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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4~226) 중앙SUNDAY <224>마오 “혁명이 별거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제225호| 2011년 7월 3일
▲리다(李達)는 1921년 7월 23일부터 열린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의 소집인이었다. 3년 후 탈당했지만 마오쩌둥과는 교감이 깊었다. 신중국 선포 후 재입당, 우한(武漢)대학과 후난(湖南)대학 총장을 역임했다.1958년 4월 우한에 체류 중인 마오를 방문한 리다(가운데). 오른쪽 첫째는 당시의 후베이(湖北)성 주석 왕런중(王任重) [김명호 제공]
1939년 봄, 제3전구사령관 “펑위샹(馮玉祥)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리다(李達)를 초청했다”는 소문이 도처에 난무했다. 옌안(延安)에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은 11년 전 광저우(廣州)에서 헤어진 리다가 그리웠다. 전시수도 충칭(重慶)에 상주하던 중공 남방국(南方局) 서기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서신을 보냈다.
저우언라이는 리다의 의중을 알 필요가 있었다. 역사학자 뤼전위(呂振羽)를 파견했다. 뤼는 대학시절 리다의 제자였다.
스승을 만난 뤼전위는 세상에 엉터리 소문이 얼마나 많은지를 실감했다. 리다는 펑위샹의 초청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옌안에 갈 의향이 있는지를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밥 한 그릇이면 족하다. 그쪽은 먹고살 만하냐?”
뤼전위는 남방국 조직부장 보구(博古)에게 리다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저우언라이가 병 치료차 모스크바로 출발한 직후였다.
보구는 “옌안에 가면 혁명에 투신하는 것이 당연하다. 무슨 놈에 먹는 타령이냐”며 리다가 옌안에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리다는 중공 측에서 아무 연락이 없자 구이린(桂林)으로 거처를 옮겼다.
소련에서 돌아와 뤼전위의 보고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짜증이 났다. 버럭같이 화를 내며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그게 무조건 오겠다는 말이지 뭐냐.”
마오쩌둥의 반응도 비슷했다. 애석해하며 무릎을 쳤다. “맞는 말이다. 역시 리다다. 혁명이 별거냐, 다들 먹고살려고 하는 짓이지….” 속으론 무슨 욕을 했는지 몰라도 한때 중공의 지도자였던 보구에 대한 비난은 자제했다. 서가에 꽂혀 있는 변증법 유물론 교정(辨證法唯物論敎程)과 경제학대강(經濟學大綱), 사회학대강(社會學大綱)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모두 리다의 저서였다. 사회학대강은 열 번을 읽었지만 볼 때마다 내용이 새로웠다.
리다는 이 대학 저 대학 떠돌아다니며 유물주의 철학을 강의했다. 고독은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1948년 봄, 중공 화남국(華南局)에서 보냈다는 사람이 편지 한 통을 들고 왔다. 발신인과 수신자의 이름도 없었다.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 있을 때였다.
편지를 펼쳐본 리다는 한눈에 마오쩌둥의 글씨를 알아봤다. 남들이 보면 무슨 말인지 모를 암호투성이 같았다. “형님은 우리 회사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다. 사업이 날로 번창 중이다. 속히 와서 경영에 참여하기를 학수고대한다.” 회사는 중국공산당을 의미했다.
리다는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이듬해 4월 19일 밤, 이불 보따리만 들고 창사를 떠났다. 공산당 지하조직의 보호를 받으며 베이핑(北平)에 도착하기까지 근 1개월이 걸렸다. 4일 후 마오쩌둥과 해후했다. 1921년 7월 말, 중국공산당 창당대회에서 처음 만난 지 28년 만이었다.
그날 밤 마오는 리다에게 “과부생활을 끝내라”며 복당을 권했다. 리다를 자신의 침대에 재우느라 새벽까지 책상에서 서류를 뒤적거렸다. 이튿날 저우언라이, 류샤오치(劉少奇) 등에게 “리다는 수절한 과부다. 공산당을 떠났지만 한결같이 우리를 지지했다”며 입당보증인을 자청했다.
<225>중국에 소련 공산당 지부 세워라” … 레닌, 마린에 지령 |제226호| 2011년 7월 10일
▲중국공산당 창당대회의 마지막 회의는 7월 31일 사진에 보이는 자싱(嘉興)의 유람지 난후(南湖)의 호화 놀잇배(畵舫)에서 열린 뒤 산회했다. 개막 회의는 1921년 7월 23일 밤, 상하이 프랑스 조계 베이러루(貝勒路)에 있는 동맹회(同盟會) 원로 리수청의 집에서 열렸다. [김명호 제공]
1919년 5·4 운동을 계기로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중국 하늘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2월 중순, 상인으로 변장한 베이징대학 문과대학장 천두슈(陳獨秀)와 도서관장 리다자오(李大釗)를 태운 마차가 베이징(北京)성 자오양(朝陽)문을 빠져나갔다. 당시 천두슈는 보석 중이었다.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샛길만 이용했다. 목적지 톈진(天津)까지 가는 동안 중국에 공산당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천두슈는 상하이(上海)로 떠나고, 리다자오는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6개월 후, 중국 공산당 최초의 조직인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小組)’가 발족했다. 이어서 외국어학사도 설립했다. 청년 류샤오치(劉少奇), 런비스(任弼時), 커칭스(柯慶施)를 비롯해 후일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뤄이농(羅亦農), 신중국 해군의 대부 사오징광(蕭勁光) 등이 몰려들었다.
