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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8일
말씀 : 요1:5
제목 : 빛의 삶
설교의 대상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구원받고 중생했으면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에서 떠나 세상과 짝하며 살아가는 심령들에게 전하는 ‘돌아오라, 돌아서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죄악의 삶을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을 떠나 말씀에 불순종하는 우리들에게도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들의 성화와 성장의 삶을 원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신 목적, 즉 그분께 영광 돌리는 삶을 위해 우리가 성화의 삶, 하나님을 아는 삶으로 열방을 향해 그분의 공의와 정의를 외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이 일들을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신약 교회의 신비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사랑과 의지가 내재되어있으며 교회를 통해 그분의 뜻과 의도가 나타남을 보셔야 합니다. 이에 대한 말씀을 계속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왜 성장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왜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시고 지체들이 유기체적으로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 안에 얼마나 놀라운 비밀들이 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를 통해서 이런 사실을 알고 그 신비와 비밀을 공유하며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과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그분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도록 성장하여 세상의 어두운 곳까지 빛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자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성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 교회가 연합하여 하나됨을 지킬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변화된 심령, 즉 바뀐 성향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양식이 되어 나와 교회가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4장 7절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구원받은 자들이 그분을 알게 하십니다. 렘24:7은 여호와께서 특별한 섭리를 베풀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로 귀환하게 될 것이라는 뜻인데 이는 신30:1-10에서 하신 약속,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추방당할지라도 다시금 돌이켜 회개하면 새롭게 회복될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언약을 갱신하겠다’는 예언은 돌이킴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교회의 비밀과 신비를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인지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스스로 확인합니다. 말씀에 비춰 보면 무지하고, 고집스러우며, 변덕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심으로써 그분의 지식을 공급받는 통로로 삼아 교회가 성장하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그분의 백성을 에워싸고 있는 어둠을 걷어내시고 가장 미개한 자부터 가장 위대한 학자에 이르기까지 언약의 공동체에 속한 모든 지체가 그분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호2:19-20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구약의 언약이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방법은 바로 ‘빛으로’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참 빛’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강력한 빛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너희’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 즉 교회가 세상의 빛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인해 세상을 비추는 새 빛이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을 알게 될 날, 곧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그분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할 날이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예언합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을 통해 그날이 시작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변화된 심령들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통해 그리스도를 공경하며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성화의 삶에는 빛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을 힘입어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삶이며 열방을 향해 공의와 정의를 외치는 삶입니다. 이 약속은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에게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빛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은 그의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왜 빛의 삶을 살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연단과 훈련을 통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의 원석은 아릅답지 않지만 세공하면 우리가 아는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인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훈련하고 다듬어내는 작업들이 필요합니다.
둘째, 세상 사람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대립 상황을 들여다보면 자기편 사람이 크게 잘못하면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큰 인물이 되기 위해 연단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편 사람 누구 하나가 조금만 잘못해도 엄청나게 비난하면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목적은 교회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자들이 교회의 작은 잘못을 발견했을 때 교회를 향해 엄청난 비난을 쏟아내고 있는 상황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면 그들의 마음이 움직일까요? 요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에서 빛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어둠’은 앞 절을 보면 생명을 가로막는 죽음의 세력, 즉 사탄과 그의 아래에서 부단히 죽어가는 죄악 된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또한 이 말씀의 원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리고 빛이 어둠 안에서 비추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성육신을 통해 죄악 된 세상 안으로 임하셨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승천 이후에도 생명의 빛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비추다’의 헬라어 ‘파이노’의 3인칭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빛이 쉼 없이 비추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교회가 빛의 군사로서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투쟁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깨닫다’의 헬라어 ‘카테라벤’은 본래 ‘굳게 잡다’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깨닫다’, ‘이해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죄악 된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이 이 말씀의 전반적인 맥락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러 차례 나타납니다. 결국 저자 요한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이 세상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었습니다.
