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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사울왕 #사무엘
만약에 사울왕이 신접한 여인을 통해 불러올린 죽은자의 영이 사무엘이 아니었다면, 성경은 그 영이 사무엘이라고 지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불러올린 영에 대해서 일관되게 사무엘이라고 지칭하고 있다.또한 그 영이 사무엘이 아니라 귀신의 영이었다면, 그 영은 사울왕에게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울을 거짓으로 더욱 미혹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는 것과, 익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울과 세 아들이 전부 전사할 것이라는 진실을 알려준다. 과연 거짓과 미혹의 영이 이런 예언을 할 수 있을까 싶다.그렇다면 신접한 여인이 불러올린 영이 사무엘이 맞다면, 소위 강신술이라는 것은 실재한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 신접한 여인과 술사 발람의 예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강신술이나 초혼 등은 실재하는 원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선악과와 같이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므로 행해서는 안되는 금지된 기술인 것이다. 즉, 강신술 등을 행하는 신접한 자들은 그것이 자기들 보기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이기 때문에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이다.따라서 믿는 사람들은 신접한 자들의 강신술을 보더라도 그것의 원리 자체는 부정하지 않되, 그것에 미혹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20170806
#예배
오늘날 성도가 일반적으로 드리는 교회의 예배의 요소는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것, 성도와 성도가 주고 받는 것 이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로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요소로는 찬양, 기도, 봉헌 등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예배의 요소로는 설교자를 통한 복음의 설교이다.
셋째로 성도와 성도가 주고 받는 예배의 요소로는 성찬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예배의 요소를 분류했을 때 우선순위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것인 설교가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성찬이고, 그 다음이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요소인 찬양, 기도, 봉헌 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설교가 예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복음의 말씀을 설교자라는 대리자를 통해서 성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찬이 설교 다음으로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비록 표면적으로는 성도간의 교제이지만 이는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연합하게 하시는 성례이기 때문이다. 찬양, 기도, 봉헌 등이 예배의 우선순위에서 설교나 성찬보다 낮은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시므로 성도가 무엇을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실질적으로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요소가 가장 우선순위가 높고, 그 다음이 설교이고, 가장 하찮은 대우를 받는 것이 성찬이다. 설교나 성찬보다 찬양과 기도와 봉헌이 더 중요시 되는 이유로는, 결국에는 여전히 성도 안에 존재하는 죄성의 발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보다는, 내가 무언가를 함으로써 자기만족을 취하려고 하는 자기공로가 여전히 앞서기 때문이다.
#20220806
#요한계시록 #Revelation 18:21-22
21 이에 한 힘 센 天使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城 바벨론이 이같이 悲慘하게 던져져 決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Then a mighty angel picked up a boulder the size of a large millstone and threw it into the sea, and said: "With such violence the great city of Babylon will be thrown down, never to be found again.
Et sustulit unus angelus fortis lapidem quasi molarem magnum, et misit in mare, dicens : Hoc impetu mittetur Babylon civitas illa magna, et ultra jam non invenietur.
Καὶ ἦρεν εἷς ἄγγελος ἰσχυρὸς λίθον ὡς μύλινον μέγαν, καὶ ἔβαλεν εἰς τὴν θάλασσαν λέγων Οὕτως ὁρμήματι βληθήσεται Βαβυλὼν ἡ μεγάλη πόλις, καὶ οὐ μὴ εὑρεθῇ ἔτι.
