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은 요녕성 무순시에 위치한 고이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순시 주변에는 철과 석탄이 풍부하여 고구려 시대에도 이를 이용했다. 고이산성은 매우 특수한 구조로 되어 있다. 70~140m 내외의 여러 야산을 하나로 묶은 성으로 동성과 서성, 남성 등 세 개의 성이 자리하고 있고, 산줄기를 따라 남쪽에 길게 성벽을 쌓고, 북쪽으로도 조금 더 성을 쌓았다. 이를 남위성, 북위성 이라고도 한다. 동성은 고이산성의 주된 부분을 차지하는 곳으로 길이는 약 2,800m가 되며, 전체 성은 약 4km가 된다. 동, 서, 남, 북에 각각 성문이 있다. (撫順市文化局文物工作隊, 「遼寧撫順高爾山城發掘間報」, 『文物』1964-12, p1011 참조)
신성이 복잡한 구조로 된 것은 여러 세대를 걸쳐 성을 더 쌓았기 때문이다. 성은 이중 삼중으로 둘러싸여 있어 적을 방어하는 데는 매우 유리하다. 또 성내에는 평평한 분지가 있어 지금도 성내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또 성내에는 물이 넉넉한 편으로, 남성에 있는 커다란 연못은 현재 수영장을 비롯한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같은 성의 입지 조건은 많은 병사들이 주둔하고 장기간 성을 방어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성의 남쪽에는 혼하, 동쪽에는 그 지류인 무서하가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은 성의 남쪽과 북쪽에 큰 도로와 철길이 지나고 있다. 과거에도 이곳은 교통로의 중심이었다. 요서 지방에서 쳐들어오는 적군은 요하 중류를 건너 신민시와 심양시를 지나 이곳을 거쳐서 곧장 환인을 지나 집안시로 갈 수가 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이곳을 지나면 곧장 서북쪽에 넓은 동북평원지대로 나갈 수 있다.
667년 고구려를 공격한 당나라 장군 이세적은 이렇게 평가했다.
'신성은 고구려 서쪽 경계의 방어성으로서 가장 요충지다. 만약 이 성을 먼저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나머지 성도 쉽게 함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평가처럼 신성은 고구려 서부 방어의 최고 요충지의 하나였다. 신성은 339년 모용선비, 399년 후연의 모용희, 613년 수나라 등 여러 외적의 침략을 막은 고구려의 방패였고, 645년 전쟁의 승리를 거둔 곳이고, 667년 당나라가 전력을 다해 마침내 함락시킨 곳이었다.
유성에서 신성에 이르는 신성로는 당나라의 주된 공격루트였고, 고구려도 이 길을 따라 당나라 유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신성이 있던 무순, 심양은 청나라 때에도 크게 활용되었는데, 심양에 후금의 수도가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것이며, 이후 만주의 중심이 되었다.
신성을 중심으로 동남으로 비사성에 이르는 루트는 천리장성 루트이며, 신성에서 남쪽으로는 단동에 이르는 길,
신성에서 동쪽으로 길림성쪽으로 가는 길,
신성에서 동북으로 부여, 장춘으로 가는 길,
신성에서 서쪽으로 가서 조양및 남서쪽에 금주로 이르는 길 등에는 지금도 철로와 고속도로 등이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신성이 만주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이유인 셈이다.
2.등주에서 요동반도로 갔다. 육상로가 폐쇄되었다.
그렇지요. 이정기와 후희일이 영주에서 등주로 옮겨갈 때 사실상 요서지역은 완전히 고립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발해와 당과의 육로는 거의 폐쇄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무렵 안동도호부는 완전히 사라져버립니다.
3. 후고구려의 존재와 위치
후고구려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개 요동반도 남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후고구려는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발해에게 흡수된 것으로 봅니다. 후고구려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후고구려가 당에 사신을 보낸 몇개의 기록만으로 후고구려를 논하다 보니 억측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 부분은 별도의 논문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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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인터넷①』
(≫≪)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