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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4일 [대림 제4주일]
루카 1,26-38
자기를 긍정하려면 성당 다녀도 소용없는 이유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거의 이단이라는 식의 카톡을 보내오는 분이 계십니다.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애 커플에게 축복해 주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황님이 동성애나 동성결혼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집이나 차, 심지어 짐승이 사는 축사도 축복해 주는데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에게
축복을 거절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해있으면서도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교회에 나오는 예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축복받지 못합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보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했다면
하느님 축복을 온전히 받으실 수 있으셨을까요?
즈카르야처럼 벙어리가 되든지, 부분적으로나 혹은 아예 축복받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축복받으려면 축복해 주는 이부터 긍정해야 합니다. 교회를 긍정하지 않고 교회보다 자신이 옳다고 말하는 이가 어떻게 성체와 고해성사의 은혜를 완전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KBS Joy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아프다며 돈 요구하는 집 나간 엄마, 도와드리는 게 맞을까요?’
라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버리고 계속 돈을 요구하며 심지어 자살을 암시하는 말까지 하는 엄마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장훈 씨는 “평생 아무것도 해준 게 없으면서 고작 스무 살짜리 딸한테 겨우 석 달 생활했다고
천만 원을 내놓으라는 엄마가 사람이냐?”라며 크게 격분합니다.
이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고 “이거 보통 일이 아니야, 너도 네 삶을 찾아.”라고 충고합니다.
사연자는 잘 받아들이고 기분이 좋아져서 떠났습니다.
위 청년 여자아이와는 다르게 욕만 먹고 간 예도 있습니다.
사연자는 14년 동안 서울 올라와서 한 달에 약 천만 원씩 열심히 일한 청년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속초 고향에 내려가야 할지,
아니면 돈을 서울에서 더 벌어야 할지가 고민입니다.
이 사람은 보살들이 하는 말을 다 튕겨냅니다. 사실은 어머니가 매우 아프신 것도 아니고 어머니 곁에 형도 있으며 자신이 자주 내려오는 것을 귀찮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온 것일까요? 자기가 이런 처지라는 것을 이해해 달라는 것밖에 안 됩니다.
어머니가 집이 세 채 있고 땅도 있는데 어머니를 설득하여 자기를 좀 도와주게 해 달라고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서장훈과 이수근은 “그렇게 답을 잘 알면서 여길 왜 왔어. 네가 알아서 해!”라고 소리 지릅니다.
은총의 중개자 앞에서 자기가 옳음을 증명하려 한다면 상대를 은총을 주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총을 받을 수 없고 그러면 기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마태 16,24; 루카 9,23 참조).
그런데 여기서 “자기를 버리고”라는 번역은 실상 “자기를 부인하고”로 바꾸어야 합니다.
‘부인한다’(to deny)라는 말은 ‘자기가 옳지 않음을 인정하다’라는 말입니다.
내가 옳지 않음을 인정하려면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긍정해야 합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 앞에서 당신은 종에 불과하니 그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라고
고백하는 ‘피앗’, 혹은 ‘아멘’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서 파견하신 천사를 긍정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성체 앞에서 하는 “아멘!”은 사제를 통해 은총이 주어짐을 긍정하는 고백입니다.
어차피 은총은 순종과 함께 받아들여야 하기에 자기를 뱀과 같은 존재로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려는 사람은 주님께서 파견하신 이를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체를 영해도 소용없습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긍정하고 받아들였을 때 그 태중의 아드님 또한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나 주교, 사제들을 부정하면서 교회를 통해 주어지는 은총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것이란 착각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파우스티나 성녀는 어떤 영혼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부탁받았습니다.
그녀는 기도는 물론이요, 고행까지 하였습니다.
고해성사 때 이것을 사제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사제는 고행 대신 강생의 신비를 잠시 묵상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녀는 사제의 말에 순종하여 고행용 쇠사슬을 풀었습니다.
그러나 ‘희생 같지도 않은 것으로 한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묵상하려고 성당에 앉았을 때 예수님께서 이미 은총을 주었고 이는 고행 때문이 아니라 순종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주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24일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
2사무엘기 7,1-5.8ㄷ-12.14ㄱ.16
루카 1,67-79
성탄은 오늘 우리 한 가운데,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프고 고통스런 현실 안에서 시작됩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시련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우리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은 다가왔습니다.
힘겹게 견뎌내고 있는 전 세계 살레시오 가족들과 교우들을 위해 저희 살레시오회 앙헬 페르난데스 총장님께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나는 희망이 되게 하는 믿음에 매료되었습니다.”
베트남 공산화 즉시 13년간 감금되셨고, 9년간 독방에서 생활하셨던 베트남의 가경자 구엔 반 투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928~2002)의 말씀입니다.
추기경님의 간략한 말씀 안에는 힘겨운 한 해를 잘 견뎌낸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2020년을
마무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이 들어있습니다.
올 한해 우리는 엄청난 고통과 상실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정적,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계속될지 기약도 없습니다.