거짓 교회인 큰 음녀 바벨론이 자기가 타고 있던 짐승에게 버림받아 잡혀죽어 패망하게 된 것과, 이 바벨론과 더불어 음행을 저질렀던 땅의 임금들과 상인들의 애통이 끝난 후에, 하늘에서 내려와 바벨론의 파멸을 선포했던 그 힘 센 천사가 마지막으로 큰 돌을 바다에 던지면서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을 완전하게 인증하며 공표한다. 바다에 던져진 돌이 큰 맷돌 같다는 것은 맷돌이 곡식들을 으깨어 갈아버리듯이 거짓 교회가 참된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갈아버리려고 하였고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의 영혼을 회복이 불가할 정도로 훼손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람이 손으로 돌릴 수 있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소나 말 등의 가축으로나 돌릴 수 있는 큰 맷돌 같다는 것은 거짓 교회의 규모나 역사가 사람이 어떻게 처치할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자의 손에 좌지우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사가 그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었다는 것은 거짓 교회가 아무리 공중권세 잡은 자의 권세 하에 있어서 교회와 성도가 어찌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주 하나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한 천사의 힘만으로 거짓 교회의 권세를 박탈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큰 돌이 바다에 던져졌다는 것은 파멸된 거짓 교회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재건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주님께서 강림하시기 전에는 거짓 교회는 짐승의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짐승의 머리가 죽은 듯 하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거짓 교회도 거의 망할 것처럼 보여도 다시 재건될 수 있다. 하지만 주님 강림하셔서 모든 성도들이 하늘로 들림 받은 후에는 마귀에게도 더이상 거짓 교회의 이용가치가 없기 때문에 완전하게 파멸된다. 참된 교회와 성도들은 주님께 죽기까지 이용을 당해도 절대로 버림받지 않고 30배, 60배, 100배의 하늘의 상급을 받으나, 거짓 교회는 마귀와 짐승에게 실컷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게 될 뿐이다. 큰 성 바벨론이 비참하게 던져진다는 것은 거짓 교회가 믿고 의지하며 지원을 받았던 짐승에게서 배신을 당하여 들짐승에게 살이 뜯겨 먹히고 뼈가 불살라지는 것처럼 조각조각 산산이 부서지고 철저히 버림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 사역은 뒷전인채 사업하는 교회, 정치질하는 교회, 사회운동하는 교회, 과학하는 교회, 문화활동하는 교회, 먹고 노는 모임하는 교회, 인맥쌓는 교회 등은 거짓 교회로 거의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비록 주님 오시기 전에는 그런 것들로 짐승이 주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천사가 바다에 내던진 큰 돌처럼 주님의 손에서 영원히 내쳐질 뿐이다.
22 또 거문고 타는 者와 風流하는 者와 퉁소 부는 者와 喇叭 부는 者들의 소리가 決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細工業者든지 決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決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The music of harpists and musicians, pipers and trumpeters, will never be heard in you again. No worker of any trade will ever be found in you again. The sound of a millstone will never be heard in you again.
Et vox citharœdorum, et musicorum, et tibia canentium, et tuba non audietur in te amplius : et omnis artifex omnis artis non invenietur in te amplius : et vox molæ non audietur in te amplius :
καὶ φωνὴ κιθαρῳδῶν καὶ μουσικῶν καὶ αὐλητῶν καὶ σαλπιστῶν οὐ μὴ ἀκουσθῇ ἐν σοὶ ἔτι, καὶ πᾶς τεχνίτης πάσης τέχνης οὐ μὴ εὑρεθῇ ἐν σοὶ ἔτι, καὶ φωνὴ μύλου οὐ μὴ ἀκουσθῇ ἐν σοὶ ἔτι,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은 음녀와 바벨론 같은 거짓 교회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돈벌이를 위해서 거짓 신자들의 거짓 신앙을 위한 극도의 감정고조를 불러일으키는 교회 음악가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교회 음악가이지만 실상은 가인의 자손으로서 수금과 퉁소 등의 악기를 만든 유발의 후예들일 뿐이다. 오늘날 교회 음악가들은 표면적으로는 교회 음악을 표방하지만 그들의 노래 가사에는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내용은 없고 지나친 자기비하와 자기연민만 가득하다. 그들의 음악 곡조는 가사를 음미하도록 잔잔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부를 수 있도록 쉽게 만들지 않고 가사를 잊어버릴 정도로 귀만을 즐겁게 하거나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음악가들만이 따라부를 수 있도록 지나치게 기교적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함으로써 주님을 드러내려 하기보다는 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 자기가 주목받으려고 한다. 바벨론의 세공업자들은 표면적으로는 거짓 교회의 휘황찬란한 건물과 화려한 장식을 위해 종사한 자들이고 이면적으로는 거짓 교회의 위선이 드러나지 않도록 그럴듯하게 위장하는데 종사하는 자들을 통칭한다. 그런 거짓 교회의 세공업자들은 자기들은 그저 시키는대로만 했을 뿐이라고 둘러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거짓 교회를 위해 건물을 짓고 장식을 하고 위선을 포장하는 자들은 우상의 신전을 짓고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섬기라고 하는 것과 같다. 바벨론의 맷돌 소리는 거짓 교회의 운영에 필요한 물질적 재원들이 공급되고 가공되고 사용되는 모든 일련의 과정들을 통칭한다. 거짓 교회 추종자들은 자기들만의 열심을 가지고 거짓 교회에 필요한 물품을 자발적으로 제공하고 거짓 교회원들을 위해 물심양면 헌신하고 봉사하지만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노력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무위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구원받은 성도가 아니라는 절망적인 결과만 확인하게 된다. 여신도에게 빤쓰를 내려보라 하고 하나님더러 자기에게 까불면 죽인다고 하며 온갖 정치집회를 주도하는 거짓 목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재물을 갖다 바치는 자들이 바로 바벨론에서 맷돌을 돌리는 자들이다.
