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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1대 진성여왕(재위 887 ~897) & '상대등' 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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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1대 왕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연대 : 887 ~897)
신라 3 여왕 중 마지막 여왕.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만(曼).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에 봉해진 김계명(金啓明),
할머니 광화부인(光和夫人)으로
광의왕태후(光義王太后)로 봉해졌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장녀로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해진
영화부인(寧花夫人)이고 김씨이다.
형제는 정(晸:헌강왕)·
황(晃:정강왕)·윤(胤) .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皇龍寺)에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
887년(진성여왕 2) 2월에 숙부 상대등(上大等) 위홍(魏弘)이 죽자
신라의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며 정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진성여왕은 미소년들을 모아다 데리고 놀았다.)
(당시 신라왕실 제도 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가 왕이 되면, 후궁들을 거느리는 것이 당연.)
(여왕이 미소년 후궁을 여럿 두는게 불법일까?)
만약, 진성여왕이 미소년들을 거느린 것이 잘못이라면
전대(前代)의 선덕여왕도 당연히 욕을 먹어야 할 것이다.
필사본 화랑세기를 더듬어 보면, 선덕여왕의 남편들에 대해
삼서지제(三壻之制: 서방 3명 둘 수 있는 제도)를 알 수 있다.
제(制)자를 쓴걸 보면, 이게 신라시대 하나의 제도로 볼 수 있다.
즉, 여왕이 서방 셋까지 거느린 것은 합법적이다.
(상대등(上大等)은 신라의 중앙 관제에서 최고위 관직.)
(법흥왕 18년(531년)에 설치, 귀족 화백회의를 주제하고)
(의결 사항을 왕에게 재가(裁可)를 얻어 실행하게 하였다.)
(실제로 왕권에 대한 제약적 성격을 갖고 있는 직책으로)
(행정적 기능보다 귀족회의를 주재하고 귀족세력을 대변.)
('신라 17 관등 중 1등급 벼슬' 각간(角干)이 상대등(上大等).)
(법흥왕18년(531년)에 설치된.,상대등 제도.)
(9회의 장소 : 신라 사영지(四靈地)나 남당(南堂)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의결되지 않는다는 화백제도.)
(신라 중기 이후에는 화백회의 세력을 압도한 왕권.)
(신라 하대 왕권이 약화되자 상대등 권력이 강해졌다.)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를 무렵, 왕권을 넘어선.,상대등.)
제51대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
'여왕의 유모' 부호부인과 남편 위홍 등
3~4명 총신들이 사실 상 정사를 주관한듯.
황룡사 9층 목탑을 중건하는 과정을 기록한 《황룡사 찰주본기》
위홍은 “신라 48대 경문왕의 친동생)이며 진성여왕의 작은 아버지.
신라왕실은 왕과 왕의 형제와 결혼을 해야 성골을 유지한.,골품제도.
황룡사 9층 목탑을 중건하는 과정을 기록한 《황룡사 찰주본기》
위홍은 “신라 48대 경문왕의 친동생)이며 진성여왕의 작은 아버지.
신라여왕은 제도 상으로 신하 중에서 3명까지 남편을 둘 수 있었다.
887년(진성여왕 2) 2월에 위홍이 죽자
그 공백으로 신라 정국은.,국정 혼란기.
이와 함께 대야주(大耶州)에 은거하던
왕거인(王巨人)이 여왕에 대한 비판을 하자
888년 주·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았다.
(왕거인이 옥에 갇힌 이후부터)
(3년간 한재가 들고 5월에 서리.)
국고가 비자 관리를 각지에 보내 세금을 독촉,
이를 계기로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고
백성들은 신라 왕실에 대한 원성이 점점 높아갔다.
이때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현재 상주)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토벌 못하자 이어 적당(賊黨)의 난이 일어났다.
891년 북원(北原: 현재 원주)의 적수 양길(梁吉)이 부하인
궁예(弓裔)를 시켜 동쪽으로 명주(溟州:현재 강릉)까지 함락
궁예
그 다음해에는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에서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건국하니 무주(武州: 현재 光州)동남쪽이 모두 항복.
궁예 견훤
895년에는 영주를 손에 넣은 궁예가
다시 저족(猪足)·생천(生川)을 거쳐
한주(漢州)·철원(鐵圓)까지 차지했다.
