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속담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말 많은 집이 장맛도 쓰다." "말 많은 집안은 살림이 잘 안 된다." "말 안 하면 귀신도 모른다." "말은 할수록 늘고, 되질은 할수록 준다." "말은 보태고 떡은 뗀다."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 등등 말에 대한 속담이 아주 많습니다.
하버드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20여 년 간 봉사한 매트 버드라는 의학 박사는 그의 인생을 정리하면서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라는 표제로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 말들이 인생이 결정되어진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말한 대로 이루어지기에, "말은 음식이 배를 채워 주는 것처럼 그 영혼을 만족시킨다. 곧 입술의 바른 말이 사람을 만족시킨다. 혀는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힘을 가졌으니, 혀를 놀리기 좋아하는 자는 그 대가를 받을 것이다."<잠언 18장 20~21절> 고 했습니다. 우리 운명이 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며, 복을 누리며 살기도 하며, 저주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대중가요 노랫말을 연구하는 연구회 박상희 회장이 가수들이 노래를 부른 대로 되더라는 것입니다. 늘 '죽겠다'는 주제로 노래 부른 가수는 다 죽었고, 슬픈 노래를 부른 사람은 다 슬펐고, 요절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가수 윤심덕은 1926년 현해탄에 몸을 던져 극작가 김우진과 동반자살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수가 마지막에 불렀던 노래가 '사의 찬미'입니다. 죽음을 찬미하다가 자기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남인수는 '애수의 소야곡'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 중에 눈감아드리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41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목포 출신의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정말 가슴이 아릴 정도로 애절하게 부르다 49세에 가슴앓이로 죽었습니다. 차중락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른 후 뇌염 증으로 29세에 요절했습니다. '마지막 잎 새'를 부른 배호는 신장염으로 30대 초반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흑점'이란 노래를 남긴 양미란은 골수암으로 숨졌습니다. '태양의 흑점처럼 어두운 내 마음'이란 노랫말에서 이미 암의 불길한 징조를 읽을 수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김정호는 '님'을 불렀는데, 그 곡에 '간다간다. 나는 간다.'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그 노래를 부르다가 폐결핵으로 33세에 진짜 갔습니다. 권혜경은 산장의 노래를 불렀는데, 아무도 찾지 않는 외로운 산장에서를 불렀기에 외로운 여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반면 송대관은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를 불렀는데, 정말 쨍하고 해가 떠서 아직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부른 노랫말대로 되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를 목청껏 부른 윤항기는 행복을 얻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동생 윤복희와 외롭게 자라난 윤항기는 '나는 행복합니다.'를 부르면서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님이 되더니, 신학대학까지 세운 정말로 행복한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너는 나에게 부르짖어라. 그러면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전에 알지 못하던 놀라운 일들과 비밀들을 일러 주겠다. <예레미야 33장 3절>
옥동자 정종철은 개그맨이 되기 전까지 냉면집 주방장으로 일했습니다. 걸어서 출근하는 동안 늘 "정종철, 바닥에서 살아도 하늘을 보자. 비록 뒷골목을 걸어 냉면집으로 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높아질 거야. 하나님은 틀림없이 나를 올려놓으실 거야"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외침은 곧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2000년 쟁쟁한 경력자들을 물리치고 KBS 공채 15기 개그맨으로 합격한 것. 그냥 보고만 있어도 웃음을 주는 '독특한' 외모, 주특기인 비트박스에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꽂힌 것입니다. 바로 개그 프로에 합류한 그는 '갈갈이 3형제' '옥동자'를 연속 히트시키며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정종철이 항상 웃는 이유는 뭘까, 뭐가 그리 행복할까, 어떤 고통의 시간을 보냈는지 등 "무명시절이 없던 저는 방송 시작과 함께 떴어요. 그러다 한순간 추락도 해봤지요. 집회에서 이런 얘기를 다 할 수 없어 책을 썼습니다.“ 한때 목회자를 꿈꿀 정도로 믿음이 좋았던 정종철은 사춘기 때 외모 콤플렉스를 겪으며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인문계 고교 진학을 포기한 그는 불평을 쏟아냈고, 급기야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오토바이를 즐기고 담배도 피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새워 놀고 새벽에 집에 들어서는데, 어머니의 기도를 듣게 됐습니다. '이 죄인을 벌하시고, 제발 우리 종철이 좀 붙들어주세요.'라며 울부짖던 기도가 제 심장을 뚫고 지나갔어요. 어머니 옆에 엎드려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지요. 외모도 보잘것없고, 그렇다고 뛰어난 학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재벌 2세도 못될 바에야 긍정적인 삶을 살자고요."
"하나님은 능하신 손아래서 더욱 겸손 하라.(벧전 5:6)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유명해지면서 그걸 잠시 잊어버렸어요. 스케줄이 바빠지면서 제 마음에 드는 곳부터 우선적으로 출연했고, 그러다보니 교회도 등한시했어요. 항상 아이디어를 연구해야 하는 개그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노력하지 않고 교만함에 빠져버렸지요."
2004년 봄을 보낸 뒤 그는 '실업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단 한 건의 스케줄 없이 몇 달을 보냈습니다. 고정적으로 들어오던 수입도 끊겼습니다. 더 이상 '옥동자 정종철'을 찾는 이가 없었습니다. 두려움에 휩싸인 그는 4개월여 동안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살도 생각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교회도 잠시 잊었습니다. 그때 그를 붙잡아준 이가 바로 아내인 황규림씨입니다. 당시 불신자였으나 남편과 함께 기도하며 곁을 지켜 주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책 '하나님을 웃기는 광대'(두레미디어) 출간 이후 교회에서 불러주는 일이 많아졌다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2004년의 반 이상을 방황하고 다시 주님 품으로 돌아왔을 때, 그분이 제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 줄 아세요? '너 왜 이제 왔니? 집에 오니까 좋지?' 그러면서 저를 가장 멋지게 꾸며주셨습니다. 돌아온 탕자처럼 말이에요."
"내가 누군지 알아? 다시 돌아온 탕자야." '옥동자' '골목대장 마빡이'로 온 국민에게 큰 웃음을 안겨준 개그맨 정종철(31·밀락순복음교회 집사). 방송활동이 뜸해진 요즘 그는 간증 무대에 서느라 바쁩니다.
2005년 그는 거듭난 신앙인의 모습으로 팬들과 만났습니다. 간증집회도 열심히 다녔고, 특히 NGO 홍보대사를 맡으면서 빈곤과 기아로 고통 받는 세계의 어린이들을 찾아가 그리스도의 건강한 웃음을 선물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더 크게 채워주셨습니다.
"행복은 서로 베풀고 사랑을 나눌 때 찾아옵니다. 요즘 많이 힘들다고 자살 같은 극단적인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떠올려보길 권면합니다. 그럼 힘이 생길 것입니다."
대중의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는 개그맨을 꿈꾼다는 정종철은 "복음을 전하는 행복한 광대로 평생 살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습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네 입을 크게 벌려라. 그러면 내가 채울 것이다.”<시편 81편 10절>
♬ 하늘의 문을 여소서 ♬
|
첫댓글 개그함시롱 냉면집도 차리면 되겄네여^^;;
네.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