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보호 좌회전
복효근
알아서 가라는 뜻일 게다
보호해 주지 않을 테니
책임지지 않을 테니
니 인생 니가 알아서 살라는 뜻
겁박이거나 책임 회피거나
시험의 기미가 농후하다
이 땅에서 왼쪽은 언제나 위험한 곳
숟가락을 왼손으로 잡아들면 대가리부터 쥐어박혔다
반대 차선에서 멀리 한 대 다가오는데 망설이자니
뒤차가 경적을 울린다
이건 자율의 뜻이라고
직진 신호에도 좌회전할 수 있으니 허용의 뜻이라고
왜 만사를 삐딱하게 바라보느냐고 한 말씀 하시는 것 같다
자율과 자유는 어떻게 다른가
직진 신호에서 좌회전하다가 골로 간 사람 더러 있다
노조에 가입했다가 나는 좌빨 소리도 들었고
짤릴 뻔도 하였으니
외야의 좌익수마저도 불안해 보인다
어쩌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뒤로
저 애매한 시그널 앞에서
겁 많은 이 작자는 잠시 자기검열 중이시다
호박오가리
여든일곱 그러니까 작년에
어머니가 삐져 말려주신 호박고지
비닐봉지에 넣어 매달아놨더니
벌레가 반 넘게 먹었다
벌레 똥 수북하고
나방이 벌써 분분하다
벌레가 남긴 그것을
물에 불려 조물조물 낱낱이 씻어
들깻물 받아 다진 마늘 넣고
짜글짜글 졸였다
꼬소름하고 들큰하고 보드라운 이것을
맛있게 먹고
어머니께도 갖다 드리자
그러면
벌레랑 나눠 먹은 것도 칭찬하시며
안 버리고 먹었다고 대견해하시며
내년에도 또 호박고지 만들어주시려
안 돌아가실지도 모른다
------------------
복효근 / 1962년 남원 출생. 1991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 『마늘촛불』 『따뜻한 외면』 『꽃 아닌 것 없다』 『고요한 저녁이 왔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