#20210806
#신명기 #Deuteronomy 28:28-34
28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치는 것과 눈 머는 것과 정신병으로 치시리니
29 맹인이 어두운 데에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하지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리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30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 여자와 같이 동침할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며
31 네 소를 네 목전에서 잡았으나 네가 먹지 못할 것이며 네 나귀를 네 목전에서 빼앗겨도 도로 찾지 못할 것이며 네 양을 원수에게 빼앗길 것이나 너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며
32 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찾음으로 눈이 피곤하여지나 네 손에 힘이 없을 것이며
33 네 토지 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34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말미암아 네가 미치리라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가나안 땅은 그 주위로 사방에 온갖 이방 족속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침략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지형이다. 따라서 자연적 조건으로는 도저히 외부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는 형국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오로지 여호와를 믿고 순종함으로써 여호와의 보호를 받아야만 가나안 땅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불순종하게 되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약소국이 되게 하시고 주변의 이방족속들을 강대국이 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노략하게 하셨다. 그렇게 외세의 침략을 당하게 되면 지배를 받는 쪽은 지배하는 쪽으로부터 온갖 수탈을 당하게 된다. 특히나 여호와의 보호를 받아야 할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여호와께서 그 보호를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이 당하게 될 침략과 수탈은 가장 최고로 심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자기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동침하게 된다는 것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강간을 당하거나 성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대적한 거짓 선지자는 예레미야에게서 그의 아내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창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자기의 집에는 지배국민이 살게 되고 논밭의 소산물은 지배국민이 빼앗아가며 가축은 물론 자기 소유의 재산까지 지배국에 몰수 당하게 된다. 사사 기드온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추수할 시기에 맞춰 미디안이 침략해서 소산물들을 모조리 쓸어가는 바람에 기드온은 동굴에서 몰래 포도즙틀로 밀 타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지배국은 피지배국의 자녀들을 포로로 끌어가서 노예로 삼거나 적군의 화살받이로 쓰거나 하는 식으로 억압을 하였다. 아람의 군대장관인 문둥병자 나아만이 북 이스라엘을 치면서 한 어린 여자아이를 데려와 자기 부인의 시녀로 삼은 것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국의 왕족과 귀족들의 아들들 중에서 재능 있는 자들을 데려가 왕궁의 신하로 삼은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물론 이런 사례는 아주 극히 희귀하게 그나마 대우를 잘 받는 것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자녀들은 적국의 포로로 끌려가서 매우 비참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침략과 수탈은 우리나라가 36년 동안 일제의 악랄한 지배를 받으면서 위안부라는 성노예와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끌려간 것과 각 가정의 제사 기물을 비롯한 온갖 금속제품을 빼앗긴 것에도 해당되는 것들이다. 이렇게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외세의 침략과 가혹한 수탈을 당하게 되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미쳐버리는 자들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미쳐버려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 사도 시대로부터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인정하기 전까지 대략 3여 년 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을 비롯한 온갖 압제자들로부터 이러한 침략과 노략과 수탈을 당해왔다. 이스라엘에게는 불순종과 죄악의 대가로 침략과 수탈이라는 징벌이 주어졌다면 그리스도교 초기 시절에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믿는 신앙으로 인해 고난으로서 이런 핍박이 주어졌던 것이다. 범죄한 이스라엘은 침략과 수탈을 당하면서 정신이 미쳐버리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가산을 몰수 당하고 여자들이 수치스럽게 욕을 당하고 살던 동네에서 쫓겨나서 떠돌아 다니게 되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거나 구걸하게 되었어도 미쳐버리기는 커녕 도리어 신앙이 더욱 강건하게 되었다. 