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따라 물 따라
임진년이 저문다. 흑룡의 해였다만 싸이가 춘 춤으로 온 세상이 말 떼들로 들썩거렸다. 용 꼬리를 잇는 계사년 뱀 머리가 내미는 섣달그믐이었다. 아침 이른 시각 창원중앙역으로 나갔다. 그 역을 이용하는 승객 대부분은 서울로 오르내리는 KTX승객들이다. 그런데 나는 서울도 대구도 아닌 밀양 삼랑진을 가려고 역전으로 갔다. 경전선과 경부선이 나누어지는 역이 삼랑진역이다.
하루 한 차례 순천 발 무궁화호 열차는 경전선을 따라오다 부산 부전역에서 동해남부선으로 바꾸는 열차다. 그곳에서 해운대를 거쳐 울산과 경주를 지나 포항까지 올라간다. 오후 느지막한 시간에 포항을 출발한 열차는 다시 해운대와 삼랑진을 돌아 진주와 하동을 거쳐 순천으로 되돌아간다. 철로로 치면 경전선에서 출발해 경부선을 거쳐 동해남부선에 걸쳐 다니는 아주 드문 열차다.
내가 삼랑진으로 가는 데는 까닭이 있다. 지나가는 한 해 동안 벼르다 찾지 못한 발걸음을 위해서다. 4대강 사업으로 강 따라 곳곳에 자전거길이 생겼다. 옛날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는 물금과 원동을 지나 낙동강 벼랑을 따라 삼랑진 작원관을 지났다. 그 벼랑에 선반처럼 덧댄 다리가 잔도다. 잔도가 있던 자리에 자전거길이 새로 생겼는데 내가 아직 걸어보질 못해서였다.
낙동강 본류가 휘돌아가는 암벽엔 물금 근처 황산잔도와 함께 두 개의 잔도가 있다. 나는 아침 이른 시각에 삼랑진역에 닿아 깐촌으로 향했다. 깐촌은 까치마을인 작원을 순우리말로 부른 이름이다. 깐촌 강변길엔 처자교와 승교의 쌍다리 전설이 전해온다. 인근 절의 중이 마을의 아리따운 아가씨를 흠모해 청혼하자 아가씨가 이를 뿌리치려고 돌다리 놓기 시합을 제안해 생긴 다리다.
며칠 전 내린 남녘의 폭설로 강줄기를 제외하곤 희끗희끗했다. 자전거길 관리 부서에서는 예상 밖의 눈이 내려 제설을 하느라 수고가 많았지 싶다. 깐촌 마을를 지나니 경부선은 벼랑의 터널로 지나고 자전거길은 강심에다 교각을 줄지어 세워 데크교량으로 지나갔다. 우리나라 토목기술이 날로 발전해 감을 알 수 있었다. 강 건너편은 도요나루였다. 낙동강 본류는 넘실넘실 흘렀다.
예년보다 가을 이후 겨울 강수량이 제법 되어서인지 수량이 넉넉하고 물은 깨끗하였다. 데크교량 위엔 장비가 진입되지 못해 제설을 하지 못한 구간이 있었다. 눈길을 걸을 때마다 신발에 와 닿는 소리는 ‘뽀드득뽀드득’이 아니고 ‘싸그락싸그락’이었다. 눈이 살짝 녹았다가 다시 결빙되었기에 신발에 와 닿는 감촉이 달랐다. 세밑에 매서운 추위가 닥쳐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도 끼었다.
작원잔도를 돌아가니 양산 원동이었다. 원동 용당마을 앞에는 강심의 용에게 제사를 지내는 가야진사가 있었다. 그곳은 신라의 변방으로 강 건너 김해 상동 용산은 가야 땅이었다. 조선조 왕실로부터 제수를 지원 받고 고을 원님이 제관이 되어 용신에게 엄숙한 제례를 올렸다. 사당을 지나니 원동역이었다. 원동은 순매원과 영포마을의 매실나무로 이른 봄이면 매화축제가 알려졌다.
순매원을 지나 화제들녘을 앞두고 볕바른 벤치에서 컵라면 국물로 도시락을 비웠다. 인근 지역 초등학교 교감으로 근무하는 후배에게 안부 전화를 넣었다. 후배가 학교에 잠시 들려가길 원했다만 물금역을 향해 줄곧 내려갔다. 가까운 산세가 오봉산으로 신라 적 최치원이 임경대에 올라 낙동강을 굽어보고 남긴 한시 전해 온다. 최치원은 시에서 지금의 낙동강을 황산강이라 불렀다.
화제들녘은 낙동강 파수꾼 김정한의 ‘수라도’ 창작배경이 되는 곳이다.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양쪽엔 부산 시민들의 식수원인 취수장이 있었다. 물금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부산 호포다. 그곳에서 사상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도 된다만 부전에서 순천으로 가는 무궁화호열차가 물금역에 다가올 시간이었다. 표를 끊어 플랫폼으로 나가 열차에 오르니 반시간 남짓 걸려 창원중앙역에 닿았다. 12.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