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보릿고개
사실 우리세대는 보리고개 세대는 아니지만 어렵게 생활은 한것같다 60년대 큰홍수로 집과 전답이 폐허로 된적이 있었다 그여파가 고등학교 다닐때 까지 이어졌는가 보다 홍수의 피해는 나에게는 더욱더 피해가 엄청났다 그때 우리마을은 침수로 인하여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이 논밭은 없어지고 인명피해까지 있었다 그이후 10여년을 피해복구에 힘썻지만 재기하기란 힘들었는것 같다 요즈음은 적십자에서 가재도구지원과 봉사활동단체에서 음식물제공등 복구에 많은 도움이 있지만 그시절 못먹고 못입고 못배우고 모든 것이 힘들때 우리는 배움의 자리에서 힘들게 학교생활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는 반찬은 없어도 하얀이밥 한번먹어보는 것이 꿈이였다 그래도 감천중학교 다닐때 친구들 뺀또내용은 하얀이밥으로 채워진 친구들이 대부분이였다 솔직히 점심시간에 보리밥으로만 만들어진 내뺀또를 내놓고 먹을때에는 부끄러움도 있었다 그때만 하여도 이몸은 키도크고 뒤에서 큰물(ㅋㅋㅋ)에 놀던때라 별로 부끄러움이 없이 빙둘러서 먹은기억이 난다 그러나 긴긴여름날 매일 똑같은 보리밥은 하얀이밥에 비교하여 너무나 초라했다 어느날 아침 어매! 도시락밥이 너무 까맣것 같은데 흰밥으로 좀 채워주소! 어린마음에 어매한테 무심코 말씀드린 내용이 어머님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모진말이 되었다 지금도 우리어매 그때 내말을 잊어버릴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요즈음도 우리애들한테 말씀들 하신다네 그이후 나의뺀또의 내용은 흰색으로 바뀌었다네 흰색으로 바뀐 것이 이밥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보리밥과 감자를 썩어서 만든 것이 나의 도시락 내용이였지 지금은 이렇게 추억의 이야기를 하고있지만 우리부모님들은 가슴에 한을 간직하고 있었다니 죄스런 마음뿐이라네 그때의 재미있는 애피소드를 한번 올려본다네 중학교 2학년정도 되었을 무렵 학교에서 늦도록 운동을 하고서 해가진후 우리집까지 약20리길 버스탈돈은 없고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20리길을 달리고 나면 온몸은 초죽음이 되어있었지 그날은 배가고파서 기진맥진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데 욋딴집에서 막걸리를 파는집이 있었다 찌끄러진주전자에 안주는 김치에 그때가격이 몇십원정도 했는가 보다 학생복으로 막걸리집에 들어가서 아지매! 여기막걸이 한되만 주소! 했더니 그아지매 하시는 말씀 학생이 배가많이 고픈모양이네 하시면서 막걸이를 주셨다 그때만해도 막걸이 맛이 어떻한지도 모르고 오직 배고품을 채우기 위하여 한되를 한번에 들이켰다(지금도 나의주량은 밀밭근처만 가도 취할정도로 술에 약함)빈속에 들이킨 술이 나를 인사불성으로 만들었다 깜깜한 밤에 학생눔이 술에 취해서 신작로를 팔자걸음으로 걷고 있을때 우리아부지와 어매 초롱불을 들고서 막내아들 마중 나오셨지 저멀리에서 유~이~기~ 어데있노 유~이~기~ 어데있노 하시는 음성이 가물가물하게 들렸다 그때서야 정신을 바짝차리고 부모님이 마중을 나온신 것을 알고서 간신히 부모님 부축하에 집에온 것이 엊그제 같았다 이모든 것이 보리고개때 먹을것이 없어서 일어난 애피소드가 아닌가 오늘은 토요일 근무하는 토요일이라 이렇게 중학교 시절의 옛추억을 더듬어 봤다네
칭구들아 우리모두 시간되면 추억의 보리밥집에서 추억을 되새겨 보세나 별내용도 없는데 길어졌네 잘들있게나 안~~녕
보리고개가 시작되는 계절에
양송이
첫댓글 그 시절 그 예기 그 추억속의 보물 조각들을 가장 오롯이 간직하고 계신 분이 바로 양송이가 아니겠나 싶네! 자네의 그 걸쭉한 <막걸리 테러>사건 예기 정말 압권이네! 따봉이야! 역시 멋장이야! 자주자주 올려주시게!
오랜만에 보리고개 소리 들어보니 새삼스럽군, 요즘은 어찌 보리필때만되면 숭어 때 올라오는가 거것만생각하고있어는데 정말이지 잠시나마 향수에 젖어보아네그려
그때가 옛날이구먼 그러나 지금 애들에게는 절대로 그런말하면 못써 쌀이없으면 라면이라도 먹으라고 한다네 장글 잘 ~~읽었네 건강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