압제자들이 보기에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미친 것처럼 생각되었으나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는 고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렇게 온갖 핍박과 고난에도 견고히 인내하는 성도들은 세상이 더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교회라는 이름을 달고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고의적으로 지속적으로 불순종하고 거역하게 되면 그 교회는 더이상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어 세상이 보기에 더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교회의 죄악된 모습 때문에 행여나 복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교회에서 믿음이 아직 연약한 사람들은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 세상과 다시 결탁하게 되는데, 이는 범죄한 이스라엘이 약혼녀를 침략자에게 빼앗기는 것과도 같다. 교회가 어떤 위기감을 느껴서 무언가 획기적인 이벤트 사역을 하여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하더라도 모여든 사람들은 그 이벤트에서의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식사나 상품 때문에 오기 때문에 그것들만 받아먹고 돌아갈 뿐이어서 교회로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막대한 재정만 날리게 되는데 이는 범죄한 이스라엘이 소산물이나 가축 등을 침략국에게 빼앗기는 것과도 같다. 자녀를 둔 교인 부모가 자녀를 어려서부터 복음대로 가르치지 않고 형식적인 교회생활만 하게 하면서 학업이나 취업이나 가족여행 등을 더 비중있게 해서 키우게 되면 결국 그 자녀는 참된 복음과 신앙과 교회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세상과 결탁해버리게 된다. 그렇게 장성한 자녀가 교회를 저버리게 되면 교인 부모는 일말의 양심 때문에 자녀가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는 하지만 이미 자녀를 돌이킬 여지는 없게 된다. 이렇게 교인 부모가 자기 자녀를 세상에 내어주는 것은 범죄한 이스라엘이 자기 자녀들을 적국에 포로로 빼앗기게 되는 것과 같다.
작년부터 2년 가까이 이어지는 전세계적인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한국 교회는 예배를 비롯한 온갖 모임들이 막히게 됨으로써 약혼녀와 자녀 같은 연약한 교인들을 세상에 빼앗기게 되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조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절망감에 빠지게 되어 방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정부 당국에 화살을 돌리고 책임을 떠넘기며 온갖 악독한 비방과 원망과 저주를 하는 미친 짓을 서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의 힘으로 타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회가 정작 해야 할 것은 지금까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저질러온 온갖 죄악들을 낱낱이 회개하는 것 뿐이다.
#20200806
#레위기 #Leviticus 18:21
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여호와께서는 불법적이고 가증스러운 간음죄들을 열거하시다가 갑자기 몰렉이라는 이방신에게 자녀를 제물로 주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다. 우리 생각으로는 왜 이 우상숭배와 인신제사가 나오는지 의아해 하게 되고 더 지나쳐 교만한 자들은 자기들의 지성으로 이 구절이 불필요하게 끼어들었고 문맥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 같이 내 지성에서 빗겨가는 듯한 성경 내용을 보더라도 내가 맞다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과연 숨겨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에서는 시종일관 이방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간음에 비유한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남편이 버젓이 보는 앞에서 외간남자들과 간음을 저지르는 음란한 아내로, 어려서부터 남자들에게 몸을 내어준 오홀라와 오홀리바로 비유하시며 말씀하셨다. 또한 호세아에게는 직접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시고 결혼 후에도 다른 남자와 간음하여 낳은 세 자녀를 돌보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아내로 삼으신 여호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겪게 하셨다. 이러한 성경의 관점으로 보면 육체적 간음죄 중에 우상숭배와 인신제사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삽입하신 여호와의 의도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명령이 중간에 삽입되었다고 해서 육적인 간음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도리어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우상숭배와 인신제사야말로 간음을 비롯한 십계명 전부를 한꺼번에 위배하는 저주받을 죄인 것이다. 몰렉을 비롯한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에서 1-4계명 전부를 직접적으로 위배한다. 부모가 자녀를 죽음에 내어 모는 것으로써 5-6계명을 어기게 된다. 우상숭배와 더불어 인신제사라는 막장에는 반드시 종교의식을 가장한 집단 난교가 벌어지기 때문에 7계멍을 어기게 된다. 여호와께서 열매로 주신 자녀를 몰렉에게 제물로 바쳤으므로 여호와의 것을 도둑질함으로써 8계명을 어기게 된다. 여호와가 아닌 몰렉에게 맹세함으로써 9계명을 어기게 된다. 우상숭배와 인신제사의 목적은 결국 탐심에 기인하므로 10계명을 어기게 된다. 그러므로 이 금령은 금반지의 다이아몬드와도 같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우상숭배와 인신제사를 엄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 죄악이 끊인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자녀들을 인신제사로 바쳤는지 힌놈이란 신에게 제물로 바친 자녀들의 뼈를 버린 골짜기를 힌놈의 골짜기라고 부르는데, 지옥을 뜻하는 게헨나가 바로 이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유다의 아하스 왕 또한 어려움에 봉착하자 왕위를 이을 장남을 불태워 죽였다. 