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조부께서는 왜정시대에 부산 우체국에 근무하셨고 큰 외삼촌과 어미니는
부모와 함께 초량에 사셨는데 이른 아침 바닷가에 나가면 바닷물에 문어가
떠 밀려와 있어서 집에 주워오시기도 하셨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러다가 시골에 계셨던 외증조모께서 장남이 돼 가지고 외지에 나가 있으면
안된다며 시골로 내려오라고 간절한 부탁에 뿌리치시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 두고
시골로 내려가 처음에는 진주시 사봉면 죽항리에 사시다가 나중에 금산면 덕의로
내려가셨다고 한다.
농사일도 제대로 못하시는데다 도시생활에 젖어 있다가 촌에서 생활하시려면 여간
불편하시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월이 가자 밑으로 남동생이 셋이나 불었다.
가세가 기울어 남동생들은 학교에도 가는 둥 마는 둥 하였고 어머니는 남여7세 부동석
이라고 10살때부터 초등학교는 물론 외부 출입도 못하셨다 하셨다. 어머니의 오빼 되시는
큰외삼촌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하자 일본 담임
선생님이 재주가 아깝다며 자기 친구한테 의뢰하여 일본 미쯔비시 중공업에 취업하여
일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외조부는 병이 들어 일찍 돌아가시자 입이라도 하나 줄인다
고 어머니는 남씨 집안으로 시집을 오셨다.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건너갔던 많은 조선인들이 보따리를 싸들고 다시 조선으로 나왔다.
당시 부산이나 마산 기차역에는 고향으로 찾아가는 사람들이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큰 외삼촌은 일본 미쯔비시 중공업에서 기차불통(화차) 만드는 기술자였는데 우리나라로
나오니 그 고급 기술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시골에서 논 농사나 지어면서 지내셨는데 어느날 집안
동생뻘 되는 청년이 찾아와서 "형님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정부에서 여러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라고 가입을 독려하는 바람에 보도연맹이 뭔지도 모르고서,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위임을 했던 것이다.
해방이 되기 전 살기가 괜찮은 지식층에서는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며 자식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는
집안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은 신학문을 접하면서 '다 같이 일하고 공동분배로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라고 선전하는 공산주의 이론에 심취하는 소위 뺄갱이들 사상에 물 든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해방후 극심한 정국 혼란을 틈 타 좌익세력들이 설치자 극우세력인 오제도 검사를 비롯한 검찰,경찰,
방첩대 등의 간부들이 모여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어 이들을 교화시키고 관변단체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국민보도연맹 창설 당시 정부는 좌익사상 전향자를 계몽 지도해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조직 목적이라 했다. 따라서 보도연맹은 좌익사상 전향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이들을 통해 남아
있는 좌익세력들을 붕괴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전향자단체를 표방했지만
조직의 실질적 성격은 국가가 주관한 관변단체로서 반공사상을 전파하고 좌익사상을 전향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다. 창설초기의 보도연맹 가입자는 전향자가 대부분이었으나 조직확대과정에서 정부는
의무가입대상자를 광범위하게 규정하고 좌익과 관계없이 가입인원을 행정기관에 할당하여 강제로 가입
시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큰 외삼촌의 경우에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6.25사변이 터지자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을 곧바로 소집 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 오던 보도연맹원들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무단으로 즉결처형한 것이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검속은 6.25전쟁 당일부터
한강이남 전국에서 실시되었고 소집과 연행된 사람들은 경찰서 유치장이나 창고 공회당 형무소 등에
구금되었다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트럭에 대워져 비밀장소로 이동된 후 처형되었던 것이다.
외삼촌의 경우는 여름철 논에서 논 메다가 누군가 면에서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면에 갔다가 그 이후로
소식이 두절된 것이다. 당시에 외삼촌은 결혼해서 첫딸이 세살(한국나이)이었다. 휴전이 된 이후에도 죽은
줄도 몰라 제사도 지내지 못하고 있었다. 작은 외삼촌들도 차례차례 결혼해 분가해 나가면서 외가는 외할머니와
외숙모, 외사촌 여자만 셋이 살았다. 그러다가 외숙모는 외사촌이 국민학교 6학년 때 친정측에서 딸을 불러 재혼
시킴으로서 재가하게 되었고 그 후로는 외할머니가 손녀를 데리고 사셨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보도연맹원에 대한 검거 및 학살은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연행과 사살명령이 누구로부터 내려왔으며 언제 어떤 단위에서 결정되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군경의 수사, 정보기관을 비롯한 여러 국가기관들이 일사분란하게 이 사건에 동원된 것은 최고위
층의 결정과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행방불명된 이들의 가족들은 어디에 호소할 곳도 없이
연좌제 등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살아왔다. 작은 외사삼촌이나 나는 군 장교임용시 신원조회에 걸릴까봐 노심초사했었다.
세월이 근60년이나 흐른 다음 노무현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보도연맹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해 처음으로 사과했다.
또 진주에서 보도연맹 유가족회가 결성되어 유골이라도 찾겠다고 하자 정부에서는 못이기는체 쥐꼬리만한 예산으로
풍문으로 들어오던 명석면 골짜기 흙더미를 파헤쳐 유골 일부를 발굴하고 나머지는 아직도 발굴을 못하고 있다.
발굴된 유골은 DNA검사로 유족들에게 돌아갔으며 일부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하여 위로금을 받았다고 한다.
외삼촌 유골은 아직 발굴되지 못했으나 과거사 진실 화해위원회에서 나머지 보도연맹희생자의 군경에 의한 학살임을 인정하여
정부의 사과와 유족들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당한바 유족인 원고들이 입은 손해를 국가가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아무런 죄도 없이 끌려가 희생되고 가족은 풍비박산 되어 반세기가 넘도록 고생했는데 지금 와서 사과한들 본인과 부모형제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나고 자손들만 남았는데 사과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국가를 상대로 국가배상청구를 하라고 하는데
돈 몇푼 받아봐야 응어리졌던 가슴이 얼마만큼이나 풀리겠는가? 원통하도다 원통해. 이 억울함을 어디다 토해낼꼬?
첫댓글 보도연맹 희생자는 경상도 지방에서는 함안과 김해 진영에서 많이 나왔는데 인천 이씨인 고 이규정 선생의 소설에도 많이 등장한다. 최근 방송에서는 함안 이천 이씨 종친회 건물도 나왔다. 함안 여항산에 있는 보도연맹 희생자 추모비에 등재된 이름만 1천 명이 넘었다. 인민군 방호산 6사단과 대치해 있던 상태에서 조금만 사상적 의심이 가는 식자층은 무조건 검거되어 처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전에 이규정 선생님은 보도연맹이라고 하면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