이토록 어려운 시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기 예수님의 성탄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난감하고 곤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성탄의 의미는 오늘 이 시대에 맞춰 계속 재해석되어야 하고
성찰되어야 합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로 오시는 은혜로운 대 사건입니다.
오늘 이 순간도 하느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사람이 되시고, 특별히 오늘 성탄절 날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십니다.
오늘의 어둠이 아무리 짙다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 백성과 동행하시며 아픔과 상실, 고통의 순간에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 곧 아기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때로 고통은 우리를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더 진지한 신앙 여정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이토록 혹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잊지 알아야겠습니다.
새해에는 모든 피조물을 훨씬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고통 속에 있는 수많은 청소년들의 외침, 6천8백만명의 난민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기억해야하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해야겠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가 각별히 주의해야 할 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성탄절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들입니까? 성탄절의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마음에 드는 성탄 선물, 잘 차려진 성탄 파티, 달콤하고 로맨틱한 성탄 구유와 전례 등등...
성탄과 관련된 아름다운 추억들입니다.
그러나 2천년전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베들레헴의 마굿간에는 달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분위기는 비참하고 서글펐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사회적 상황 역시 암울했습니다.
하느님의 이 세상 육화강생은 태평성대 때가 아니라, 가장 암울하고 어려운 시대, 로마 식민 통치 시대,
가장 불안한 헤로데 왕정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던 최초의 모습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황제처럼 강력한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지혜로 똘똘 뭉친 현자의 모습으로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탁월한 능력을 지닌 해결사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힘으로는 머리 조차 옆으로 돌릴 수 없는 갓난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 인류 구원의 역사는 바로 오늘 우리 한 가운데,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프고 고통스런 현실 안에서
시작됩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 역시 이 어려운 시대,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각자 안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4주일 강론>
(2023. 12. 24.)(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26-33)”
천사가 찾아와서 메시아 강생을 예고한 일은,
성모님 혼자만의 체험입니다.
다른 목격자도 없고, 증인도 없습니다.
그 일이 복음서에 기록된 것은 성모님께서 사도들에게 그 일을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떠나간 뒤에 성모님께서는 천사가 찾아와서 전해 준 말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장 먼저 요셉 성인에게 알리셨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엘리사벳에게, 그리고 나중에 사도들에게도 증언하셨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 증언을 복음서 저자들과 신자들에게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 상황에서 사도들이 예수님에 관해서 들은 ‘첫 증언’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요한 1,36).
사도들 입장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먼저 들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 성모님으로부터 그 증언이 옳은 것이었음을 확인해 주시는 증언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의 시간적인 순서를 생각하면, 또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성모님의 증언이 먼저이고,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나중의 일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메시아 강생 소식’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알리신 ‘첫 선포자’이며 ‘첫 증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는데, 요셉 성인과 엘리사벳과 사도들과 당시의 신자들은
성모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평소의 성모님의 삶과 신앙생활과 인품 때문일 것입니다.
‘빈말’은 전혀 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신앙과 생활이 완전히 하나이신 분이기 때문에, 평소의 삶이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지만, 사람들은 성모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믿을 수 있는 분이니까 믿을 수 있었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점도 중요하고,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순종하셨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첫 선포자’이며 ‘첫 증인’이신 성모님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는 점이 무척 중요합니다.
요즘에도 가끔 일어나는 일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경우에, 그 주장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면 우선 먼저 그 사람의 평소의 신앙생활부터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언제나 항상 ‘증언보다 삶이 먼저’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나는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 덕분에 내 인생이 완전히 변화되었다. 나는 구원받았다.” 라고 증언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증언과 삶이 일치되어 있어야 하고, ‘말’로 증언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증언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복음 말씀의 본문에서 ‘여섯째 달에’ 라는 말은,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를 찾아간 뒤에 다섯 달이 지나고 여섯째 달의 어느 날에” 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탄생 사이에는
여섯 달의 간격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 시간표대로 일을 진행하셨을 텐데, 우리 입장에서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약혼할 때까지 하느님께서 기다려 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요셉 성인과 성모님을 함께 선택하셨고, 함께 부르셨음을 나타냅니다.
왜 요셉과 마리아인가?
‘한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이긴 한데, 우리 입장에서는, “요셉 성인과 성모님이 신앙과 성덕에서 ‘가장 뛰어난 분들’이었기 때문에”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라는 말은, “그분은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되시고’ 라는 말과 ‘불리실 것이다.’ 라는 말 때문에, 태어날 아기가 나중에 메시아가 되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원래 메시아이신 분이고 원래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잉태되시고 태어나셨습니다.
<교리대로 표현하면, “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속으로(‘나’에게로) 오신 날”입니다.>
‘다윗의 왕좌’는 메시아 왕국의 통치권을 뜻하고, ‘야곱 집안’은 ‘하느님의 새 백성’을 뜻하고, ‘그분의 나라’는 ‘메시아 왕국, 하느님 나라’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했던, 또는 기다렸던 이스라엘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입니다.
<‘바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