아마도 선지자 에스겔이 여호와의 영에 이끌려 간 수많은 마른 뼈가 있는 곳이 이 힌놈의 골짜기가 아니었나 싶다. 여호와께서는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 돌이키지 않고 이런 가증한 죄를 계속 짓자 더이상 용서하지 않으시고 앗수르와 바벨론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다. 잉카제국은 마야문명이라는 탁월한 문명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인신제사라는 끔찍한 만행을 유지해옴으로써 스페인의 약탈자들에 의해 처참히 멸망 당하는 징벌을 받아야 했다. 이는 오늘날 신자건 불신자건 모든 인류는 자녀들의 육체적 생명을 소중히 해야 함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자기 자녀들 뿐만 아니라 어른의 보살핌이 필요한 모든 미성년자들의 생명을 소중히 해야 한다. 친자녀이건 의붓자녀이건 자기가 돌봐야 할 자녀들을 방치하고 학대하여 죽음으로 내모는 부모들은 몰렉과 힌놈에게 자녀를 불태워 죽여 바친 죄를 짓는 것이다. 미성년자와 영유아 대상으로 끔찍한 성범죄를 저질러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파괴한 조주빈과 N번방 회원들, 손정우와 다크웹 회원들은 자기자신들을 신으로 여겨 인신제사를 한 것과 같다. 남녀가 육체적 쾌락에 빠져 성관계를 하고 나서 임신하게 되자 인위적으로 낙태하거나 출산 후 유기하여 죽이는 것 또한 힌놈의 골짜기에서 자녀를 죽이는 것과 같다.
인류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오늘날에는 인신제사를 하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녀를 몰렉에게 바치지 말라는 여호와의 금령이 오늘날 교회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자녀를 둔 신자 부모에게 있어 자기 자녀를 불태워 바칠만한 몰렉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가치있게 여기는 모든 것이다. 복음의 가치를 따라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가치를 따라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몰렉에게 자녀를 불태워 바치는 것이다. 자녀를 교육시키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께 쓰임받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좋은 학교와 취업을 위한 것이어서 시험기간에 자녀를 교회 대신 학원으로 보낸다면 그것이 인신제사이다. 자기들보다 부유하지 못한 집안의 아이들과는 친구로 사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러하다. 자녀가 크건 작건 잘못을 범했을 때 부모로서 적절히 훈계와 징계를 하지 않고 무조건 감싸는데 급급한 것 또한 그러하다. 이처럼 오늘날의 몰렉에게 자녀를 불태워 바치는 길은 너무나 다양하게 퍼져있기 때문에 신자 부모들은 자녀를 키우는데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20190806
#매일성경 #에스겔 18:1-18
하나님께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의 결정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구원하시건, 구원하지 않으시건, 그분의 결정에 감히 인간이 왈가왈부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하나님의 구원의 기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의인이건 악인이건, 구원이건 멸망이건, 은혜이건 저주이건 지극히 개인적으로 적용하신다. 자기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타인에게 전가할 수 없으며, 자기가 지은 죄악을 다른 이에게 떠넘길 수 없다. 죄가 전가되는 유일한 경우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타락하고 부패한 것이며, 은혜가 전가되는 유일한 경우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후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의인의 삶의 예시를 드시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둘은 나누이지 않으며 하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기반이 되어야 하나님께 인정 받는 참된 선행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교회들이 아무리 입바른 소리를 지껄이더라도 정작 그 드러내는 모습이 선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에 진정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구원받은 의인의 행위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의인은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의인은 자기가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자각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순종하고자 하여 삶에서 의로운 행위로 자기의 구원을 드러내며 증명한 것이다. 이 원리는 너무나 오묘해서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참된 신자는 성령께서 의지를 변화시키셔서 자발적으로 선행을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그 어떤 선행을 하든지간에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 도리어 그 선행을 하게 하셔서 참된 신자임을 증거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인은 자기가 받은 구원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거나 떼어주거나 나눠줄 수 없다. 심지어 자기 아들에게조차도 그리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 의인을 구원하신 것이지, 의인의 의를 아들에게 적용하신 것은 아니다. 그 의인의 아들은 자기의 행위로써 자기의 구원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의인도 그렇고 그의 아들도 그렇고 외적인 신분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족속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이며 백성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외적인 신분일 뿐이다. 