10월이 되자 베이징에도 소조가 출범했다. 정식 명칭이 중국공산당 베이징지부였다는 사람도 있고 소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소조원들은 각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조직 설립을 권했다. 후난(湖南)·후베이(湖北)·산둥(山東)·광둥(廣東)이 뒤를 이었다. 일본 유학생 스춘통(施存統)과 저우푸하이(周佛海), 프랑스에 유학 중인 자오스옌(趙世炎·리펑의 외삼촌), 저우언라이(周恩來) 등도 현지에서 소조를 구성했다. 두 곳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명칭도 공산당, 맑스주의 연구회, 공산당 소조, 사회당 등 뒤죽박죽이었다.
◀창당대회 회의 참석자들을 자싱으로 안내한 리다의 부인 왕후이우(王會悟). 마오쩌둥으로부터 “중국에서 가장 겁 없는 여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1920년 8월, 레닌은 코민테른 집행위원 마린을 모스크바로 호출했다. 중국공산당이 정식으로 성립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지령을 내렸다. “중국에 소련공산당 지부를 설립해야 한다. 각지에 산재한 소조들을 통합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듬해 5월, 네덜란드 외교부는 중국 주재 공사에게 긴급전문을 보냈다. “네덜란드 출신 적색분자가 극동으로 향하는 선박에 탑승했다. 6월 초 상하이에 도착한다. 극히 위험한 인물이다. 중국 측에 통보해라.”
마린은 중국과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이 수없이 왕래한 모스크바, 시베리아횡단열차, 이르쿠츠크, 치타, 만주리, 하얼빈, 베이징, 상하이로 연결되는 ‘홍색 실크로드’와는 전혀 다른 경로를 택했다. 6월 3일, 수에즈 운하와 홍해, 인도양, 싱가포르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르쿠츠크 소재 코민테른 원동(遠東) 서기처가 파견한 니콜스키도 상하이에 모습을 나타냈다. 마린과 니콜스키는 상하이 소조 대리서기 리다(李達)와 리한준(李漢俊)을 접촉했다. “전국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며 전국대표자대회를 열고 당의 성립을 선포하자고 건의했다. “조직은 돈”이라며 돈뭉치도 건넸다.
리다는 각 성의 소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1차 중국공산당 대표자 대회를 상하이에서 개최한다. 2명씩 참석해라. 개막일은 7월 1일이다.” 마린은 “상하이 도착과 동시에 100원을 주고, 돌아갈 때 50원을 지급한다”는 말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우겼다.
7월 23일, 토요일 저녁 8시, 리수청(李書城), 리한준 형제의 집에 15명이 모였다. 리다자오는 학기말 성적을 내느라 베이징을 떠나지 못했고, 광둥성 교육청장으로 가있던 천두슈는 사람을 대신 보냈다. 참석자들의 평균 나이 28세, 아주 젊은 회의가 시작됐다. (계속)
<226>배신자 천궁보(陳公博), 공산당 창당일 밝히게 한 일등공신 |제227호| 2011년 7월 17일
▲천궁보는 중공 창당 1년 후 탈당, 컬럼비아대로 유학 갔다. 국민당에 입당, 쓰촨(四川)성 주임·실업부장을 지냈다. 일본의 난징(南京) 괴뢰정부에 합류, 한간(漢奸)으로 전락했다. 1946년 4월 12일 민족반역죄로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유언은 “공산당 조심하라”였다. [김명호 제공]
제1차 중국 공산당 대표자 대회는 극비리에 이뤄졌다. 발각됐다 하는 순간 어느 귀신에게 물려갈지 모를 아주 위험한 모임이었다. 참석자들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이때의 일을 일기에 남기지 않았다.
국공합작으로 항일전쟁이 시작되자 중공 근거지 옌안(延安)은 생기가 넘쳤다. 하루아침에 흉악한 비적소굴에서 항일성지로 둔갑했다. 언제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중국 공산당을 만들었는지 다들 궁금해 했다. “생일을 알아야 행사를 할 거 아니냐!” 지당한 말이었다.
1936년 7월, 마오쩌둥은 에드거 스노에게 창당 얘기를 꺼냈다. “1921년 5월, 공산당 성립대회에 출석하느라 상하이에 갔다. 12명이 참석했다.” 농촌 출신이었던 마오는 어릴 때부터 음력을 사용했다. 참석자 15명 중 2명의 외국인과 천두슈(陳獨秀)의 대리인 자격이었던 바오후이썽(包惠僧)을 대표로 치지 않았다.