‘카테라벤’이라는 단어를 통해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심으로 교회가 부여받은 빛의 사명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죄악의 세력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즉 이 세상은 악한 세력들이 붙들고 있기 때문에 어둠에 빛을 아무리 비춰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둘째, 죄악의 세력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빛의 세력을 궁극적으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교회를 통해 계속 증거되고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는 것은 참된 회심의 표징이며, 그 회심의 삶이 이 땅에서 주님 재림 전까지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 주님과 우리가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승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능력이며,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은혜입니다. 요일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을 아는 확실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며, 성화의 삶은 어둠을 물리치고 빛으로 승리하는 삶이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 계속 증명하고 있습니다.
외과 의사인 양승봉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996년에 네팔 선교사로 파송된 양 선교사님은 네팔에서 사역을 하다가 2012년 귀국해서 선교사님은 목 디스크 수술을, 사모님은 갑상선 낭종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시 네팔로 돌아가려 했지만 목 디스크는 도로가 좋아야 하고, 갑상선은 공기가 좋아야 하는데 네팔은 두 가지 모두 굉장히 열악한 나라라서 결국 2013년에 네팔 대신 베트남으로 선교지를 옮겨 의료선교를 시작했습니다. 네팔과 베트남에서 엄청난 일들이 있었습니다. 시간 되시면 인터넷에서 양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찾아서 한 번 들어보십시오. 네팔에 의료보험을 정착시킨 인물입니다.
그런데 양 선교사님 가족이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항상 큰 걸림돌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모님과 아이들이 입고 나올 옷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옷은 주로 분리수거함에서 그나마 입을 만한 것을 주워 입고 다녔고, 아이들은 아저씨 잠바를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의사로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양 선교사님은 사명의 삶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수술 후 한국에 머물면서 잠깐 페이닥터로 일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지금 뭐 하는 짓이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베트남으로 들어가 의료선교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빛 된 삶의 가치는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로 이끄시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기 위해 교회에 재능 있는 성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모두가 은사를 받아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며, 연단과 훈련 속에서 발산되는 빛 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세워주셨습니다. 이 사역은 일평생 지속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깨우쳐주시는 성령을 통해 주님을 알기를 힘쓰고,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그 지식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속죄의 길을, 성령을 통해 거듭남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는 교회를 세워 그분의 새로운 백성을 일으키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회를 통해 그분과 화목하고 변화를 통해 성장하여 그분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을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 성령을 통해 자신의 신분과 특권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행하신 일과 그 은혜를 알아 삶 속에서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실 위에 삶을 계획하고 건설해 나가는 그분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선한 것이며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분명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를 통해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현실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 현실 위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적대시하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을 양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양은 온순하며 목자의 음성을 올바로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양이 주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면 우리는 진정 참된 양입니까? 여러분은 본성이 바뀌셨습니까? 정말 말씀이 들리십니까? 귀가 아닌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현실에서 조금 손해 보더라도 그곳을 지배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가기에 우리는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과 보이지 않는 참 교회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회심한 후 영생을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분께서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죄는 그릇되지만 순종은 옳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온전하게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의 점검표를 다시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날로 커지고 있는가? 삶 속에서 진리를 따르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따라 살고 있는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삶을 계속 적용하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가 빛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믿음의 사람들은 계속 이런 질문들에 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 또한 이 질문들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던집니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연합하여 성장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드렸습니다. 오늘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믿음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인격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이라고 반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우리에게 ‘모험’을 요구합니다. 모험의 주체는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길은 우리의 모험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이 모험은 반드시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모험을 한 사람으로 베드로를 꼽을 수 있습니다. 마14:28-30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우리의 현실에는 중력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법칙은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중력, 즉 질량을 가진 물체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무게가 있는 물체는 땅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물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자 베드로도 걷길 원했고 주님께서는 걸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모험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기준은 말씀이지만 말씀이 현실과 충돌할 때 우리는 언제나 현실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현실을 이깁니다. 즉 모험적인 믿음의 결과는 반드시 빛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험적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모험의 길을 걷는 복된 교회가 되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현실에서 이뤄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