물론 그것 자체로도 매우 귀중한 선물이다. 그것조차 받지 못한 이들은 아예 처음부터 구원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의인은 자기 신분에 걸맞게 의를 행하여 구원을 받았는데, 그의 아들은 그러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처럼, 아니 이방 족속들보다 더 심한 패악을 저질렀다. 그 의인의 악한 아들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외적인 신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아들은 그 신분에 걸맞게 행하지 아니하고, 자기 행위로 하나님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도리어 고의로 악을 저지름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고 그 영광을 가렸다. 그 아들이 저지른 죄는 마치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전에서 저지른 죄와 동일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면서도 탐욕스럽고 음란한 죄를 스스럼 없이 저질렀다. 그런 그들이 맞이한 최후는 무엇인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제사장으로서 자신만만하게 하나님의 법궤를 들고 나갔다가 법궤도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그들도 무참히 전사하고 말았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들을 낳다가 산고로 죽고 만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면서 스스럼 없이 죄를 짓는 자들이 맞이할 최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에스겔 시대에만 유효한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 시대에도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도 예수님을 못박아 죽였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였으면서도 마지막에 돈 몇 푼에 자기 스승을 팔아 넘겼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교회라 하면서 멸망의 가증한 것에게 자리를 내어준 부끄러운 교회들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복음 사역자라 하면서 복음을 순전히 드러내지도 않고 자기 탐욕에 따라 교회를 이용해먹는 거짓 담임목사들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구원을 받았다고 떠들면서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삶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구원의 확신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신자의 심령을 부드럽게 변화 시키셔서 신자가 자기 의지로 선을 행하게 하시는데, 저런 자들에게서는 그런 성령의 역사하심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사도의 가르침은 우리의 입술의 고백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리어 우리의 입술은 우리 전 인격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진정한 의미는 참된 신자는 삶의 모든 과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구원자이심을 시인하며 드러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입으로만 시인했다고 해서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은 사실 구원파나 다름없는 이단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의아하고 혼란스러운 경우는, 분명 한동안은 의심의 여지 없이 참된 신앙으로 보이는 선한 열매를 맺은 어떤 이가 어느 때에 복음을 저버리고 돌아서는 경우이다. 오랜 기간 동안 그래도 진정성 있는 담임목사인줄 알았는데 어느 때 부터인가 점점 죄악의 기미가 보이더니 마침내는 교회에 치유하기 어려운 커다란 상처를 주는 담임목사를 볼 때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정죄하지 않으려, 판단하지 않으려 애를 써도 그가 그동안 교회에 끼친 해악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발람과 이세벨을, 가룟 유다를 이 교회에 세우신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그저 그런 가짜가 당하게 될 비참한 최후가 성경에 너무나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하루빨리 그에게 그 심판을 이루어달라고 믿음으로 간구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죄와 심판을 다른 이에게 전가할 수 없다. 그는 성령을 모독하고 그분의 사역을 훼방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의 심령은 이미 더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와 점령한 상태이기 때문에 처음보다 더 더러워졌다. 한 번 성령을 내어쫓고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욕보인 자이므로 확실한 멸망을 당하게 될 뿐이다. 이 땅에서는 유리하는 별과 같이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다가 사라질 뿐이다.
거짓된 구원의 확신은 우리를 방자하게 만든다. 방자하게 행하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가볍고도 하찮게 만들며 죄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의 확신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막대한지를 알게 하고 그만큼 우리의 죄가 얼마나 뿌리가 깊고 심각한지를 깨닫게 한다. 아울러 작은 것에 감사하게 하고 작은 죄에도 민감하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죄에 빠져 허우적 댈 때 절망에 빠지지 않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참된 구원의 확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