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반드시 성경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은 일반계시로 알 수 있지만 특별계시인
그리스도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성경적인 신앙이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성경을 읽지만 나중에는 성경이 나를 읽습니다.
그 속에 내가 발견이 되어 성경이 나의 보증 문서가 되어 가는 겁니다.
성경은 명령적인 신앙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그리고 명령동사에는 그렇게 되는 방법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상의 제물을 일체먹지 말라’ 이렇게 단적으로 명령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시장에서 파는 식물은 묻지 말고 먹어라 이런 식입니다.
만약 명령적인 신앙이라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못을 박으면 상당히 곤란합니다.
산업사회에서 얼마나 불합리한 일입니까? 예컨대 포항종합제철의 용광로는
불을 다시 붙여 정상가동이 되려면 7일 동안 열을 가해야 한답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래도 지켜라 하시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명령적인 신앙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신앙을 요구합니다.
능동사랑, 능동적인 행함입니다. 인격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유기적인 자율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경우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고 어떤 경우는 먹으면 안 됩니다.
신앙에 있어서 문제는 자율이 제대로 안 됨으로 율법적이고 교조적인
명령 일변도로 끌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발달하기 전에는
독재자가 국민들을 끌고 가는 것이 오히려 일사분란하고 효과적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조직과 제도와 지도자의 절대적인 카리스마가
사람들에게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공헌을 한 것처럼 보이나 여전히
고린도교회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를 양산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현 주소입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명령 일변도의 신조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 개념과 십일조 개념은 극히 교조적입니다.
그러나 안식일 날 소나 나귀가 구덩이에 빠지면 안 건질 수가 있는가?
건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신앙의 맹점입니다. 명분만 앞세우고
실제는 아무것도 안 되는 자신을 발견하므로 외식이 됩니다.
명목적인 신앙일 뿐 실제적인 신앙이 되지 않아 삶이 되지 않는 겁니다.
무슬림의 라마단의 금식 기간에 그들을 지켜보면 낮엔 억지로
굶다가 밤 만 되면 거창하게 차려 놓고 새벽까지 먹어댑니다.
그 모습을 보면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3단계의 신앙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죄 사함만 받고 있는 사람과
마지막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제(섞임)를 통해 그 분의 형상과
모양을 이루어 가는 수준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옵니다(요1:17)
새 언약의 시대는 구약과 같이 율법적이며 교조적이며 기계적인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로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인격적이고 자율적인 신앙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능동적인 행함입니다.
그래서 헬라어의 태에 피동 중간 능동태가 있는 겁니다. 피동이 되었다가
그 안에서 주님의 내주 역사로 충만해 지면 바깥으로 능동적으로 나타납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고라 일당을 단번에 땅속에 묻어 버리고 아나니아 삽비라를
즉결처단을 했지만 지금 은혜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즉결처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가만히 두십니다. 선택과 유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과 다른 한 쪽은 심판이 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간섭을 하셔서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사람과 할 수 없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으로 구분이 됩니다. 내버려 두는 것이 바로 현재 심판입니다.
마지막 때는 어떤 직분이나 권위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각자의 신앙이 얼마나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영원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패러다임의 전환기이기에 지금 많은 지도자들이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경의 지식보다 한 구절만 가지고도 넉넉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를 모르고 계시록을 모른다고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계시록이 새 언약이라고 우기며 모르면 탈락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드는
사람들의 말은 귓전으로 흘러버려야 합니다. 강아지 풀 뜯는 소리 정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이 되었고 어떠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 그 스토리텔링 곧 서사를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로 와야 구원이 있고 안 오면 곤란하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사실을 모르고 말하는 망발입니다.
고전8:1절의 문제는 지식이냐 사랑이냐 하는 겁니다. 지식은 주관적이며
사랑은 의롭고 거룩하고 가치 있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말씀하는 건데 집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지식으로 남에게 크게 어필은 할 수 있지만 그 양이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샘처럼 솟아나는 생명이이기에 한계가 없습니다. 무한대입니다.
고전8장의 주제는 우상의 제물의 문제인 것 같으나
사실은 자유와 지식을 사랑으로 활용하라는 말씀인 겁니다.
우상의 제물은 먹으라고 해서도 안 되고 먹지 말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쉽게 말하면 네가 알아서 해라입니다. 십일조 주일 성수가 다 같은 내용입니다.
만약 신조적인 생활에 얽매인 사람이라면 나중에 천국에 가서 누가 시키면
쓰레기통도 비우고 화장실 청소도 잘 하겠지요? 다행히 천국은 이런 것들이 없지만...
마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 중에 염소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와 지식입니다.
이것들은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말씀을 듣고 좋다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멀었습니다. 자신이 궁금해 하는 부분이
해결되었다는 뜻일 뿐 자신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16장의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일차적으로 자신 안에
일대혼란이 일어나야 합니다. 뒤죽박죽이 되고 거짓과 탐욕과 추잡스러움이
고스란히 다 드러나야 합니다. 요조숙녀와 공주처럼 신앙생활하면 평생 고치지 못합니다.
2절 진정 자신이 좀 안다고 하는 사람은 모르는 것을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지식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양이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3절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사랑은 두 인격이 한 몸을 이룹니다. 사랑은 서로 영접하고 주고받습니다.
서서히 섞입니다. 사랑은 결코 상대를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랑의 탑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집을 세우는 의미의 덕입니다.
사랑이 있는 것 같으나 없는 교회가 있고, 사랑이 없는 것 같으나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냐 의무냐? 사랑은 잘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의 분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일에 대한 고통이 따를 뿐입니다. 누가 나를 향해 욕을 한다고 볼 때에 그것
때문에 약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고 있는 그 사람 때문에
고통이 내게 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두고 지식이냐 사랑이냐 하는 문제를 대두하는 목적은
그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 없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먹음으로 남에게 덕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12절 양심이 약한 자에게 죄를 짓는 것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요나 같은 경우를 보면 요나는 니느웨 성을 외면했습니다. 니느웨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몹시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런 행동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기 구원만을 위한 것인가 내가 하나님의 관심에 관심을
두고 있는 신앙인가 항상 살펴봐야 합니다. 사람의 행함을 지켜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입과 손과 발 그리고 소유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누가 말리겠는가마는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섭섭하게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행3장의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같은
이에게 은전이나 금전 몇 닢을 던지려고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선교사로 교회를 방문할 때에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인간은 호구지책보다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 시급하게 필요기 때문에
교회가 말씀과 기도로 사람을 구원하는 일보다 밥이나 퍼 주고 구제하므로
세상에 본 떼가 나는 일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는가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신앙의 원칙과 원리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원래 겸손이라는 단어는 사실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교만하므로
성경이 겸손하라고 말씀을 할 뿐입니다. 천국에는 교만한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안 사람은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더러 교만해 질까 싶다고 하기에 교만할 때까지만 살아보라고 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긍휼을 배척하는 행위인데 그 긍휼을 아는 사람이 교만할 수 없습니다.
십계명을 뒤집어 보면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 말씀은 하나님만
섬기라가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살아라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찬양이나 섬김을 받는다고 만족하실 분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까지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따라서 성경공부가 계급장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수학여행을 보낸 다음 무얼 보고 왔냐고 물어보면 선생님의
빨간 모자와 깃발만 따라 다녔다고 하는 것처럼 성경공부를 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이 진리 안에서 자유하면서 사랑하므로 자연과 동화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서 금방이라도 팽개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바울에게 있지만
그러나 자세하게 다시 설명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사랑이며 긍휼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관심의 척도 이것이 그의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