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관상의 대가' 백운학 선생..
근래에 우리나라에서 관상의 대가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는가? 단연 백운학白雲鶴이다. 1970-80년대까지 서울에는 백운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관상가가 상당수 활동하였을 만큼 백운학은 관상계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원조 백운학은 요즘 사람이 아니라 구한말 대원군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역문관 유충엽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백운학은 경남 청도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젊었을 때 청도 운문사에 있던 일허 선사一虛禪師를 만나 관상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신상전편>을 사사 받았다. 백운학은 일찍이 관상에 소질을 보였던 모양이다. 일허 선사는 백운학에게 '너는 애꾸가 되어야 한다. 한쪽 눈이 없는 애꾸가 되어야 사람들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충고 하였다. 일허 선사의 가르침에 따라 백운학은 멀쩡했던 한 쪽 눈을 담뱃대로 지져서 자신을 진짜 애꾸로 만들었다. 그러한 대가를 치르면서 백운학은 관상의 깊은 경지에 들어 갔던 것 같다. 청도에서 관상 수업을 마친 백운학은 어느 날 한양에 올라온다. 당시 대원군이 살던 운현방(현재 운현궁이 있는 자리)을 찾아가 마당에서 팽이를 치고 있던 13세 소년 명복 도련님에게 "상감마마 절 받으십시오" 하고 땅바닥에서 큰 절을 올린다. 열세 살 먹은 어린 아이에게 임금이라고 하면서 큰절을 올렸다는 보고를 받은 대원군은 하도 황당해서 애꾸눈 백운학이를 불러 자초지종을 묻는다. 백운학 왈, "제가 한양에 와서 보니까 이곳 운현방에 왕기가 서려 있음을 보았습니다. 저기서 팽이를 치고 있는 명복 도련님은 제왕의 상을 갖춘 분이라서 큰절을 올린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백운학은 대원군에게 복채를 요구하였다. 얼마를 주면 되느냐고 하니까, "제왕의 상을 보았는데 3만냥은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주라는게 아니고 4년 후에 주시면 됩니다."
3만 냥이면 엄청난 거액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원군은 돈이 없던 시절이라 복채를 곧바로 줄 수는 없었고, 돈을 주겠다는 약속어음 비슷한 증서를 백운학에게 써 주었다고 한다. 과연 그로부터 4년 후에 명복 도련님은 고종으로 즉위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백운학은 복채를 받기 위해 대원군이 써준 어음을 들고 운현방을 찾아왔다.
대원군을 찾아갈 때 백운학은 홀몸으로 간 것이 아니고 당나귀 4마리를 끌고 갔다고 한다. 당나귀 4마리는 3만냥의 엽전을 싣기 위한 용도였음은 물론이다. 복채로 3만 냥 외에도 백운학은 대원군에게 벼슬을 요구하였다. 벼슬도 못하고 죽으면 신위神位에 '현고학생顯考學生' 이라고 써야 되니까, 학생을 면하기 위해서 백운학은 청도현감 자리를 추가로 요구하였다.
백운학은 복채로 3만 냥과 함께 청도현감이라는 벼슬까지 함께 받았다고 한다. 배포 한번 대단했던 샘이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백운학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이후로 조선팔도에 수많은 가짜 백운학이 탄생하게 된다. 여기저기 백운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관상가가 하도 많아서 1990년대 중반 정보기관에서 전국의 백운학이 과연 몇 명인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조사된 숫자가 자그마치 29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광주에서는 3명의 백운학이 활동을 하고 있었고, 웃지 못 할 사실은 그 3명의 백운학이 모두 같은 빌딩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로 자기가 진짜 백운학이라고 주장하였음을 물론이다. -조용헌님의 글에서-
*관상이야기..
필자는 관상을 배우려고 재야의 숨어 있는 관상의 대가들을 수소문한바 있다. 그 과정에서 전혀 뜻밖에도 재야가 아닌 현직 대학 교수 가운데 관상에 깊은 조예를 가진 인물을 알게 되었다. 성균관대 미대 교수로 있던 이열모 교수가 바로 그 사람이다.