그리하여 신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赤袴賊)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해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다.
이 무렵 당 유학후 돌아온 최치원(崔致遠)
894년에 시무10조(時務十條)를 제시하였다.
...........최치원의 시무 10조............
1. 새 궁궐로 옮길 것.
2. 관리의 수를 줄이고 녹봉을 적당히 할 것.
3.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빼앗은 토지는 돌려줄 것
4. 선량한 관리를 임명하고 세금을 적당히 할 것.
5. 공물 진상을 금하고 안찰사의 임무를 명확히 할 것.
6. 승려의 왕궁 출입과 고리대업을 금할 것
7. 탐관오리를 징벌하되 잘한자는 상을 줄 것.
8. 관리의 사치를 금할 것.
9. 비보 사찰 이외에는 모두 없애고 함부로 절을 세우는 것을 금할 것.
10. 신하의 간언을 용납하고 바른말 하는 관리를 등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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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 유교적 정치이념 강조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 귀족의 이익과는 배치.
이 개혁이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지 못함으로써
신라 붕괴는 막을 수 없었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897년 6월 조카인 헌강왕의 아들
요(嶢:뒤의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
한편, 진성여왕 때 거타지(居陀知) 설화가 알려졌는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이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비슷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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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과 비로자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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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근본 비로자나불은 청정 법신이라 불리며,
천백억화신 석가모니와 더불어 삼신불이라고 한다.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
빈손으로 태어났다가 죽을 때도 빈손으로 가는 것
대자연 속에서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가는 삶.
생전에 자연에게 신세진 것을 보답하는 마음이 보시.
비로자니불은 광명을 의미
햇빛은 모든 곳을 비추지만
그늘에는 미치지 못하는 햇빛
'비로자나불'은 법신불을 뜻하고
비로전은 비로자니불을 모신 법당.
비로봉은 그 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통일신라 때 산 정상을 일컫는 고유명사.
금강산 비로(毘盧)봉은.. 밝을 비. 밥그릇 로
치악산 비로(飛蘆)봉은..날 비(飛), 갈대 로(蘆)
묘향산 毘盧봉. 오대산 비로봉. 소백산 비로봉
'비로'는 불교에서 '높다'라는 뜻으로서 쓰인다.
'비로자니'는 모든 곳에 두루 비치는 부처 몸 빛.
비로자니불은 문수보살의 상징.
선덕여왕때 자장법사가 최초 유입
그후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 결사대를 이끌어 낸 진덕여왕
650년 당나라 황제에게 태평송을 바쳐 나당연합군을 결성
충신 김춘추, 김유신과 함께 신라의 혼란기를 극복해 낸 여왕.
같은 해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고
김춘추 둘째아들 인문을 당나라에 파견하고
김유신을 중용 삼국통일 기틀을 다지기도 했다.
신라 27 대 선덕여왕
신라 28대 진덕여왕
신라 51대 진성여왕
진성여왕
신라의 3 여왕 중에서 마지막 여왕인.,진성여왕
진성여왕은, 사랑에 깊이 빠져 왕위까지 버린 여왕.
그 애틋한 사랑의 비밀을 간직한., 해인사 비로자나불
가야산 칠불봉 해인사 법보전 불상, 비로자나불
개금(금칠)하려다 발견된 그 복장(불상뱃속) 기록
그 기록에 의해 찾아낸, 해인사 쌍둥이 비로자나불
진성여왕과 각간 위홍 두 연인간 사랑의 징표.
죽고 없는 연인을 위해 왕위를 버렸던 진성여왕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 연인으로 기억되는 두 사람.
여왕이 즉위 2년 위홍이 죽자
위홍을 혜성대왕으로 추존(追尊)
가야산 해인사.
가야산 해인사에 그 원당(願堂)을 짓고
재위 9년 하야, 북궁(北宮)으로 들어 가
그곳에서 죽어 황산(黃山)에 묻혔다 한다.
경주 남산 제1 봉.,황산.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여왕을 평하기를
도처에서 반란이 잇달아 나라가 기우는데
불륜에 빠진 무능하고 연약한 왕으로 기록
그 비로자나불을 모신 해인사 보경당.
