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1월20일 전경련 회관에선 아주 이색적인 고희연(古稀宴)이 열리고 있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고희에 이르자 전경련측에서 축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당시 정 회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재계를 대표하는 전경련 회장일 뿐 아니라 88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막후 주역이었고, 현대그룹의 국내외 위상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재계에선 이런 정 회장을 스스럼없이 ‘왕회장’으로 부르고 있었다. 명실상부한 재계 총수의 고희연이라 전경련 회관은 축하객들로 넘쳐났다. 이 자리에서 정 회장은 특유의 재담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하객들에게 감사의 말을 막 끝내는 순간 갑자기 실내가 조용했다. 정 회장을 축하하기 위해 한 인사가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또 하나의 경제계 거목인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시끌벅적하던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 졌다. 당시 이 회장은 와병 중이라 일체 외부 활동을 하지 않을 때였다. 이런 이 회장이 모습을 보였으니 참석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병색이 짙은 모습으로 나타난 이 회장은 정 회장에게 직접 고른 ‘백자(白瓷)’를 선물하며 덕담은 나눴다. 이때 도하(都下) 언론은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의 화해’라는 제목으로 의미있게 보도했다.
-
-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정주영 회장의 고희기념회장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조선일보DB
이날 회동이 있기 전까지 두 회장은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경련은 이병철 회장이 만든 단체였지만 전경련 행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삼성보다 당시 현대그룹의 위상이 높았고 은연중 정 회장은 재계의 리더는 자신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곤해 이 회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재계 1위 자리를 내준 이병철 회장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음은 물론이다. 한동안 서먹한 관계를 유지했다. 두 사람은 출신 성분이나 사업 스타일 역시 확연히 구분되었다. 부잣집에서 자란 귀공자 스타일인 이 회장에 비해 정 회장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사업가였다. 이 회장이 금융이나 소비재 사업에 치중했다면, 정 회장은 건설·조선 ·자동차 같은 대형 제조업을 이끌고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이 사업 업종상 맞붙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단지 재계를 대표하는 사람이 누구냐를 놓고 은근한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차 이 회장이 정 회장의 고희연에 선물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2년 후 이 회장은 타계했고, 정 회장은 이 회장의 빈소를 찾아 애도하며 ‘돈독’함을 나타냈다. 이병철 회장이 타계 전 정 회장과 화해했으나 두 그룹간 사업적 결합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 현대그룹이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건설·조선·자동차 부분에 그 뒤 삼성이 뛰어들어 불편한 관계가 이어졌을 뿐이다.
그러한 이씨 가문과 정씨 가문에 새로운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일이 벌어졌다. 최근 현대산업개발 정몽규 회장과 호텔신라 이부진 사장이 합작법인 ‘HDC신라면세점’을 공식 출범한다고 발표, 재계를 놀라게 했다. 정몽규 회장은 정주영 회장의 동생인 정세영 회장의 아들이고, 이부진 사장은 이병철 회장의 손녀이다.이 두 사람이 손잡고 시작하는 면세점은 그 규모나 사업 계획 등이 타 기업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