지금은 정년퇴직하고 서울W미술관 관장으로 있다. 1997년 원광대 서예과 김수천 교수의 소개로 성균관대 이열모 교수를 만나 관상에 얽힌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이 교수의 관상담觀相談 가운데 유명한 일화가 내무부장관을 안응모 씨의 승진을 알아맞힌 이야기이다. 안응모 씨는 말단 경찰 공무원부터 시작해서 장관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친구였던 안응모씨가 승진할 때마다 이 교수가 관상을 보고 그 사실을 미리 알아 맞혔는데 3번 예언에서 3번 모두 적중하였다. '자네 언제쯤 승진 할 것 같네' 하면 어김없이 그 시기쯤에 안응모 씨가 승진하곤 하였던 것이다. 이 교수가 관상을 잘 본다는 소문이 나자 그의 화실로 사람들이 몰려와서 관상 보아 달라고 사정하는 통에 화실을 여러 번 옮겨야만 하는 에피소드도 겪었다.
미국 조지 워싱턴대 유학시절에도 친분 있는 교포들이 관상을 보러 오기도 하였다. 아무튼 박정희 대통령만 제외하고 이후락 정보부장, 박종규 경호실장을 비롯한 정.관계의 모모한 인사들이 중간에 사람을 넣어서 이 교수에게 자신들의 관상평을 부탁하곤 하였다. 직업적인 술객이 아니고 동양화를 전공한 현직 대학교수니까 더욱 신뢰감이 갔던 것일까!
이 교수가 처음 관상을 배우게 된 인연도 재미있다. 서울대 동양화과를 다니다가 6.25를 만나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피난을 온 사람이 많아서 조그만 여인숙 방 하나에서 어떤 영감님하고 방을 함께 사용해야만 했다. 이 영감님이 관상의 대가이던 김경운 씨였다.
같은 여인숙 방에서 피난살이 하던 대학생 이열모의 관상을 보고 '너는 난리 통에도 절대 죽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언제 대학교수가 되고 이후로 이러저러하게 살 것이다.' 는 예언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니 이 양반이 했던 예언은 거의 적중하였다는 것이 이 교수의 술회이다. 김경운 씨를 통해 관상의 세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다가 서울대 미대 제학시절 부처님상을 소묘하면서 부처님의 얼굴을 왜 이렇게 조성하였을까? 32상 80종호는 무엇인가, 가장 이상적인 성자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길을 가거나 버스를 타면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곤 하였다.
6.25이후 어느 날 대학생 이열모가 우연히 소격동 쪽을 지나가다가 어느 관상 보는 집을 우연히 들르게 되었다. 관상과 인연이 있어서였는지 거기에는 부산 여인숙에서 만났던 김경운 씨가 관상을 보고 있지 않은가. 그때부터 시간 날 때마다 김경운 선생에게 놀러 갔다고, 유망한 제자가 들를 때마다 김경운 씨는 관상의 핵심을 전수해 주었다.
하지만 김경운 선생은 이열모에게 '자네는 관상에 타고난 소질이 있어서 조금만 더 공부하면 이 분야에 대가가 될 수 있지만, 관상쟁이라는게 천대받는 직업이니까 이거 하지 말고 대학교수를 해라'고 충고하였다.
이열모 교수는 관상의 적중도에 심취해 있다가 40대 후반 들어서면서 다른 사람의 앞날을 미리 안다는 일이 무섭게 느껴질 뿐더러 동시에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뒤로 관상을 중단하였다.
단, 대학에서 수업을 받았던 학생들이 4학년 졸업할 무렵에는 진로선택에 관련된 조언만큼은 해주었다.
1997년 W미술관에서 이열모 교수를 만나 관상 이야기를 나누면서 필자는 이 교수에게 '한국의 관상학'에 대한 책을 하나 써 주시면 어떻겠느냐고 엉뚱한 부탁을 드린 적이 있다. 사실은 이 분야는 한국의 이면문화사요, 생활사에 해당되기도 한다.
미술평론에 관한 책이야 선생이 아니라도 쓸 사람이 많지만, 관상에 대한 내용은 이열모 교수 같은 사람이 책을 써놓지 않으면 영영 사라져버리고 만다. -조용현님의 글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_()_()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_()_()_()_
재밌네요.아미타불
감사합니다_()_()_()_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_()_()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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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호식하는 반풍수 조선생 글이군요~
감사합니다_()_()_()_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복된날 되세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_()_()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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