사과할 것.
또한 조선에서의 상권을 보다 확고히 다져두려는 일본의 요구가 관철되어 본조약과 함께 2개조의 수호조규속약이 체결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부산, 원산, 인천 각 항의 간행이정(間行里程)을 사방 각 50리로 확장하고, 2년 후 다시 각 1백 리로 할 것. 1년 안에 양화진(楊花津)을 개시(開市)할 것.
② 일본 공사와 영사 및 수행원과 가족의 조선 내지 여행을 허락하며, 여행 지방을 지정하면 예조에서 증서를 발급하고 지방관은 증서를 대조하여 호송할 것.
제물포조약은 일본의 야심을 그대로 관철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본조약 1조의 규정은 조선의 치안주권을 무시하는 규정이며, 5조에 의해서 1개 대대의 병력을 주둔하고 이에 필요한 병영의 설치, 수선비까지도 조선에 부담하는 횡포를 부렸다. 또한 속약의 체결은 임오군란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조선에서의 일본 상권 확보를 위한 강제 요구였다. 이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조선은 배상금 55만 원 중 우선 15만 원을 지불했고 박영효, 김옥균, 김만식 등을 수신사로 파견하여 사과의 뜻을 표하였다. 한편 일본은 공사관 수비를 구실로 1개 대대의 병력을 한성에 주둔하였다.
한편, 인천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50년 9월 수세였던 국군과 연합군이 공세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부터다. 한국전쟁 하면 떠오르는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진행된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되찾고,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되었던 북한군 주력 부대의 병참선을 일시에 끊어버린 것이다.
지금은 비약적으로 발전한 인천의 북쪽에 김포가 있다.
맥아더 동상 © 정철훈
인천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부터다. 이 군사작전으로 6ㆍ25전쟁의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평가가 있는 한편으로는 철거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제물포 구락부 인천 차이나타운 근처에 있는 제물포 구락부는 1901년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주로 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건립된 건물이다. 경사지를 이용한 회칠 마감된 벽돌조와 창 위의 페디먼트 장식이 특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거친 들판의 물로 둘러싸인 제물포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2012. 10. 5., 신정일) |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