해인사 보경당
조선 성종 때 해인사를 중창하며
서까래에서 문서 뭉치가 나왔는데
이를 보고 조위(曺偉)가 남긴 기록.
해인사를 북궁(北宮)이라 했고
왕위를 버리고 해인사에 든 여왕
운명 후 위홍과 합장을 원했기 때문
사랑하는 님은 이미 저승으로 떠나고
왕위에서 물러나 해인사로 향하던 여왕.
천갈래 만갈래 가슴 찢어질듯 아팠을 사랑.
원화 출신 진성여왕은 재위시 화랑들과 도락.
궁 침소로 화랑 미소년들을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위홍의 빈자리를 메꿀 수 없었던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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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법보전 불상(비로자나불) 뱃속 기록
한 정승 연인의 성불을 기원하면서 만든 불상.
기록 속 쌍동이 불상 반쪽을 찾아낸 곳도 해인사.
심지어 콧방울까지 똑같은 쌍둥이 비로자나불
해인사 쌍둥이 비로자나불
성불해서라도 사랑을 이으려던 신라시대 로맨스
진성여왕과 각간(角干) 위홍(魏弘)이 그 주인공인듯.
죽고 없는 연인을 위해 왕위를 버렸던, 신라 진성여왕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 두 사람의 사랑
'유모의 남편인' 각간 위홍을 사랑했던 그녀.
그녀는 위홍이 사는 소량리를 늘 드나들었고
위홍도 여왕이 된 그녀의 규방까지 드나들었다.
그녀가 여왕으로 즉위한지 2년 만에 죽은 위홍.
그녀는 죽은 연인 위홍을 대왕으로 추존(追尊)
해인사에 그의 원당을 짓고 9년만에 왕위를 하야.
북궁(北宮)에 들어가 그곳에서 죽어
황산(黃山)에 묻혔다는 삼국사기 기록.
여왕은 위홍이 죽은 후 미소년들을 궁에 끌어들여
그 허전함을 달래려 했지만 허전함을 채울 길 없어
위홍과 같이 묻히려 왕관을 벗었을 만큼 짙은 사랑.
조선 성종 때 해인사를 중창하며 서까래에서 나온 문서들
이를 읽고 조위(曺偉)가 남긴 기록에 의해 전해오는 로멘스.
경주 해인사
신라 말 해인사를 북궁 해인수(北宮海印?)라 했고
진성여왕이 왕위를 버리고 해인사에 든 것은 죽어서
위홍과 같이 묻히고자 원했기 때문이라는 기록 내용.
쌍둥이 불상을 만든 시기는 882년 위홍이 죽기 전
진덕여왕이 즉위하기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너와 나는 하나' 불교 교리 & 한 쌍의 비로자니불.
............김위홍(?~888 : 진성여왕2)............
경주김씨 金魏弘은 상대등·각간·병부령 관직에
있으면서 정치와 군사의 대권을 쥐고 흔들었다.
왕명을 받고 대구화상과 함께 신라의 향가를 모아
〈삼대목 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만들기도 했다.
희강왕의 손자이며, 신무왕의 외손자, 경문왕의 동생.
부 의공대왕(義恭大王)으로 추봉된 아찬 계명, 모 광화부인.
872년(경문왕 2) 上宰相으로 황룡사9층탑을 재건하는 총책임.
조카인 헌강왕 때 상대등으로, 진성여왕 때도 정권을 독차지했다.
진성여왕과 관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왕력(王曆)과
기이(紀異)의 진성여대왕 거타지조(眞成女大王居陀知條),
〈삼국사기〉 등에 나와 있다. 책에 따라 다르게 적혀 있다.
여러 사실을 종합해보면,
위홍은 진성여왕의 유모인
부호부인(鳧好夫人)의 남편.
일찍부터 진성여왕과 좋아하다가 부인이
죽은 다음에 진성여왕과 지내게 된 듯하다.
진성여왕은 위홍이 죽자 매우 슬퍼하며
그에게 혜성대왕(蕙成大王) 시호를 주고,
897년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 북궁(北宮)에
원당(願堂)을 짓고 위홍의 명복을 빌다가 죽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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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詩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별을 실컷 안고
부엉이가 우는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