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6장에서는 2가지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전반부는 송사문제이며 후반부에서는 한 몸의 원리를 다룹니다.
후반부에서 창기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칭시키기까지 극약처방을 합니다.
송사문제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반적인 문제입니다.
7절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형제들끼리 피차 송사하므로 서로간의 허물을 완연히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직 옳으냐 그르냐 서로 따지는 것은 어리고 미성숙한 증거입니다.
바울의 처방은 송사할 바엔 차라리 손해 보는 것이 낫다는 쪽입니다.
6절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그럴 바엔 차라리 속는 것 곧 당하고 빼앗겨 버리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한국교단의 장로회에 재판국을 두는 것은 교회 안의 문제를 교회법으로
재판을 하므로 세상 법에 넘기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교회의 문제가
세상 법정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건 서로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 된
형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를 송사하는 그 자체를 불의로 봅니다(8절)
과거에 제가 몸담은 교단에서 신학교문제로 서로 송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하지 말라 그거 줘 버려라고 했습니다.
어차피 신학교로 지어졌으니 이쪽이든 저쪽이든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것 아니냐
그런데 그걸 세상의 법정에 끌고 가서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며 싸우느냐는 거지요.
9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아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형제간에 서로 송사하는 불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을 따지고 계산할 여유가 없습니다.
10절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언제든지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탐람, 술 취하는 자,
후욕, 토색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계속 그런 상태라면 앞으로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이와 같은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 소유한 사람은 당하고 맙니다. 맞붙어
싸우면 똑 같은 사람이 됩니다. 악한 사람과 싸워 이기려면 더 악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교회의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자체가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 문제를 해결할 권위를 잃고 맙니다.
그래서 11절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을 같이 보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 곧 성령과 진리입니다. 만일 형제를 고발한다면 둘 중에 하나는 주의
지체가 아니든지 둘 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의 말씀과 성령 안에 거할 때에 씻음,
거룩, 의롭게 하심을 얻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의 삼팔선이 뚜렷해야 합니다.
만약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 있으면 인간관계에서 여러 가지의
먹구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유인이 됩니다. 서로 용서하지 못할 앙금이 없습니다.
사실 중병이 드는 원인도 다른 이에 대한 응어리와 앙금이 큰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께도 성령과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자가 됩니다.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가정과 직장 등 사회인으로서도 자유인이 되어 매인 것도 없고 가리는 것도
없이 어느 누구에게도 담백한 마음으로 정중하면서도 담대하게 상대를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