이듬해 봄, 둥비우(董必武)는 과거를 얘기해 달라며 졸졸 따라다니는 스노의 부인에게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열린 1차 대회에 참석했다”고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둥비우와 함께 우한(武漢) 대표로 참석했던 천탄추(陳潭秋)가 1936년 중공 창당 15주년을 맞아 글을 한 편 썼다. “7월 말, 혹은 7월 하순, 상하이에서 창당했다”고 했을 뿐 날짜는 명기하지 않았다. 7월 15일 이후인 것은 분명했지만 기념일 제정에는 도움이 안 됐다.
옌안에 있던 사람 중 1차 대회 참석자는 마오와 둥비우 밖에 없었다. 16년 전 일을 기억에만 의존하자니 모든 게 가물가물했다. 인간은 숫자에 약한 동물, 대충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다. “7월은 분명한데 날짜는 기억이 안 나고, 아예 첫날을 창당 기념일로 해 버리자”며 말을 맞췄다.
마오와 둥비우는 창당 직후 발간된 신청년(新靑年) 9권 제3호에 광둥(廣東) 대표 천궁보(陳公博)의 글이 실렸던 사실을 몰랐다. “상하이에서 열린 학회에 다녀왔다. 신혼여행을 겸했다. 7월 14일 광저우(廣州)를 떠났다. 21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튿날 외국인 교수 두 사람을 만났다. 처음 만난 친구의 집에 갔다가 낯선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나는 미완의 상태에서 수속을 끝냈다….” 천궁보는 창당 대회를 학회로, 코민테른 대표 마린과 니콜스키를 두 명의 외국인 교수로 표현했다. 처음 만난 친구의 집은 회의가 열린 리한쥔(李漢俊)의 집이었다. 암호를 나열해 놓은 것 같은 글이었지만 중공 창당 날짜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였다.
회의장에 불청객이 찾아온 것도 사실이었다. 7월 30일 밤, 40대 남자가 집안으로 들어와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더니 “잘못 왔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마린은 밀정이라고 단정했다. 집주인만 남고 앞문으로 튀자며 몸을 일으켰다. 평소 리한쥔의 집은 뒷문만 열려 있었다. 리한쥔과 친했던 천궁보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참석자들이 회의장을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프랑스 경찰과 중국인 보조원들이 뒷문으로 들이닥쳤다. 수상한 흔적을 발견 못하자 한바탕 훈계를 늘어놓고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온 참석자들은 상하이 대표 리다(李達)의 집에 다시 모였다. 다음 날 자싱(嘉興)으로 이동, 마지막 회의를 하기로 결정했다.
천궁보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호텔로 돌아왔다. 머리만 복잡한 게 아니라 날씨도 개떡 같았다. 온종일 시꺼먼 구름이 도시를 짓눌렀지만 끝내 비 한 방울 뿌리지 않았다. 진땀을 흘리며 나타난 천궁보에게 부인이 불만을 쏟아냈다. “매일 밤 뭘 하고 쏘다니는지 불안해 죽겠다. 이게 무슨 놈에 신혼여행이냐.”
날이 샐 무렵 옆방에서 총소리가 났다. 이어서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살인사건이 분명했다. 날이 밝으면 증인이다 뭐다 하며 불려 다닐 일이 뻔했다. 정말 고약한 여름밤이었다. 할머니 유언이 생각났다. “중국은 별난 나라다. 낌새가 이상하면 우선 도망쳐라. 생각은 천천히 해도 된다. 36계가 진리라는 것을 일찍 깨우친 중국민족은 정말 위대하다.”
천궁보는 호텔 주인을 찾아갔다. 같은 광둥 사람이었다. 묵었던 흔적을 지워 달라고 부탁했다. 광둥 사람끼리는 서로 통하는 게 있었다.
8월 1일자 신문 한구석에 전날 새벽 천궁보의 옆방에서 벌어진 사건이 실렸다. 제1차 중국공산당 대표자 대회의 시작과 마지막 날(7월 23~31일)이 언제였는지 확인시켜 줄 결정적인 자료였다.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
첫댓글 중국은 민족반역자를 漢奸으로 지목하여 처단했는데, 우리는? 韓奸이라는 말도 없거니와 이들에 대한 淸算은커녕 후손들이 아직도 떵떵거리며 활개치고 있으니, 이게 결코 정상은 아니겠지.
게메 말일세~
떵떵거리며 시는 족속덜이 누게 누게인고......???
언론계, 정계, 재계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떠오르는 자들이 꽤 있을 걸. 그리고 '친일인명사전'을 대강 훓어봐도 쉽게 알 수 있을 테고. 왜 그들이 이 책의 발간을 기를 쓰고 막으려고 했는지, 그리고 왜 "역사 뒤집기" 시도에 열을 올리고 있는지 그 의도는 不問可知.
@澹愚齋 암튼...
청산을 제대로 못한 역사가 두고 두고 문제~
史官 역할을 하시는 분들이 역사적 심판이나마 잘 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